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민간 외교사절단 ‘반크(VANK; Voluntary Agency Network of Korea)’는 1999년에 개인 펜팔 사이트로 출발했다. 처음 사이트가 출범했을 때의 예상과 달리 이 사이트는 청소년 회원들의 열정적 참여로 성장했다. 한국에 대해 잘못 기술한 외국 교과서나 홈페이지 관리자에게 이메일을 보내 오류를 수정하게 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반크는 가수 김장훈씨가 후원하는 비정부기구(NGO)로도 유명하다.

반크 설립자 박기태 단장은 대학 4학년 때 수업 과제로 이 사이트를 만들었다. 11월18일 ‘행복한 진로학교’ 강단에 선 그는 자신 또한 “대기업만 바라보며 토익에 매달렸던 학생이었다”라며, 그랬던 자신이 한 사이트를 통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두 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자기 이야기가 청소년들로 하여금 진로와 삶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육성을 정리했다.

반크를 시작한 지 10년이 조금 넘었다. 반크 사이트를 처음 만들었을 때 나는 일본어를 전공하는 야간대학 4학년이었다. 우연히 들은 한 교양과목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 진로학교이니만큼 어떻게 내가 반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부터 얘기하겠다.

ⓒ시사IN 백승기박기태 ‘반크’ 단장(위)은 펜팔 사이트를 한국에서 가장 활발한 사이버 민간 외교사절단으로 만들었다.
10여 년 동안 반크를 하면서 출판사·방송사 등 직장을 다섯 번 옮겼다. 흔히 말하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는 물결에 나도 휩쓸렸다. 2001년에는 내가 원하던 직장(방송사)에 취업했다. 반크를 운영 중이어서 직장 상사가 없을 때 반크 업무를 했다. 어느 날 여자 후배가 말했다. “선배는 왜 상사들이 자리를 비우면 업무 시간에 다른 일을 해요?” 그 말을 듣고 1주일 동안 멍했다. 나는 먹고살기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했고, 일을 하면서도 딴전 부리는 것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좋아서 하는 ‘다른 일’이라면, 아예 전업으로 해보자고 결심했다. 물론 집에서는 반대했다. 결혼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더더욱. 하지만 설득했다.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반크에 매진했다.

대학 4학년 무렵. 외환위기 때문에 온통 난리였다. 바로 앞 학번(92학번) 선배들이 취업에서 전멸했다. 그때 내가 다니던 야간대학은 남들이 말하는 명문대학과 거리가 멀었다. 낮에는 어느 빌딩 관리실에서 일했다. 35만원을 받았고, 그 돈으로 학교를 다녔다. 그런 상황에서 취업이 어렵다고 하니 절망감이 들었다. 나는 대학 졸업 이후가 두려웠다.

토익 공부가 유일한 안식처였다. 빌딩에서 청소를 하면서도 죽어라 토익 공부를 했다. 매달 토익 점수가 10점씩 오르면 그게 내 인생의 행복 그래프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는 신데렐라를 꿈꾸었다. 빌딩을 성실히 관리하면, 이 빌딩에 있는 한 회사 CEO가 그 성실성을 높이 사서 취업시켜주지 않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왜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명문대를 다녔으면 달랐을까. 다른 사람 탓만 하며 신데렐라를 꿈꾸었다. 토익 점수 그래프를 보면서(웃음).

그때 교양 수업 가운데 인터넷 활용 과목이 있었다. 그 수업이 삶을 바꾸었다. 한 학기 동안 홈페이지를 만드는 게 과제였다. 어떤 홈페이지를 만들까 궁리하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빌딩 청소하며 ‘신데렐라’ 꿈꾸던 시절

외국의 동아시아학과나 한국학과를 찾았다. 그리고 전자우편을 썼다. ‘한국과 한국어에 관한 정보가 없으면 연락을 달라. 내가 검색해 정보를 드리겠다. 그 학과 학생 중에 한국 친구를 사귀고 싶은 학생이 있으면 알려달라. 1대1로 소개하겠다.’ 이런 편지를 전 세계 대학 1000여 군데에 보냈다. 그랬더니 답신이 100통가량 왔다. 외국의 어느 국립대 한국어과 교수는 학과 학생들이 온라인 자매결연을 맺고 싶어한다면서 대학생 100여 명의 프로필을 보내왔다. 외국 국립대 교수가 평범한 야간 대학생에게 말이다.

내 주변 친구들이 환호했다. 나를 통해 외국 학생과 교류할 수 있었으니까. 그때만 해도 나는 이 사이트가 내 취업에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만 했다. 금세 히트하고 내가 대학생 스타가 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방문객 숫자가 순식간에 늘지 않았다.

