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는 이명박 대통령이 자주 꺼내는 말이지만, 정작 이번 정부 들어 ‘법치주의’라는 말의 의미가 묘하게 달라졌다. 교과서에 나오는 법치주의란 ‘인치’나 ‘절대 권력’ 따위의 반대말이다. 국가권력의 행사 또한 법에 의해 정해진 방식으로만 가능하다는, 권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원리가 법치주의다.

하지만 법치주의는 MB 정부 들어 극적인 의미 변화를 겪는다. 박경신 교수(고려대·법학)는 “법이 국가권력 위에 있다는 것이 원래 법치주의의 뜻이라면, MB 정부의 법치주의는 권력이 법을 통치의 도구 삼아 휘두르는 것이다”라고 짚었다. ‘국민더러 법 잘 지키라고 강조하는 게 법치주의’라는 식으로 의미가 전도됐다는 얘기다. 사문화된 법 조항을 들고 나와 처벌하거나, 법 조항을 그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창의적인’ 방식으로 해석해서 적용하는 ‘새로운 법치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청와대 제공이명박 대통령(위)은 ‘법치주의’를 자주 강조하지만, 이번 정부 들어 그 의미가 달라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보법 7조, 또 사고 쳤다
:경찰이 자본주의연구회 최 아무개씨의 구속영장을 청구할 때 적용한 혐의는 국보법 7조5항 이적 표현물 소지·반포다. 최씨가 체포된 뒤 조현오 경찰청장을 항의 방문했던 백원우 민주당 의원은 “17대 국회 당시 여야가 없애자고 사실상 의견 일치를 봤던 조항이 국보법 7조다. 이런 수상한 공안 사건에 7조를 꺼내든 것부터가 문제다”라고 말했다.

17대 국회 당시 열린우리당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에 앞장섰던 최재천 전 의원은 그때 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전면 폐지가 물 건너간 분위기가 되자 중요한 독소 조항인 7조(찬양·고무 등)라도 개정하자는 논의가 나왔다. 그런데 오히려 진보적 시민단체에서 부분 개정에 반대가 많았다. 국보법 자체가 사문화되어가고 있는데 어설프게 건드려서 살아 있는 법으로 만들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국보법 논의는 표류하다 ‘현상 유지’ 결론이 내려져 오늘에 이른다. 건드리지 않고 놔두면 말라죽을 것이라 낙관했던, 사실상 사문화 단계라던 법이 되살아나 끈질기게 발목을 잡는 것이다. 최 전 의원은 “당시 열린우리당 중진급에서는 ‘어차피 우리가 수사기관을 오버 못하게 관리하면 되는 문제 아니냐’는 정서가 있었다. 계속 정권 잡을 줄 알았던 거지”라고 아쉬워했다.

‘미네르바’ 잡은 전기통신기본법, 47년 ‘잠든 법’ 깨워 휘둘렀다
:전기통신기본법 47조1항은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하여 공연히 허위의 통신을 한 자’를 처벌한다고 되어 있다. MB 정부에서 이 법 조항을 근거로 기소당한 사례로는 한국 경제 분석과 정책 비판 글을 온라인에 연재해 화제가 된 ‘미네르바’ 박대성씨, 촛불집회 시위 참가 여성 사망설을 퍼뜨린 누리꾼, 천안함 침몰 관련 정부 공식 입장과 다른 의견을 낸 시민, 연평도 포격 당시 유언비어를 유포한 시민 등이 있다.

그런데 이 47조1항이 현행법의 전신인 전기통신법에 등장한 것은 50년 전인 1961년.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제정 이후 47년간 이 ‘허위통신죄’가 적용된 사례가 단 한 건도 없었다. 2008년에야 처음으로 검찰이 이 조항을 적용하기 시작했다”라고 밝혔다. 반세기 가까이 사문화됐던 조항을 끄집어내 촛불집회와 ‘미네르바’같이 정치적으로 극히 민감한 사건에만 적용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지난해 12월28일 헌법재판소가 이 조항을 위헌으로 판결함에 따라 ‘죽은 법’을 되살려 민감한 사건에 잇따라 적용하는 ‘MB식 법치’에 일단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헌재의 위헌 판결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대체 입법을 준비하겠다고 밝혀 논란은 이어질 전망이다.

‘창의적 법 적용’으로 못 잡을 상대도 잡는다?
: 죽은 법을 부활시키는 것만큼이나 애용되는 방식이다. 가장 대표적 사례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 국가가 건 명예훼손 소송이었다. 국가정보원의 시민단체 사찰 의혹을 제기한 박 상임이사에게 국가는 국가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당장 ‘국가가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나’라는 논란이 크게 일었다. 김종철 교수(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는 이 소송을 “민사소송을 이용해 정치사회적 공익 활동을 탄압하려는 일종의 ‘전략적 봉쇄 소송’”이라고 규정하면서 “국가기관 비판을 형사적 수단이 아닌 민사소송적 수단으로 해소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회통제 기법을 구축하려는 시도다”라고 비판했다. 1심 재판부는 박원순 상임이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MBC 〈PD수첩〉 광우병 편에 대해 정운천 당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을 두고도 비슷한 비판이 나왔다. 박경신 교수(고려대)는 “〈PD수첩〉은 미국산 쇠고기의 문제를 지적했는데, 엉뚱하게 장관이 명예훼손 소송을 걸었다. 자장면이 맛없다고 했더니 중국집 주인은 가만히 있는데, 다른 손님이 ‘나는 맛있게 먹었다’며 명예훼손을 제기한 꼴이다”라고 말했다. 1·2심 재판부는 모두 〈PD수첩〉에 무죄를 선고했다.

ⓒ시사IN 포토정부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썼던 미네르바 박대성씨(위)는 사문화되었던 법에 의해 기소되었다.
이 외에도 ‘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언소주)의 소비자 불매운동을 두고 업무방해죄, 강요죄, 공갈죄를 적용한 기소와 처벌 역시 무리한 법 적용이라는 평가가 일각에서 나온다. 

법치주의, 어디까지 치사해질 수 있나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류제성 사무차장은 “일반 교통 방해는 이번 정부 들어 ‘유행하는 법’이다”라고 말했다. 촛불집회 등 대규모 집회·시위가 있을 때 집시법 위반보다 적용하기 편리한 일반 교통 방해를 적용한 ‘괴롭히기·귀찮게 하기’가 부쩍 늘었다는 것이 민변의 판단이다.

첫 체포 당시 대규모 공안·조직 사건으로 거창하게 출발했던 이번 자본주의연구회 사건에서도, 정작 구속영장 청구서에는 이적 단체 구성과 같은 ‘살벌한’ 혐의는 빠지고 일반 교통 방해가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는 “변호사로 공안 사건을 많이 다뤄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라고 말했다.

이 외에 대표적 친노 의원인 백원우 민주당 의원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장례 방해죄를 적용해 기소한 사례 역시 ‘뒤끝 법치’의 사례로 흔히 거론된다. 검찰의 약식기소에 맞서 정식 재판을 청구한 백 의원은 2심에서 무죄를 받은 상태다.

검찰과 경찰에서는 “법대로 하는 것뿐이다. 있는 법을 적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직무유기 아닌가”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박경신 교수는 “그렇다면 왜 이번 정부 이전에는 그런 법 적용이 없었나. 결국 법을 헌법 정신에 맞게 해석하느냐가 핵심이다. 검찰과 경찰이 처벌 의지를 먼저 품고 나서 구성요건만 맞으면 무조건 적용하는 것은 헌법 정신에 맞지 않는다”라고 반박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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