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내린 비를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생각하다가 봄비라고 마음먹고 나니 거짓말처럼 봄기운이 느껴졌다. 아직 잎도, 꽃도 피지 않은 나무에 앉아 지저귀는 새의 울음이 돌연 들리고, 볕이 맑다 싶어서 겨우내 입고 다니던 점퍼 대신에 카키색 코트를 얇은 니트 위에 걸치고 가볍게 집을 나섰다. 실수였다. 오들오들 떨며 버스를 기다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아직 그 겨울의 옷차림이었다. ‘아차, 마음이 서둘렀구나.’ 환절기가 되면 마음이 앞서 매사 서툴러지는 것이 한 계절을 시작하는 일임을 다시금 확인했다. 마음에서 봄이 먼저 시작됐구나 싶었다.
봄이면 어김없이 챙기려는 일이 서너 개쯤 있다. 봄에는 기차보다는 고속버스를 타고 여행하는 일이 옳다. 개인적으론 그렇다. 새벽 버스터미널에서 마주치는 얼굴들이 KTX역에서 마주치는 얼굴보다 느긋한 사연이 있어 보이고, 차창에 기대어 졸다 내려서 후루룩 먹거나 알알이 먹는 휴게소 간식은 봄날이 제철이다. 쌍화탕을 챙겨 먹는 일이나 고속버스를 타고 봄 바다를 찾아가는 일, 창덕궁 낙선재의 수양벚꽃과 매화는 3월22일에서 4월10일 사이에, 대조전 화계의 앵두꽃은 4월8일부터 4월23일 사이에 개화한다는 소식을 찾아 수첩 한쪽에 메모했다. 모두 봄에 몸과 마음을 맞추고 계절을 살아보려는 일이다.
봄의 서막을 여는 일로 오랫동안 내버려둔 물건에 손을 내미는 것도 좋다. 한겨울 동안 한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자전거를 꺼내 먼지를 닦고 쓰다듬으면서, 바람이 다 빠져 물렁물렁해진 자전거를 끌고 자전거 점포로 가면서 맛보게 되는 상념은 꽤 즐길 만한 것이다. 그때의 상념은 따뜻하고 쓸쓸하다. 진짜 ‘쓸쓸한 계절’은 가을이 아니라 봄이다.
한때 나는 자전거를 열심히 타던 청년이었으므로 이즈음 타는 일보다 두는 일이 더 많아진 자전거는 노쇠한 인간의 생활을 그려보게 하고, 사물의 용도가 아니라 쓸모에 관해 궁금해하게 하며, 문득 자전거 가게를 지키는 주인장의 얼굴에 눈길을 보내 나이를 추측해보기도 한다. 한자리를 오래 지키며 몸을 부려 살아온 사람의 얼굴 풍경을 세세히 관찰해보는 일. 그것 또한 봄에 시작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봄에는 한사코 만물이 생기롭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채우고 안장 위에 궁둥이를 붙이고 페달을 밟으며 동네를 한 바퀴 돌 때면 자연히 듣게 된다. 몸에 봄이 오는 소리를. 삐걱삐걱 한 계절 굳어 있던 몸이 풀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몸보다 먼저 마음에 윤활유가 칠해져서 더 오래오래 자전거에 몸을 싣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또 가게 된다. 그 정처 없음. 봄에는 마땅히 가야 할 곳이 없는데도 자꾸만 몸의 방향을 바깥으로 맞춰두고 틈만 나면 걷고 또 걷게 된다.
봄에 맛보는 따뜻하고 쓸쓸한 상념
한적한 곳에 멈춰 서서 연락이 뜸했던 이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안부를 묻는 일은 또 어떤가. 고요히 고개를 들어 하늘 한번 올려다보면 봄에는 이토록 섣부른 사람이 되어도 좋을 일이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마침내 눈물을 흘리게도 된다. 왜냐하면, 봄에는 한사코 만물이 기쁨 속에 들고자 하기 때문이다. 묵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깨끗이 치워버리고 싶은 계절, 어김없이 봄이다. 봄에는 일찌감치 마음속 대청소를 하고 싶어진다. 어떤 이는 비질 한 번으로, 어떤 이는 쓸고 닦는 일로는 모자라 마음을 꺼내 세탁하게 된다. 담아두기 힘든 말들이 넘쳐나는 이즈음, 단 한 가지 분명한 위안은 역시 바뀌어야 할 것은 바뀐다는 사실. 그것이 계절뿐이라도. 봄에는 부러 혼자가 되어 방치해둔 몸과 마음을 쓰다듬고 생각의 바퀴를 굴리며 정처 없는 가운데 웃거나 울어볼 일이다. 그런 일은 새삼 자연스러운 깨달음을 준다. 아, 그때 마음이 서툴렀구나, 서둘렀구나, 섣불렀구나. 왜 그런가 하니 봄에는 만물이 죽음에 맞설 몸과 마음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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