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앞에 놓인 ‘복잡한’ 밥상 [2021 행복한 책꽂이] 오수경 (자유기고가) 나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준 선생님은 말했다.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의 편에서, 무엇을 드러내야 하는지, 누가 읽으면 좋을지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이 말은 내게 “글 쓰는 사람에게는 ‘현장’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로 번역되어 들렸다. 현장이 없다면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제대로 가늠할 수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누구’도 ‘무엇’도 발견할 수 없을 테니까. 나는 이 현장을 ‘사회’라고 부른다.〈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의 저자인 농촌사회학 연구자 정은정의 글에는 늘 ‘현장’이 있다. ‘김장하는 날’ 태어나 ‘도마도 집’ 딸로 ‘코로나 블루’의 심상치 않은 징후들 오수경 (자유기고가) 처음 ‘코로나 블루’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름이 참 예쁘기도 하네~”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 속 문장이 떠오른다.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도 푸릅니다.” 요즘 자주 너무 깊고 푸르러, 오히려 까맣기까지 한 아득한 심연으로 가라앉는 경험을 한다.방역 당국이 지난 8월30일부터 수도권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를 시행하면서 내가 일하는 곳도 본격적으로 근무 방식을 바꾸었다. 집에서의 일상도 달라졌다. 작은 원룸은 집이자 사무실이 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출근하기까지 3초면 충분 자녀의 성과 본은 출생신고 때 선택하자 오수경 (자유기고가) “나의 씨를 세상에 남기고 싶어.” 결혼과 출산을 강력하게 희망하는 남성 친구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었다. 너무 솔직해서 당황했지만 이해는 되었다. 인류 역사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신의 명령을 따라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애쓴 역사이기도 하니까. 가부장 사회에서 대를 이어야 하는 남성이 ‘씨’를 남기는 게 과업인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과 닮은 인간을 세상에 남기고 싶은 욕망이 어디 남성에게만 있겠는가. 그 욕망은 여성의 것이기도 하다. ‘성씨’도 마찬가지다. 여성에게도 자신의 성을 물려주고 싶은 욕망이 있다. 아버 드라마 속 연애는 이미 ‘표준’이 아니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사랑하는 딸이 독거 상태로 외롭게 늙을까 봐 걱정이 많은 엄마는 마치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오듯 부지런히 소개팅을 주선했다. 그런 엄마의 노력이 너무 싫었지만, 보수적인 가정에서 성실하게 자란 ‘K-장녀’인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조건을 걸고 소개팅을 했다. 소개팅을 한 날이면 결과와 상관없이 이제 당분간 엄마에게 덜 미안해도 된다는 생각에 홀가분해졌다. 어쩌다가 소심한 저항을 한 날도 있었다. 엄마가 다니는 문화센터 옆자리에 앉은 어느 아주머니의 친척을 만나보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은 날 울분을 터뜨리 비트코인으로 돈 벌어 무얼 하겠다고? 오수경 (자유기고가) “비트코인으로 돈 벌어 OP(오피스텔 성매매) 가야지.” 비트코인 열풍이 한창이던 때 ㄱ의 남성 직장 동료들은 이런 대화를 나누며 정답게 낄낄거렸다고 한다. 비트코인이 온라인 메신저 텔레그램 ‘n번방’의 주요 거래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낄낄거림이 생각났다.비트코인에 투자하던 모든 남성이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날로 발전하는 기술이 남성들의 성착취 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하는 건 분명해 보인다.기술 발전이 만들어낸 디스토피아문명의 발전이 인간에게 꼭 좋은 일인가? 우리는 날로 발전하는 기술을 누릴 자격이 있을까? 페미니즘의 그릇을 축소하는 여성들 오수경 (자유기고가) “트랜스젠더 학생의 입학을 반대한 페미니즘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강의를 마치자 한 청중이 질문했다. 요즘 이와 비슷한 질문을 종종 받는다.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여성만을 위한 운동인가? 난민, 게이, 트랜스젠더 등 배제할 존재 목록을 만드는 페미니즘이 과연 페미니즘일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은 결국 페미니즘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페미니즘을 지향해야 하는가에 관한 근본적 질문으로 연결된다.내가 페미니즘을 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페미니즘은 나를 억압하는 차별과 불평등을 자각하지 못하던 내게 찾아온 질문이고, 대답이고, 렌즈 ‘가족끼리’ 그럴 수 있다고? 오수경 (자유기고가) “며느리들~ 살아 있어?” 