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 있는 세계적인 컴퓨터 기업 IBM 연구시설 ‘빌딩 13’에서 일하던 화학자 게리 애덤스는 IBM 본사 의료진에게 편지를 썼다. 동료 10명 가운데 8명에게 뇌종양·림프종 등 집단적으로 암이 발병했다는 내용이었다. 게리 애덤스는 암에 걸린 동료 이름과 이들이 다룬 화학물질까지 적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경고를 보냈다. IBM 제품이 파란색이라 홍보 전략으로 내세운 ‘빅 블루 패밀리’를 확고하게 믿은 그는, 루이스 거스너 IBM 최고 경영자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회사의 답변은 “문제없다”였다.

20여년 뒤 게리 애덤스의 경고를 무시한 회사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IBM에 근무하다 각종 암에 걸린 200여 명과 망막모세포종 등 각종 선천적인 장애를 겪은 노동자 자녀 50여 명이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 IBM은 집단소송에 직면했다. 특히 2003년 비호지킨 림프종에 걸린 제임스 무어(2004년 10월 사망)와 유방암에 걸린 앨리다 에르난데스는 회사가 화학물질 노출에 따른 암 발병을 알고도 고의로 이를 은폐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을 대리한 이가 아만다 허즈 변호사이다.

ⓒ시사IN 조남진10월29일 반도체의 날을 맞아 반올림 회원들이 삼성반도체의 직업병 인정을 촉구했다.

〈시사IN〉은 허즈 변호사로부터 ‘또 하나의 가족’ 삼성보다 먼저 백혈병 등 희귀암 질환을 겪은 ‘빅 블루 패밀리’ IBM의 사례를 들어봤다. 인터뷰 진행은 공유정옥 산업전문의가 맡았다. 그녀는 삼성 백혈병 문제를 추적한 공로로 11월9일 미국 공중보건학회(APHA)가 주는 ‘2010 산업안전보건상’을 수상했다. 인터뷰는 11월11일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 있는 허즈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했고, 부족한 내용은 이메일로 보완했다. 삼성 백혈병 문제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는 아만다 허즈 변호사는 “반도체 산업재해는 복잡하고 서로 연관된 이슈들이다”라며 입을 뗐다. 


한국에서도 최근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들의 백혈병 발병으로 논란이 일고 있다. IBM에서 골수종이나 백혈병 등이 발병했다고 처음 알려진 시기는 언제인가?
미국에서 처음 IBM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암에 걸렸다고 알려진 것은 1985년 IBM 새너제이 연구소에서 일한 게리 애덤스가 동료들의 림프종이나 뇌종양과 관련해 회사에 문제 제기를 하면서다.

그 전에는 이 사안이 전혀 공론화되지 않았나?
엄밀하게 말하면 게리 애덤스의 경고가 처음이 아니었다. IBM이 1969년부터 노동자 사망 원인을 종합해 기록한 ‘기업 사망자료’는 게리 애덤스의 동료들에게 발생한 암과 암 사망자가 처음이 아님을 보여준다. 나는 이 자료가 존재한다는 것을 1999년 처음 알았다. IBM은 2004년 법원이 공개를 결정할 때까지 이 자료의 존재 자체를 숨겨왔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1985년 게리 애덤스 동료들에게 발생한 암이 IBM 작업 환경과는 무관하고, 독특하면서도 우연히 집단 발병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허즈 변호사 말대로 IBM은 1969년부터 사망 보험금을 수령한 이들의 내용을 다룬 ‘기업 사망자료’를 축적했다. 1969~2001년 사이 IBM 종사자 가운데 사망한 3만1961명의 인적 사항이 담긴 이 자료는 그 존재가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소송 과정에서 법원의 결정을 통해 변호인단은 이 자료를 확보했다. IBM은 이 자료의 존재를 부인했지만 법원의 결정으로 공개된 것이다. 예방의학자 클랩 박사(보스턴 대학)가 이 자료를 분석한 결과, IBM 노동자들의 암 사망률은 미국인 평균보다 높았다. 일반인 집단과 비교해 뇌암은 4배, 다발성골수종은 6배, 유방암은 2배에 달했다. 물론 사무직 노동자나 임원진에서는 발병 비율이 높지 않았다.