안 되나보다 하고 있는데, 갑자기 수천명이 몰려왔다. 대부분 청소년이었다. ‘뭔 일이래?’ 하고 있는데, 알고 보니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영어 교사가 ‘해외 펜팔을 통해 자기 고장과 한국을 알려라’ 하는 수행평가 숙제를 내준 것이었다. 그때 포털에서 ‘해외 펜팔’이라고 입력하면 반크가 맨 앞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청소년이 몰려온 것이다. 나는 졸지에 수행평가 숙제 ‘마담뚜’처럼 되어버렸다. 어떡하나 싶었다. 내가 알고 있는 외국 학생은 주로 대학생인데…. 연결을 안 해주면 서비스가 엉망이라고 여기고 항의할 텐데. 그래서 나라별로 펜팔 사이트에 가서 프로필을 긁어왔다. 외국 펜팔과 편지를 주고받게 되니 아이들이 매우 신기해했다.

일이 또 늘었다. 아이들이 ‘영어가 서투르니 번역 서비스를 해달라’고 영어 도움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토익 공부를 한 정도면 할 수 있는 단순한 영어였다. 주변 대학생들과 함께 영어 번역 서비스를 했다. 청소년이 펜팔을 신청하고 한글로 편지를 쓰면 대학생들이 번역해주는 소박한 사이트가 반크였다. 반크는 청소년들에게 인기 있는 펜팔 사이트로 등장했다. 이때부터 나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토익 점수에 목매던 내가 당장 나의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로 관심이 바뀌었다. 나의 작은 노력으로 아이들이 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다니 기뻤다. 나는 빌딩 청소를 하면서 어느 CEO가 내 모습을 봐주기를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되었다. 수많은 아이들이 교류하는 모습을 보면서 60억의 눈으로 한국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알아야

아이들은 해외 펜팔에게 한글과 한국을 알리고 싶어했다. 마치 한글 홍보대사처럼. 그래서 게시판 카테고리를 나누고, 자신들이 홍보한 것을 올려 다른 학생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사이버 외교관처럼. 수능 영어만 고민하던 친구들이 한국 홍보를 위해 영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사이트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제보가 쏟아졌다. 외국 교과서·홈페이지 등에 독도와 동해 표기가 다케시마와 일본해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험문제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 이름을 일본해라고 쓰지 않고 동해라고 썼더니 오답으로 처리되었다는 사연도 올라왔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유학 간 여학생이 이에 항의했더니 교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맞겠냐, 교과서가 맞겠냐?” 그 여학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 교과서를 나더러 바꿔달라고 했다. 작은 펜팔 사이트 운영자에게 말이다.

토익 공부를 하다보면 제품의 하자를 지적하고 이를 시정해달라는 내용의 예문이 많이 나온다. 그 예문을 참고해가며 관련 자료를 첨부해 편지를 썼다. 답변이 왔다. 그 답변이 내 심장에 박혀 있다. “관행적으로 일본의 표기를 써왔다. 여러 학자들과 회의를 해보니 우리 잘못이었다. 시정하겠다”라고. 그 답변을 사이트에 올렸더니, 펜팔들이 각국의 세계사 교과서를 누가 썼는지 정보를 올렸다. 다시 1000여 교과서 회사에 이메일을 보냈다. 청소년들이 해외 펜팔을 통해 교과서 내용을 바꾸게 되었다. 일개 펜팔 사이트가 해외 학자와 회사를 설득한 것이다. 그러면서 반크가 주목되기 시작했다. 방송사가 우리 활동을 공익광고로 만들어 방송할 정도였다. 올해 나온 외교부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지도 사이트 중에서 10년 전에 동해를 일본해라고 표기한 것이 97%를 차지했는데 올해는 동해라고 표기한 게 23% 정도 된다.

나는 진로학교의 모범 샘플이 아니다. 질질 끌려다니다 뒷부분에 와서 수습을 한 경우다. 일본해라는 표기가 97%이고, 동해라고 표기된 게 3%였던 것처럼 내 인생에서 97%는 취업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이었다. 그것에 치여 살았다. 어떤 우연한 기회에 나는 내 안에 있던 3%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키워왔다. 내 작은 실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을 경험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스펙보다 중요한 것은 나 스스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를 아는 일이다.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에 갇혀 취업문만 통과하면 그 사람은 행복한가? 대기업 문만 쳐다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와 다른 미래를 꿈꾸는 데 여러분도 함께하기를 소망한다.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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