매번 명절 끝 무렵에는 결혼한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아무리 경력과 실력을 두루 갖춘 직장인일지라도, 뭇사람과 토론해도 밀리지 않을 지식과 교양을 겸비한 페미니스트일지라도 명절에는 흔한 ‘유교걸’이 되기 마련이다. “이젠 세상이 바뀌었다” “요즘에는 며느리 눈치를 봐야 한다더라” 등 말로 며느리의 저항을 원천봉쇄하는 남편 원가족의 견제, “작은엄마도 ‘메갈’이에요?” “요즘 젊은 애들은 지들끼리 잘살려고 애도 안 낳는다는데 너희도 그러는 건 아니지?” 등의 곤란한 질문에 묵언수행을 하다가 명절이 끝나면 양진호 회사가 여전히 승승장구한다고? 오수경 (자유기고가) “양진호의 위디스크가 개인방송 채널을 신설했대.” 후배의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거기 망한 게 아니었어?” 양진호는 구속되었으나 디지털 성범죄 카르텔에 기반을 두고 성장한 위디스크는 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채널을 신설하며 확장하고 있다. 개인방송이란 유튜브나 아프리카TV처럼 실시간 방송을 하는 플랫폼이며 당연히 성인 전용이다.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그곳에 접속해보았다. 회원 가입부터 성인 인증을 통해 개인방송에 접속하게 되는 모든 과정이 신속하고 순조로웠다. 그 후 내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차마 지면에 옮기지 인권 과제 앞에서 ‘나중에’를 외치는 정부 오수경 (자유기고가) 2014년 〈형영당 일기〉라는 단막극이 논란 끝에 방영되었다. 논란이 된 이유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퀴어’ 소재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드라마는 2006년 극본 공모전 단막극 부문 대상을 받으며 눈 밝은 관계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소재라는 이유로 8년 뒤 동성애를 반대하는 집단의 거센 항의 끝에 주요 내용이 상당 부분 수정된 후 방영될 수 있었다.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19년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는 동성을 사랑하는 작곡가가 주요 인물로 등장했다. 또한 tvN 드라마 〈60일, 지 아버지 세계는 망했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원가족에게서 독립하며 ‘내 삶이 가족으로부터 선명하게 분리될 수 있을까’ 회의적 질문을 할 때가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수건과 그릇 때문이었다. 엄마는 뭐 하러 새것을 사냐며 ‘○○○ 여사 회갑 기념’ 따위 글자가 박힌 수건을 내놓았다. 그리고 “너 시집갈 때 주려고” 차곡차곡 모은 그릇도 꺼냈다. 그것들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엄마는 진심으로 서운해했다. 아빠는 내가 독립하는 것 자체를 못마땅해했다. 한 개인이 가족 구성원에서 단독자로 살게 되는 일이란 단박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닌, 점진적으로 이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성취에 “대한민국이 강간의 왕국이냐” 오수경 (자유기고가) 봉준호 감독이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는 〈기생충〉이 한국적 소재를 다루었지만 세계에 “보편적으로 이해되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번 수상으로 그의 생각이 증명된 셈이다. 그의 수상이 더 반가운 이유는 그가 ‘표준근로계약’ 사항을 지키며 촬영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는 그의 작품 세계는 사회의 나쁜 관습 중 하나에 저항하며 새로운 표준에 따르면서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황금종려상 수상을 보편과 표준의 승리로 이해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사회의 보편은 무엇이고, 표준은 무엇일까? ... ‘묻지마 범죄’일수록 물어야 할 게 많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출근할 때마다 듣는 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이 있다. 4월17일 아침, 앵커 목소리는 다급했다. 경남 진주시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어느 남성이 자기 집에 불을 지른 후 대피하는 주민들을 흉기로 살해했다는 내용의 긴급 속보였다. 앵커는 신속하게 현장에 있는 기자를 연결해 사건 정황을 알렸다. 사건이 난 아파트 옆 동 주민 할머니도 인터뷰했다. 그 과정에서 앵커는 이 사건을 “묻지마 테러가 분명해 보인다”라며 확신했다. 사건이 새벽에 발생하여 다른 언론사에서 제대로 된 기사가 나오기 전이었고, 인터뷰에 응한 할머니도 사건을 목격한 게... 버닝썬이 쏘아올린 ‘큰 공’ 오수경 (자유기고가) 지난해 12월14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어느 남성의 글이 올라왔다. 클럽 ‘버닝썬’에서 위기에 처한 여성을 돕다가 클럽 관계자에게 폭행을 당했는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오히려 피해자인 자신을 체포 및 폭행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단순 폭행 사건으로 여겨지던 이 사건은 버닝썬과 경찰 사이 유착 관계를 조사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이어져 하루 사이에 20만명이 넘게 동의했다. 버닝썬 측은 이에 대해 사과하며 해당 남성이 여성을 추행하는 것을 제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라 해명했다. 그러나 해명과 무관하게 ... 