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지난 4월23일 제기동성당에서 사제단 신부와 김용철 변호사(왼쪽 세 번째)가 기자회견에 앞서 기도하고 있다.


지난해 10월18일 김용철 변호사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 함세웅 신부를 찾았다. 김 변호사는 함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죄 값을 치르겠다고 했다. 함 신부는 “감옥에 갈 각오가 돼 있냐고 물었더니 김 변호사가 명쾌하게 그러겠다고 말했다”라고 말했다.

함 신부는 김 변호사에게 삼성에서 저지른 죄와 양심 고백을 글로 정리하라고 했다. “이 글이 유서가 될 수 있음을….” 김 변호사는 밤마다 엎드려 반성문 수 십장을 썼다. 그러나 반성이 부족하다며 함 신부는 호통을 치면서 꾸짖었다. 김 변호사는 “평생 욕 안 먹고 살았는데 손자까지 있는 이 나이에 매일 꾸지람을 듣는다”라고 말했다. 함 신부는 성서 공부도 하게 했지만, 김 변호사는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함 신부는 삼성을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주십시오.” 그리고 함 신부는 20년 전 박종철군 죽음의 진실을 알렸던 사제들과 주변 사람에게 상의했고, 사제단 실무를 맡은 젊은 신부들에게 알렸다. 김병상 몬시뇰은 “지금까지 호의호식하면서 살다가 이제 와서 뭘 어쩌라는 것이냐”라며 김 변호사를 꾸짖었다. 황상근 신부는 “혼자서 그 큰 진실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김 변호사를 위로했다.

사제단은 삼성 문제로 거의 매일 회의를 열었다. 사회 원로와 유능한 변호사 그리고 삼성 전문가에게 자문했다. 함 신부가 기자에게 김 변호사가 하는 소리가 참인지 거짓인지 알아보라고 이야기한 것은 지난해 10월20일이었다. 함 신부는 기자에게 “불안해하는 김 변호사의 신변을 보호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에게 고백과 반성을 듣는 것은 사흘 밤낮이 걸렸다. 김 변호사는 고백을 통해 차츰 안정을 되찾아갔다.

기자회견 반대한 사제단 신부 적지 않아

김 변호사가 사제단을 찾자 삼성은 발칵 뒤집혔다. 김 변호사 집 앞에 삼성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10월19일에는 이학수 삼성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이 직접 김 변호사의 집을 찾아왔다. 일단 사제단은 김 변호사를 시내 호텔에 머물게 했다. 이틀에 한 번꼴로 호텔을 옮기다가 한 성당 사제관에 있도록 했다.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해 김 변호사 곁에는 반드시 한 사람이 머물게 했다. 사제단은 김 변호사와 가족의 심적인 부담을 덜어주는 데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때마침 김 변호사의 둘째 아들이 군에서 제대해 아버지에게 큰 힘이 되었다.

김 변호사의 양심 고백을 듣고 사제단의 고민도 컸다. 나서지 말자는 사제단 신부가 적지 않았다. 반대라기보다는 염려였다. 세상이 얼마나 우리를 이해해주겠느냐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사제단 아니면 삼성의 오만을 꾸짖을 곳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심을 내린다. 함세웅 신부는 말했다. “김 변호사를 보면서 1987년 5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의 두려움과 떨림이 있었다.” 김영식 신부는 “삼성과 검찰 문제는 지금까지 싸웠던 그 어떤 문제보다 더 어렵고 힘들지만 중요한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결코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삼성과 검찰이 진정으로 참회하지 않는다면, 질 것이 뻔한 싸움이었다. 사제단 대표인 전종훈 신부는 “사제단이 무너지면 이 시대에 기댈 곳이 없어진다”라고 말했다. 김인국 신부는 “우리는 지는 데 익숙하다. 외로운 데도 익숙하다. 하지만 봄이 됐으니 씨 뿌리고 밭을 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민은 깊었고 많은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사제단이 결심하면 행동은 명쾌했다. 10월28일 오후 6시 제기동 성당 사제관에 김 변호사를 비롯해 함세웅·전종훈·김인국·김영식 신부 그리고 사제단 관계자가 모였다. 기자회견을 하기로 최종 결정한 것은 밤 10시30분을 넘긴 시각이었다. 플래카드 준비가 안 되서 기자회견 날짜를 옮길까도 고민했다. 성명서를 쓰고, 각자 일을 나누어 맡았다. 특히 국민에게 이 문제를 어떻게 알릴 것인지 이야기를 많이 했다. 자정이 지나 기자회견 준비가 끝나자, 참석자는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김 변호사가 품은 의로운 뜻을 지켜주시고, 정의와 가치를 기초로 하는 사회가 되도록 힘을 주십시오.”

