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삼성과 이건희 회장은 4월22일 경영쇄신안을 발표했다(사진). ‘인적 쇄신은 꽤 했으나 지배구조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 중평이다.


삼성이 4월22일 내놓은 경영쇄신안의 강도가 세간의 예측을 웃돈 것은 분명하다. ‘재계, 충격과 당혹’ ‘수장 잃은 삼성, 미답의 길 걷는다’ 따위 충격적 조처라는 평가가 언론에 등장한 것이 좋은 예다. 어차피 이번 쇄신안에서 삼성 측이 겨냥한 대상은 ‘대중’이다. 들썩이는 여론을 잠재우는 데는 책임질 사람이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 효과적인 방도는 없어 보인다. 극적 효과도 한몫한 듯하다. 쇄신안이 나오기 직전까지도 이건희 회장은 물론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의 퇴진 가능성이 낮다는 말이 삼성 내부에서 흘러나왔으니 말이다.

파격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정성’이 의심스럽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이것은 지배구조 전문가 같은 기왕의 ‘삼성 공격자’만의 평가는 아니다. 쇄신안을 세세히 뜯어본 눈밝은 이라면 이건희 일가가 대가를 치른 것은 별로 없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현재의 소유·지배 구조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이른바 ‘무노조 경영’ 방침 철회라는, 그동안 노동계와 시민단체의 지속적인 요구에도 응답이 없었다. ‘무노조 경영’ 은 헌법에 보장된 결사의 자유를 제한할뿐더러 삼성만의 독특한 경영 방침이 될 수 없다.

불법 행위를 인정하는 구체성이 거의 없는 것도 이건희 일가의 ‘참된 마음’을 의심하게 한다. ‘지난날 허물을 모두 떠안고 가겠다’와 ‘국민에게 걱정 끼쳐 진심으로 사과한다’거나(이건희 회장), ‘참담한 심경’ ‘물의를 일으켜 죄송’(이학수 부회장)이라는 표현이 고작이다. 쇄신안의 주요 내용과 의미를 다각도로 짚어봤다. 

* 이건희 회장, 경영 일선 퇴진: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과 등기이사, 문화재단 이사장 등 삼성과 관련한 일체의 직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크다. 21년 동안 군림해온 이 회장의 존재감이 공적 영역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병철 선대 회장이나 다른 그룹 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여론이 잠잠해질 때 복귀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영영에 복귀하지 않는다 해도 현재의 소유·지배 구조가 유지되는 한 삼성에서 이 회장의 막후 영향력이 사라지리라고 보는 이는 없다. 사실 극소수를 빼면 삼성 임직원에게는 회장에 대한 실존감이 거의 없었다. 승지원에 앉아 핵심 측근을 불러들이는 게 이 회장의 업무 스타일. 삼성 본관 집무실은 늘 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 이재용 전무의 ‘백의종군’: 이재용 전무가 삼성전자의 글로벌 고객총괄책임자(CCO) 직을 사임하고 ‘여건이 열악한’ 해외 사업장으로 가는 것은 이 전무 자신의 뜻이라고 한다. 이 선택에는 여러 복선이 깔렸다고 추측된다. 처음 백의종군이라는 표현과 열악한 여건이 강조된 탓에 ‘유배가 아니냐’라는 해석도 나왔으나 자숙의 의미는 아니라고 보인다. 오히려 미래 잠재력은 크나 현재 수익성은 낮은 브릭스나 아프리카 같은 전략 시장 개척을 통해 삼성과 이 전무는 그의 경영 능력을 선전할 기회로 활용하려는 듯하다. 일본 도요타 가문의 3세인 도요다 아키오 부사장이 전무 시절 중국에서 현장 경험을 쌓은 후 2005년 돌아와 오너 체제를 연 사례가 있다.

이학수 부회장의 설명에서도 단서가 잡힌다. “이재용 전무가 주주·임직원·사회로부터 경영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승계할 경우 회사나 이 전무에게 불행한 일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 전무가 경영 수업 중에 있고 아직 승계 문제에 대해 결정된 바가 없다’고 이 회장이 말했다지만, 현재의 지배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그는 삼성그룹의 ‘3대 회장’이 될 것이다. 뉴욕 타임스도 “회장 일가에 충성스런 경영자와 출자 구조로 (삼성의) 운전대는 결국 이재용씨에게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아버지가 이번 쇄신안에서 아들의 후계구도 가도에 악영향을 줄 만한 어떠한 일도 하지 않은 것도 이런 관측에 무게를 싣는다. 6년 전 이미 실권을 잃은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을 그룹 대표자로 선정한 것도 ‘포스트 이건희’ 과도 체제에서 아들에 부담을 줄 강자의 출현을 막으려는 의도로 해석되기까지 한다. 이번 쇄신안이 이재용을 위한 배려로 읽히는 대목이다.