1985년 새너제이 사례가 공론화된 뒤 IBM의 대응은 어떠했는가?
IBM은 게리 애덤스에게 “문제없다. 노동자들의 암 발병은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라고 확언했다. 

게리 애덤스의 편지를 받은 루이스 거스너 회장은 본사 의료진을 통해 애덤스에게 이렇게 답변했다. “유감스럽게도 암은 미국 성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가장 흔한 병 중 하나이다. 근무 환경과는 무관하다.” 2003년 12월10일 IBM 백혈병 문제를 다룬, 미국 CBS의 시사 고발 프로그램 〈60분〉의 ‘빅 블루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었을까?’에 출연한 게리 애덤스는 “아주 실망했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반올림 제공공유정옥씨(왼쪽)는 고려대 의학과를 졸업했고, 산업의학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삼성 백혈병 활동으로 산업안전보건상을 탔다.아만다 허즈(오른쪽)는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 있는 재해전문 법률 사무소 ‘Alexander Hawes, LLP’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독성 화학물질 노출에 따른 산재 소송을 개척한 선구자이다.

제임스 무어와 앨리다 에르난데스의 소송을 맡은 계기는?

암을 앓고 있는 IBM 노동자들, 그리고 선천적 기형아로 태어난 IBM 노동자 자녀들의 소송을 대리한 뉴욕 변호사들이 내게 지원을 요청했다. 새너제이나 실리콘밸리 반도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소송을 내가 주로 맡으면서 반도체 분야의 산업재해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제임스 무어는 27년간 IBM에서 일하다 1993년 퇴사했고 2년 뒤 림프종 판정을 받았다. 앨리다 에르난데스는 14년 동안 일하다 1991년 퇴직했고, 역시 2년 뒤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둘 다 오랜 기간 IBM에서 일한 성실한 노동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재직 당시 각종 화학물질을 쓰는 자신들의 작업이 얼마나 유해한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만일 위험하다면 회사가 미리 말해주었을 것이고, 또 위험에 처했다면 IBM이 뭔가 보호 조치를 충분히 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회사는 노동자들이 작업 환경을 개선해달라거나 건강상 불만을 제기하면 비난만 하기 일쑤였다. 결국 두 사람은 암 진단을 받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그들의 발병과 작업 환경의 상관관계가 논란이 되고, 그들의 건강 문제가 발생하는 동안에도 IBM이 아무도 모르게 3만명에 이르는 미국 전체 IBM 노동자들의 사망 원인을 축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아만다 허즈 변호사가 대리한 소송은 IBM을 상대로 제기된 일반적인 손해배상 소송과 달랐다. 회사가 불법적으로 노동자들을 독성 화학물질에 노출시켰고, 유해한 작업 환경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긴 점을 고소한 것이다. 승산이 높지 않은 소송이었다.

반도체 관련 소송은 워낙 전문적이라 입증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회사를 상대로 소송하게 된 계기와 준비 과정은?
먼저 우리가 암을 앓고 있는 노동자 수백명과 50명 이상 되는 선천적 기형아 등 300건이 넘는 법률 소송을 진행해왔다는 점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이 가운데 단 두 건을 뽑아 회사가 고의적으로 은폐했다며 소송을 한 것이다. 은폐 건 이외에 산재보상 소송은 법정 밖에서 해결되기도 했다. 우리는 IBM이 ‘기업 사망자료’ 등을 통해 이미 작업 환경의 유해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음에도 고의적으로 이를 은폐했기에 제임스 무어와 앨리다 에르난데스의 암이 치료 시점을 놓치고 더 악화되었다는 점을 부각했다. 