헤어지는 자리에서 함 신부는 “삼성이 내일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면 어쩌지”라고 물었다. 이날 가장 큰 웃음이 터져나왔다. 전종훈 대표신부는 “삼성이 고백하지 않으면 정말 긴 싸움이 될 텐데…”라고 말했다.
 

ⓒ시사IN 안희태지난해 11월26일 제기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이 삼성의 회개를 위한 미사를 열었다.


기자회견 직전까지도 회견을 막아야 한다는 신부가 있었다. 더구나 사제단에까지 손을 뻗치는 삼성의 힘도 무시할 수 없었다. 김영식 신부는 “삼성이 가진 힘으로 신부들의 약점을 캐고 공격할 수 있다는 것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신자들은 물론 민주화운동 선후배와 심지어 현직 장관까지 나서 삼성의 입이 됐다. 똑같은 말을 했다. “지금까지 지켜온 사제단의 명성에 흙탕물을 튀길 것이다.”

삼성의 반격이 시작되다

 

10월29일 오전 10시 사제단은 ‘삼성그룹과 검찰은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신정아 사건 때 미친 듯 달려들던 언론이 하나같이 입을 닫았다.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언론사도 그리 많지 않았다. 참석한 상당수의 언론조차 기자회견 자체만 보도하거나, 기사를 내지 않았다.

삼성 관련 제보자가 밀려들었다. 결정적인 단서가 될 만한 증인도 있었지만 신부들을 찾아오는 대다수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사람이었다. 11월 초, 한 신부는 제보자를 여섯 명째 만나고 있었다. 기자가 동석했는데 제보자는 터무니없는 말을 했다. 기자가 “증명할 길이 없다. 변호사를 찾아가라”고 말을 끊었다. 이 신부는 “억울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소임이다”라며 기자를 꾸짖었다.

1주일 뒤인 11월5일 오전 10시 사제단은 두 번째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김 변호사는 공식 자리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같은 날 오후 2시 삼성은 25쪽짜리 자료를 내놓고 본격 반격에 나섰다.

‘때는 바야흐로 배신의 계절’이라며 주류 언론이 노골적으로 김 변호사를 깎아내리기 바빴다. “폭로 전문가”(매일경제), “배신자”(조선일보), “제비족이나 꽃뱀과 하등 다를 게 없는 자”(동아일보)…. 몇몇 언론사는 김 변호사의 전부인이 하는 노래방에서 불법 퇴폐 영업을 했다고 보도했다. 언론이 말하는 불법 퇴폐 영업은 맥주를 판 것이었다. 김 변호사가 컨테이너를 가져다 놓은 숙소가 호화 별장으로 둔갑했다.

삼성에 대해 메가톤급 의혹이 제기됐지만 검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찰은 뇌물 검사의 명단을 내놓지 않으면 수사를 못한다고 큰소리를 쳤다. 12일을 시한으로 못 박기도 했다.

11월12일 사제단은 3차 기자회견을 가졌다. 임채진·이귀남·이종백 씨 등이 삼성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뇌물을 받았다고 공개했다. 사제단은 명단 공개만은 피하고 싶었다. 로비 문제는 삼성 사건의 본질을 흐릴 만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 개인의 흠을 들추는 것이 사제의 정신에도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3일 임채진 검찰총장 내정자의 국회 인사청문회 하루 전에 이루어진 공개로 인해, ‘삼성 장학생 검사’ 의혹은 최대 이슈가 됐다. 검찰에 특별수사본부가 꾸려지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수장이 삼성 장학생일지 모른다는 의혹을 밝혀야 하는 검찰의 수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특검은 의미 있는 수사 결과를 내놓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특검밖에 길이 없었다.

