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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밥을 다시 생각한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webmaster@sisain.co.kr 2018년 09월 07일 금요일 제5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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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성에게 밥이란 무엇일까? 요즘 나의 관심 주제다. 아버지는 요리사였기에 요리하는 ‘능력’을 갖췄지만 그런 능력을 평소에는 슈퍼맨의 빨간 팬티처럼 꼭꼭 숨겨둔다. 어찌 된 일인지 아버지는 어머니가 있을 때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명령만 한다. 그런 아버지의 명령에 어머니는 매일 수라간 나인이 되었다가 기미 상궁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밥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죽기도 하는 세상이다. 인터넷에서 밥과 관련한 검색어를 입력하면 ‘밥을 안 차려줬다’며 아내에게 둔기를 휘두르고, 늙은 어머니를 살해하고, 심지어는 고모도 죽였다는 기사가 와르르 쏟아진다. 사람은 일정 기간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나 밥을 ‘차려주지 않아도’ 죽을 수 있다는 현실이 놀랍기만 하다. 폭력을 행사하거나 살인까지 하지 않아도, 결혼의 의미를 밥에다 크게 두는 남성도 많다. 어떤 남성 배우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결혼 생활 중 언제가 가장 좋은가?”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새벽 5시에 촬영을 나가도 아내가 아침밥을 차려줄 때”를 꼽았다.

ⓒ정켈 그림

밥이 도대체 뭐기에 왜 멀쩡한 신체와 지력을 가진 인간이,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밥 한 끼도 스스로 차려 먹지 못할 정도로 비주체화되는가. 자기 자신을 비주체화하여 여성의 역할과 기능을 통제함으로써 권위를 지키는 게 남성·가부장의 민낯이 아닐까. 그런 원초적 권력을 가장 손쉽게 확인하고 누릴 수 있는 매개가 ‘밥’인 것이다. “밥 줘!”라는 말은 마치 정언명령과 같아서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딸, 남자 형제와 여자 형제간의 신분을 재정의하고 그에 합당한 역할을 부여한다. ‘차리는’ 밥이 아니라, ‘차려주는’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권력자이다.

가정에서 남성이 여성을 통제하는 가장 기본적 수단이 ‘밥’이라면, 사회에서는 ‘법’이 아닐까. 법은 집요하게 여성의 행위를 통제하고 문제의 원인으로 돌려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발급한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불법으로 여성의 신체를 촬영한 남성의 죄를 묻지 않고 오히려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지 않았는지 묻는다. 남성이 위계 혹은 무력을 사용하여 성폭력을 저질러도 여성이 정조를 지키려고 노력했는지, 피해자다운 행동을 했는지 추궁한다. 여성이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해도 마찬가지다. 낙태하는 순간 여성의 몸은 ‘불법’이 된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수행비서 성폭력’ 사건의 1심 판결을 두고 법조계 안에서도 이견이 넘칠 정도로 이 사건은 논쟁적이다. 재판부는 피해자 측의 증언을 배제하고 가해자 측에게 유리한 정황과 증언만 채택했다. 그러면서 현재 우리 사회 성폭력 범죄 처벌 체계 아래에서는 안희정 전 지사를 유죄라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재판부의 판결은 ‘어쩔 수 없음’의 결과가 아니라 가해자를 (합법적으로) ‘구원’했다고 보는 게 맞다.

‘법과 밥’의 세계를 바꾸자는 싸움

지난 8월18일과 25일에는 성차별 수사와 판결에 항의하고,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2016년 ‘촛불’이 사적 권력에 의해 마비된 법의 정상화를 요구했다면, 2018년에 등장한 ‘횃불’은 ‘현행법’ 뒤에 숨어 제도 바깥으로 여성을 내몰며 억압하는 법의 비정상성을 폭로하며 전면 수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상했든, 뜻밖이든 지금 여성들은 한국 사회의 최전선에 서 있다. 밥으로 상징되는 가부장 체계를 거부하는 일도, 법을 바꾸는 일도 ‘사회를 극복하는 사회’를 위해서는 물러설 수 없는 최전선이다. 이 낡고 좁은 문을 부수는 건, 5년마다 바뀌는 권력을 내쫓는 일보다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물러서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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