소송 당시 주요 쟁점은 무엇이었나? IBM의 해명도 궁금하다.
물론 IBM은 게리 애덤스가 처음 문제를 제기한 1985년에나 소송을 낸 2003년에나 똑같이 암 발병과 작업 환경은 관련이 없다고 했다. 작업 환경의 유해성을 알고도 이를 고의로 숨길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IBM의 주장을 근거로 두 사람의 질병이 독성 화학물질 때문에 발병했다는 점뿐 아니라, IBM 어느 관리자가 은폐를 주도했는지 특정하라고 변호인단에 요구했다. 게다가 당시 재판을 맡은 로버트 베인스 판사는 입증할 책임을 우리에게 요구하면서 클랩 박사가 분석한 ‘기업 사망자료’ 분석 결과를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판사는 ‘기업 사망자료’가 암 사망 패턴과 화학물질 노출의 상관관계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고들에게 증거가 되기보다는 IBM에 더 해로울 수 있다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를 증거에서 배제했다. 우리는 새너제이 공장에서 일한 여성 노동자들의 유방암 사망 비율 증가 사례에서처럼 ‘기업 사망자료’가 특별한 암 발병과 작업환경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여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IBM이 ‘기업 사망자료’를 숨겨왔다는 사실 자체가 기만과 은폐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유력한 증거였던 ‘기업 사망자료’를 판사가 배제하면서, 우리는 사실상 양손을 뒤로 묶인 채 싸운 것이나 다름없다. 배심원은 독성 화학물질 노출을 인정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암이 작업 환경과 관련 있는지에 대한 답을 내리지 않은 채 평결을 내렸다. 

미국의 산업재해보험 제도가 한국과 다르지만, IBM 피해자들이 산재보상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과정과 절차를 거쳤나?
나는 피해 노동자를 대리해 회사와 보험사를 상대로 산재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보상 과정에서 기밀 유지 각서를 써서 금액이나 조건 등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다. 이해해달라. 

IBM 노동자의 암 발병을 처음 알린 게리 애덤스(위). 회사는 그에게 “암은 가장 흔한 질병의 하나”로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보냈다(아래).
재판부는 IBM의 고의적인 은폐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만다 허즈가 대리한 소송에서 회사가 승소한 것이다. 그러나 IBM은 소송에서는 이겼지만 ‘승자의 저주’를 겪어야 했다. IBM 은폐 의혹이 불거지면서 미국 CBS의 시사 고발 프로그램 〈60분〉이 ‘빅 블루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었을까’를 방송했다. 소송 과정에서 줄곧 노동자들이 일하는 클린룸의 안전성을 주장하던 IBM은 대부분의 작업을 자동화했고, 유해한 작업 절차는 해외로 이전하는 등 아웃소싱을 했다. 염화메틸렌, 글리콜 에텔 등 각종 화학물질의 사용도 금지했다. 게리 애덤스가 근무하던 빌딩 13도 폐쇄했다. 암을 앓는 250여 명에게는 산재보험금이 지급됐다. 미국 산업재해보험 제도는 주별로 다르다. 주정부 산재보험 기구에 가입하거나 민영 보험회사에 가입해도 되고 자가 보험을 운영해도 된다. IBM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노동자들 대부분에 대해 이들 산재보험을 통해 보상했다고 허즈 변호사는 말했다.

삼성전자는 시민단체들이 관련 자료 공개를 요구했지만 매번 ‘기업 비밀’ 또는 ‘영업 비밀’이라며 관련 자료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1986년 미국 연방법은 노동자들이 노출될 수 있는 화학물질에 대해 ‘노동자의 알권리’를 부여했다. 또 기업들이 지역 사회에 배출하고 있는 화학물질을 공개하는 ‘지역사회 알권리 법안’도 통과됐다. 이런 법에도 한계도 있지만, 회사가 ‘영업 비밀’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노동자의 알권리가 우선한다는 점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IBM 노동자뿐 아니라 다른 반도체 노동자들을 법적으로 대리할 때도 나는 이 점을 강조한다. 물론 알권리 법에 따라 관련 자료를 회사에 요청해도 회사는 경쟁자들에게 영업 비밀이 새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이에 저항하곤 한다.

IBM에 다니다 암이 발병한 ‘생존자’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나?
우리가 보상을 받으려고 노력한, 암에 걸린 IBM 노동자 대부분은 숨졌다. 가장 치명적인 혈액암과 뇌암을 대부분 앓았기 때문이다. 물론 생존자도 남아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소송을 대리한 앨리다 에르난데스는 지금 여든 살이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IBM 노동자들이 낳은 선천성 기형아들도 지금은 어른이 되었다. 모든 부모가 바라듯이 성년이 된 2세들 상당수는 부모로부터 독립해 일반인처럼 행복하게 살고 있다. 모두가 노력한 덕분이다. 하지만 모든 2세가 행복하게 사는 건 아니다.

삼성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안전한 직업과 건강한 가족. 이것은 근본적이면서도 성취해야 할 인권의 문제이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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