*전략기획실 해체: 이 회장과 계열사 전문 경영인과 함께 삼성그룹의 오늘을 만든 삼각편대였다는 전략기획실이 없어진다. 이 회장과 삼성은 고작 ‘일부 이견’을 받아들여 그룹 사령탑이자 회장의 손발 격인 참모 조직을 없애기로 했다니 과잉 대응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경제 전문가들이 전략기획실을 해체 혹은 대폭 축소하라고 주장한 것은 그들이 쇄신안 발표에서 주장한 ‘그룹 차원의 전략사업 육성과 성공적인 구조조정 추진’ 때문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이 기능은 현재의 재벌체제가 유지되는 한 앞으로도 필요하다는 점을 ‘삼성 저격수’들조차 인정하는 터. 이들이 문제 삼는 것은 전략기획실의 ‘오너의, 오너에 의한, 오너를 위한’ 친위부대 성격이었다. 실제로 오너만의 이해를 좇아 불법 행위마저 서슴지 않았던 사실이 삼성특검에서 드러난 바 있다.

삼성이 전략기획실 해체에 따른 대안으로 언급한 것은 ‘사장단협의회’다. 이 협의 기구를 실무 지원할 10명 안팎으로 구성된 업무지원실을 둔다. 컨트롤타워 기능이 필요하므로 자연스럽게 사장단협의회 비중이 커지겠지만, 전자?화학?금융 따위 소그룹별로 조직이 분화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기업의 성격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삼성전자는 전자 소그룹의 좌장 구실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룹 공통 사안을 떠맡게 될 공산이 크다. 당장은 가시화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이름만 바뀔 뿐 전략기획실과 유사한 조직이 삼성전자 등 어딘가에 생기리라는 관측도 나온다.

*차명계좌 처리: 특검에서 조세 포탈 문제가 된 차명계좌는 과거 경영권 보호를 위해 명의신탁한 것으로 이번에 이건희 회장 실명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학수 부회장은 차명계좌(약 4조5000억원) 가운데 삼성생명 지분 16.2%(약 2조3000억원)를 뺀 돈을 오너 일가를 위해 쓰지 않고 ‘유익한 일’에 쓸 방도를 찾겠다고 했다. 이 2조2000억원 가운데 조세 포탈과 관련 있는 2조원의 누락된 세금과 과징금을 내고 남은 돈이 대상이다. 삼성 측은 한사코 이 일이 사회 공헌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언론의 관심은 이 돈의 용처에 있지만, 정작 눈여겨봐야 할 것은 2조3000억원에 달하는 삼성생명 지분 16.2%다. 삼성 측은 이 돈이 상속 재산이라 양도소득세 포탈이 없었다고 해명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시효가 지났을 뿐 상속세를 내지 않고 불법으로 불려온 재산인 것은 틀림없다. 이번 쇄신안에서 적어도 도의적 책임은 통감한다는 구절이 나올 법하건만, 단 한마디도 없었다. 게다가 4월24일 경제개혁연대가 삼성생명 지분의 상당 정도가 상속 재산이 아니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나서 파문을 일으킨 마당이다.

*지주회사 전환 및 순환출자 해소 검토, 은행업 불진출: 삼성 측은 지주회사로 전환하려면 20조원이 필요하고 경영권을 위협받을 수 있어 당장 추진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시간을 두고 전환을 검토하겠다는 것이지만, 실행에 옮겨지리라 보는 이는 거의 없다. 삼성생명을 축으로 한 금융사와 삼성전자를 골간으로 한 제조업 계열사를 둘로 나누는 선택을 이건희 일가는 무슨 수를 써도 피하고 싶을 것이다.

이들이 염두에 둔 지배구조 해법은 오히려 이 부회장이 강조한 은행업에 진출하지 않되, ‘금융사의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이미 금융당국이 밝힌 비은행 지주회사에 대해 현행 금융지주회사법상 자회사 및 손자회사의 소유(지배) 및 업무영역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과 연결된다. 어차피 자본시장통합법이 2009년 시행되면 반드시 은행을 가져야 할 유인이 크게 줄어든다. 증권사가 유사 업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은행에 목을 맬 이유가 없다. 정부가 추진하려는 비금융지주회사 방안 가운데 삼성이 원하는 대로 규제를 완화한다면 삼성은 삼성생명을 보험지주회사로 세워 현재 금산분리 원칙과 관련한 법률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지배구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

삼성카드가 가진 에버랜드 지분을 팔아 순환출자 고리를 4~5년 안에 끊겠다는 것을 쇄신안에 슬쩍 끼워넣은 것은 기만에 가깝다. 에버랜드 지분 25.6%를 가진 삼성카드는 금융기관이 비금융 계열사의 주식 5%를 초과해 소유할 수 없도록 제한한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제24조 규정을 위반함에 따라 2006년 국회를 통과한 개정안 부칙에 의해 어차피 5년 내에 팔도록 시정 조처를 받은 상태였다.

 

기자명 장영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coo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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