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이 창간과 더불어 ‘신뢰’라는 화두를 던진 지 3년이 지났다. 성장 제일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2007년 창간 당시에는 생뚱맞게 들리던 신뢰라는 말이 이제 어느 유력 차기 주자의 입버릇이자, 대통령이 제시한 ‘공정한 사회’와도 맥이 닿는 시대의 화두로 격이 올랐다.

신뢰는 ‘착하게 살자’는 도덕 교과서 말씀만은 아니다. 신뢰가 있는 사회에서는 감시와 통제 비용이 줄고 유대가 강화되어 사회적 생산성이 오른다. 그래서 신뢰는 중요한 ‘사회적 자본’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신뢰 수준이 높은 사회만이 결국 번영을 지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가 반환점을 돌았다. ‘묻지 마 성장주의’ 전략이 한계에 부딪힌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해졌다. 신뢰가 화두로 떠오른 시대. 〈시사IN〉이 창간 3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신뢰도를 측정해봤다.

임기만큼이나 길었던 ‘박정희 향수의 시대’가 끝나려는 것일까. ‘전·현직 대통령 중 가장 신뢰하는 인물’을 묻는 질문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목한 응답이 처음으로 30%대로 내려앉았다. 진보·개혁 진영이 배출한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신뢰도를 합치면 박 전 대통령의 수치를 넘어선다. 이 역시 세 차례 〈시사IN〉 조사 중 처음이다.

이번 조사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는 34.2%로 나타났다. 2007년 52.7%, 2009년 41.8%와 비교하면 낙폭이 두드러진다. 반면 현직 시절이던 2007년 불과 6.6%만이 가장 신뢰한다고 꼽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난해 서거 석 달 뒤에 한 조사에서 28.3%를 얻은 데 이어, 올해도 25.3%를 기록했다. 급작스러운 서거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던 지난해와 견줘도 크게 떨어지지 않은 수치다. 

MB 등장 이후, 박정희 향수 흐릿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해 조사 시점까지 투병 중이다가 조사 직후 서거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생존 시보다 서거 후 더 너그러워지는 경향이 있다. 이번 조사 결과 역시 그랬다. 지난해 조사에서 12.3%가 가장 신뢰한다고 꼽았던 김 전 대통령은 이번에는 18.2%를 얻었다. 현직인 이명박 대통령이 6.4%로 뒤를 이었다. 흔히 한데 묶여 얘기되는 김·노 두 전직 대통령의 신뢰도를 합치면 43.5%. 보수 진영의 지지를 받는 박 전 대통령과 이 대통령을 합친 40.6%보다도 높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박 전 대통령 신뢰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고학력·서울·30대 층의 이탈이 두드러진다. 대학 재학 이상 층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는 2007년 42.9%→2009년 30.1%→2010년 22.6%로, 서울에서 50%→42.5%→24.8%로, 30대에서 48.8%→22.6%→13.8%로 모두 극적으로 폭락했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를 거치며 ‘좌 클릭’한 것으로 분석되는 층과 거의 겹친다. 사회 전반적으로 진보 성향이 강해지는 흐름이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기억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분석이다. 이와 연관된 결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30대 연령층, 400만~500만원·500만원 이상 소득층, 화이트칼라 직종, 대학 재학 이상 학력 층에서 박 전 대통령을 제치고 신뢰도 1위로 올라섰다. 한때 박정희 시대를 ‘경제성장 신화’로 소비했던 청년층의 극적인 변화는 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명박 대통령의 등장이 ‘박정희 향수’를 상당 부분 소진시켰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디어리서치 하동균 수석연구원은 “이 대통령이 신뢰도 지분을 직접 가져간 것은 별로 없지만, 이 대통령의 집권 이후 박정희식 성장주의에 대한 향수가 흐려졌다. 진보층은 향수를 거둬들였고 보수층은 갈증을 풀었다”라고 분석했다. 보수 정권 탄생 이후 보수층의 결집력 또한 느슨해지는 데 반해, 진보·개혁 진영에서 김·노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짙어지면서 ‘박정희 독주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의미다.

위에 언급한 네 명의 전·현직 대통령을 제외하면 신뢰도는 다들 고만고만했다. 전두환(2.5%), 이승만(2.2%), 김영삼(1%), 최규하(0.9%), 노태우(0.5%), 윤보선(0.3%) 전 대통령 순서로 나타났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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