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강현실 게임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현실과 가상세계를 넘나들며 도시 곳곳에 출몰하는 적들과 전투를 벌이는 게임이다. 칼이나 총을 들고 전투를 벌여야 하는 속성 때문인지 그곳은 ‘남초’ 세계다. 물론 그 세계에도 여성은 존재한다. 플레이어들이 무기를 사고파는 ‘카페 알카사바’에서 클래식 기타를 치는 엠마다. 정확히 말하면 엠마는 플레이어가 아닌 NPC(Non Player Character)이다. NPC는 게임 개발자가 부여한 역할만 제한적으로 수행한다. 엠마는 플레이어와 대화하며 회복력을 높여주는 ‘힐러’ 역할을 한다. 또한 평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엠마 주변 20m 내에서는 전투할 수 없도록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을 남성 사회의 NPC 정도로 활용하는 드라마들

ⓒ정켈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알 수 없는 오류로 게임과 현실이 뒤섞이며 전개되는 이야기다. 엠마의 실제 모델은 게임 개발자인 정세주(찬열)의 누나 정희주(박신혜)다. 그렇다면 현실에서의 정희주는 어떤 여성일까? 어느 날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호스텔을 운영하던 정희주 앞에 투자회사 대표 유진우(현빈)가 나타나고 그녀는 사건에 휘말린다. 이후 그녀는 죽을 고비에 처한 유진우를 간호하거나, 행방불명된 정세주를 찾겠다며 게임에 몰두한 유진우를 기다리거나, 사라진 유진우를 찾아다니거나, 연인 관계로 발전한 유진우에게 키스를 당하는 역할로 제한된다. 즉 게임 속 NPC인 엠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 

드라마 속 여성이 NPC처럼 존재하는 건 이 드라마만의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tvN 드라마 〈남자친구〉는 한국 드라마가 사골 국물처럼 우려먹은 ‘상처 입은 재벌 남성’과 ‘가난하지만 씩씩한 캔디형 여성’의 로맨스 구도를 뒤집은 이른바 역클리셰 드라마로 눈길을 끌었다. 인물 설정도 전형성을 탈피했다. 상처 입은 재벌 여성인 차수현(송혜교)은 누구에게도 무례하지 않으며 능력 있는 호텔 사장이고, 재벌 여성을 사랑하는 캔디형 남성인 김진혁(박보검)은 가난하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역클리셰의 마법은 딱 거기까지다. 사랑에 빠진 차수현은 성공적으로 호텔을 운영하는 사장에서 그저 ‘청포도 같은’ 연하의 남자친구에게서 ‘귀엽다’는 말을 들으며 수줍어하는 로맨스 대상이 되었다. 사회적 신분은 전복했지만 젠더·관계의 클리셰는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SBS 드라마 〈황후의 품격〉은 그동안 드라마 속 여성이 겪은 폭력적 클리셰를 반복하되, 수위를 높였다. 대한민국이 입헌군주제라는 가정 아래 전개되는 이 드라마에는 매회 여성을 고문하고 불에 태우는 등 ‘19금’ 폭력이 등장한다. 또한 여성들은 ‘황제’로 표상된 남성의 분노와 욕망을 표출하는 성적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이 여전히 전근대 사회이며 그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 권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도구이거나 (성)폭력의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설정은 2019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현실과 닮았다.

물론 모든 드라마 속 여성이 NPC처럼 남성 사회가 설정한 역할로만 존재하거나, 각종 폭력에 노출된 무력한 대상인 건 아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사회적으로 페미니즘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며 드라마 또한 그 흐름에 맞춰 다양한 여성 서사를 등장시키며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여전히 여성을 그저 남성 사회의 NPC 정도로만 납작하게 활용하는 드라마도 반복 재생되고 있다. 드라마는 우리 일상과 사회와 가장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문화 콘텐츠다. 그렇기에 대중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더 나은 인간과 사회적 ‘지향’을 고민해야 한다. 드라마를 제작할 때 젠더에 관하여 숙고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자명 오수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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