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핵’은 정치권의 금기어였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라는 강력한 구호 앞에 여론은 원전을 필수이거나 최소한 필요악으로 여겼다. 이른바 ‘원자력 마피아’라고까지 불리는 원전 관련 이해관계 집단의 강한 로비력도 한몫했다. 정치권의 원전 관련 발언은 찬사 일색이었다.

후쿠시마 이후, 분위기가 바뀌었다. ‘친원전’이라는 말은 ‘친토건’처럼 부담스러운 꼬리표가 됐다. 2011년 4월에 있었던 강원도지사 재선거.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엄기영 후보는 삼척 원전 유치를 강력히 주장하며 이에 미온적이던 최문순 민주당 후보를 맹공했다. 그러다가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가 터지자 ‘원전 재검토’로 급선회한다. 친원전 딱지가 정치인의 부담이 된 상징적인 사례로 기억할 만하다.

반핵 활동가들도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한다. 녹색당 창당준비위원회에서 사무책임자를 맡은 하승수 변호사는 “녹색당이 제안해서 2월28일 국회에서 원전 토론회를 연다.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은 예상했는데, 민주통합당도 나오겠다는 답이 왔다. 민주통합당이 이런 데 나오는 건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소수 진보 정당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탈핵’이라는 표현을 이제는 야권 전반에서도 들을 수 있다.

 

ⓒ뉴시스2월13일 박원순 서울시장(왼쪽에서 다섯 번째) 등 지방자치단체장들이 모여 탈핵 도시선언을 했다.

 


지난 2월13일에는 전국 45개 기초단위 지방자치단체장이 한자리에 모여 ‘탈핵·에너지전환을 위한 도시선언’(탈핵 도시선언)을 내놓았다. 단체장들은 선언문에서 ‘생각은 세계적으로, 실천은 지역적으로’라는 표현을 인용하며, 탈핵을 위한 에너지 조례 제정과 신재생에너지 지원 등을 결의했다. 이 선언에는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은 물론 김복규 경북 의성군수, 윤순영 대구 중구청장 등 새누리당 소속 단체장도 참여했다.

기초단체만의 움직임도 아니다. 서울시가 1월9일 발표한 ‘15대 시정운영계획’에는 “자원과 에너지를 소비하는 도시에서 생산하는 도시로 전환하겠다”라는 정책 방향이 제시됐다. 서울시는 에너지 절약과 시민참여형 신재생에너지 생산 등을 통해 2014년까지 원전 1기를 줄일 수 있는 에너지 절감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일본 출장을 다녀온 박원순 서울시장도 일본의 전력난 극복에 강한 인상을 받은 모습이었다. 박 시장은 2월13일 탈핵 도시선언 기념식에 참석해 “일본은 후쿠시마 핵 사고 이후 원전이 멈췄는데도 시민 참여를 통한 민주적인 에너지 절약으로 전력 대란을 막아내고 있다. 애초에 원전 50기가 필요했는지 근본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서울시의 ‘2014년까지 원전 1기 없애기’ 프로젝트 추진 의지도 거듭 밝혔다. 한국 정치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선출직으로 불리는 서울시장이 탈핵 의지를 분명히 밝힌 것은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국회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민주당 전·현직 의원 33명은 ‘탈핵·에너지전환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탈핵 의원모임)을 2월16일 출범시켰다. 이미경 총선기획단장, 이인영 최고위원, 정동영 의원 등 당 지도부와 대선 주자도 참여한 묵직한 진용이다. 총선을 앞두고 예전 같으면 조심스러웠을 ‘탈핵’ 키워드를 뽑아들었다.


민주통합당 지도부 반응도 호의적

탈핵 의원모임 간사를 맡은 우원식 전 의원은 지역구가 서울 노원을이다. 탈핵 도시선언을 주도했던 김성환 노원구청장과의 협력 속에 탄생한, 일종의 형제 모임인 셈이다. 우 전 의원 측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에너지 문제를 고민하던 차에, 지자체장들이 탈핵 도시선언을 준비한다는 말을 듣고 입법부의 지원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제안서를 냈다”라고 말했다.

탈핵 의원모임은 신규 원전 건설 중단 및 기존 원전의 단계적 축소, 신재생에너지 확대 등 5대 과제를 민주당 총선 공약으로 내줄 것을 요구했다. 지도부의 반응도 호의적이다. 19대 총선은 원내 유력 정당이 탈핵 공약을 정식으로 제시하는 최초의 총선이 될 전망이다. 한편 새누리당은 원전과 관련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개별 의원들을 보면,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도 강경한 원전 추진론자가 많은 편이다(친원전파 국회의원, 부산·울산에 다수 기사 참조).

민주당이 탈핵 쪽으로 빠르게 기우는 모습을 보이면서, 진보 정당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통합진보당은 2월19일 19대 총선 탈핵·에너지 공약을 발표했다. 노후 원전인 고리 1호기와 월성 1호기를 2012년 폐쇄하고, 2040년까지 모든 원전을 폐쇄하겠다는 계획이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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