사제단은 또 산을 넘어야 했다. 백승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표는 “사제단과 김 변호사는 모든 전투에서 이겨야 하는데, 삼성은 모든 전투에서 한 번만 이기면 되는 불공정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정치권이 꿈쩍도 안 했다.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피하기 일쑤였다. 믿었던 여당 의원조차 앞에서는 알았다고 하고 뒤에서는 꽁무니를 뺐다. 대선에 방해가 된다면서 신부들에게 항의하는 대통합민주신당 의원이 적지 않았다.

이틀에 한 번꼴로 청주 금천동성당과 서울을 오가야 했던 김인국 신부의 고충이 컸다. 김 신부는 “엄청난 부패의 실상을 대면하고 나니 눈이 멀 것 같았다. 우군도 적었다”라고 말했다. 김 신부는 청주 인근의 봉쇄수도원을 찾아 핍진해진 영혼을 다독였다.

다행히 여론은 김 변호사와 사제단 편이었다. 삼성이 오죽했으면 신부들이 나섰겠느냐는 여론이 형성됐다. 오락가락하는 삼성의 말보다 김 변호사를 신뢰한다는 국민이 두 배 이상 많았다. 김 변호사를 알아본 택시기사가 요금을 받지 않고, 사인을 부탁하며 격려하는 시민도 많아졌다. 김 변호사에게 보약을 지어 보내거나 선물을 보내는 사람도 적지 있었다.

정치권은 여론에 밀려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이번에 사제단을 가로막은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11월14일 정치권이 특검법안을 발의하자 노 대통령은 공직부패수사처 법안이 함께 처리되지 않으면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발언은 오히려 특검법의 국회 통과를 도왔다. 특검법은 2007년 11월23일 국회를 통과했다.

삼성 문제가 장기화하자 삼성은 위력을 발휘했다. 특검은 삼성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수사했다. 삼성이 어려울 때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언론이었다. 언론은 계속해서 경제 위기론을 지폈다. 여론을 주도하는 기자들과 김 변호사는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김 변호사는 기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잘못된 기사는 따지고, 의도가 있는 기자의 질문에는 “공부 좀 하라”며 면박을 주었다. 지난 3월 중앙일보는 김 변호사가 삼성특검에 출두하며 기자에게 욕설했다는 내용을 자세히 보도하기도 했다.

언론은 삼성의 최대 우군

여론이 삼성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김 변호사가 죄인이라면서 거만해 보이고, 언론에 너무 나선다는 지적이 나왔다. 신부들은 대비책을 세워야 했다. 신부들은 김 변호사에게 개별 언론 접촉을 삼가라고 했다. 그리고 김 변호사 휴대전화 두 개를 압수했다. 하지만 며칠 뒤 김 변호사가 다른 휴대전화를 사용하자 신부들은 곧바로 전화기를 돌려주었다.

올해 초 신부들은 김 변호사를 김인국 신부가 있는 청주 금천동성당에 보냈다가 봉쇄수도원에 보내기로 뜻을 모았다. 언론과 거리를 두고 김 변호사를 쉬게 해주자는 의미도 컸다. 김 변호사는 따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특검에 대비해야 한다며 김 변호사는 청주에 내려가지 않았다. 신부들은 김 변호사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지난 4월22일 삼성은 쇄신안을 내놓았다. 사제단이 삼성에 바란 것은 이 회장의 퇴진이나 전략기획실 해체가 아니었다. 진심 어린 고백이었다. 함세웅 신부는 “삼성이 해야 할 일은 고백이다. 모든 고백은 용서받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전종훈 대표신부는 “자백이 가장 아름다운 정화의 길이다”라고 말했다. 김인국 신부는 “삼성 광고에 나오는 아이처럼 삼성이 고백한다면 정화될 것이고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4월23일 사제단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분위기는 무거웠다. 기자회견장 밖에는 사제단을 비난하는 시위가 열렸다. 함세웅 신부는 “슬프고 아프다”라고 말했다. 사제단은 4월24일부터 26일까지 단식기도를 했다. 김인국 신부는 “단식기도는 우리 스스로 영혼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6개월  동안 신부들이 삼성 문제에 집중하면서 생긴 영혼의 상처가 크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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