드라마 속 여성, 여러분 보기에 어떤가요? 오수경 (자유기고가) 증강현실 게임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현실과 가상세계를 넘나들며 도시 곳곳에 출몰하는 적들과 전투를 벌이는 게임이다. 칼이나 총을 들고 전투를 벌여야 하는 속성 때문인지 그곳은 ‘남초’ 세계다. 물론 그 세계에도 여성은 존재한다. 플레이어들이 무기를 사고파는 ‘카페 알카사바’에서 클래식 기타를 치는 엠마다. 정확히 말하면 엠마는 플레이어가 아닌 NPC(Non Player Character)이다. NPC는 게임 개발자가 부여한 역할만 제한적으로 수행한다. 엠마는 플레이어와 대화하며 회복력을 높여주는 ‘힐러’ 역할을 한다. 또... ‘성폭력 사건’ 재판은 끝나지 않았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11월19일 고등군사법원 특별재판부(홍창식 판사)는 해군 성소수자 여성 중위(현재 대위) A를 성폭행한 혐의로 지목된 B소령에게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B소령과 같은 혐의로 기소된 C중령(현재 대령)도 얼마 전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건의 발단은 2010년으로 거슬러간다. 당시 같은 함정에서 근무하던 B소령은 A중위가 부하이고 성소수자라는 점을 빌미로 “남자 맛을 알려주겠다”라며 위력을 사용해 수차례 성폭행 및 강간을 했다. 이 일로 A중위는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중절수술까지 해야 했다. 비극은 여기... 사건의 주어 제대로 부르자 오수경 (자유기고가) 1998년, 이른바 ‘X양 사건’이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한 여성 배우와 H씨의 성관계 동영상이 유출된 것이다. 비디오로 유통된 이 동영상은 요즘처럼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음에도 ‘안 본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뉴스 기사에 따르면 ‘음란물 암시장에서 유통 초기 100만원까지 이르던 이 비디오가 단 두 달 만에 1만원도 채 안 되는 가격으로 떨어질 만큼’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었다. 결국 그녀는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으며, 검찰은 상대 남성이 고의로 동영상을 유포한 게 아니라... 법과 밥을 다시 생각한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한국 남성에게 밥이란 무엇일까? 요즘 나의 관심 주제다. 아버지는 요리사였기에 요리하는 ‘능력’을 갖췄지만 그런 능력을 평소에는 슈퍼맨의 빨간 팬티처럼 꼭꼭 숨겨둔다. 어찌 된 일인지 아버지는 어머니가 있을 때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명령만 한다. 그런 아버지의 명령에 어머니는 매일 수라간 나인이 되었다가 기미 상궁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밥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죽기도 하는 세상이다. 인터넷에서 밥과 관련한 검색어를 입력하면 ‘밥을 안 차려줬다’며 아내에게 둔기를 휘두르고, 늙은 어머니를 살해하고, 심지어는 고모도... 여성인 나도 안전하게 살고 싶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한국은) 총기도 금지돼 있고 마약도 금지돼 있고 소위 청정국인데요. 그런데도 여성들이 이렇게 많이 죽는 이유가 뭐냐. 많은 해외 연구자들도 굉장히 궁금히 여기는 점이거든요.” 7월11일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한 이수정 경기대 교수의 말이다. 유엔 범죄통계에 따르면, 서구 사회는 남성이 범죄 피해자일 확률이 여성보다 높은데 한국 사회는 남녀 비율이 동등하다. 다른 영역에서는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던 ‘성평등’이 불행하게도 범죄 영역에서는 이루어진 걸까? 그렇다면 누가 여성들을 죽일까? 배우자를 포함한 친족(41... 이른바, ‘몸들의 혁명’ 오수경 (자유기고가) 어느덧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노브라’로 외출할 때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화장 역시 나의 자유가 아니다. 화장을 안 하면 ‘예의 없는’ 여성이 되고, 예의를 갖추기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서라도 화장하면 ‘개념 없는’ 여성이 된다. 옷을 잘 입거나 ‘착한’ 몸매를 유지하는 일도 여성이 갖추어야 할 능력이다. 언제든 몰래 찍힐 수 있는 걸 감수하며 조심하는 일도 여성의 몫이다. 뭇 남성의 심기를 건드리면 제아무리 능력과 사회적 지위를 갖추어도 그저 ‘개시건방진’ 여성이 될 수 있으니 친절은 ... 이상한 나라에서 며느리가 운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명절이 지나면 기혼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며느리들! 이번 명절에도 잘 살았어?”라고 물으면 각종 사연이 프리스타일 랩처럼 와르르 쏟아진다. 사적으로 대화창에 머물던 며느리들의 서사가 요즘 들어 공적 담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첫 신호는 2017년 화제를 모은 웹툰 〈며느라기〉다. 이 웹툰에서 며느라기란, ‘며느리들이 시댁 식구들한테 예쁨을 받거나 칭찬받고 싶어 하는 시기’를 뜻한다. 웹툰 속 ‘민사린’이 처한 현실은 많은 여성에게 공분을, 남성에게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지난 3월 〈SBS 스페셜〉은 ‘며느라기-화목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