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낳기만 하면 알아서 큰다”라는 말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맞벌이 가정이 늘면서 이제 부모가 아닌 조부모가 육아의 주체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여성노동자회와 곽정숙 의원(민주노동당)이 올해 3~5월에 실시한 실태조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만 0~2세 자녀의 육아 과정에서 조부모(친·인척 포함)의 도움이 ‘매우 필요하다’라는 응답이 미취업여성 가구는 22.4%, 취업여성 가구는 51.6%를 차지했다.

조부모 세대는 손자·손녀 양육이 달갑지만은 않은 눈치다. 가장 큰 이유는 육아 부담에서 벗어나 노후 생활을 즐기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다. 박영순씨(62)는 10년 전 외손녀를 맡아달라는 딸의 부탁을 거절했다. 박씨는 “15년간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고 이제는 내 인생을 여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에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아예 처음부터 자녀에게 손자·손녀를 보지 않겠다고 확실히 선을 긋는 추세다. 특히 자기 일이 있는 조부모들이 손자·손녀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는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강남보건소 제공
자녀 세대와의 ‘육아관’ 차이 탓에 손자·손녀 양육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김미영 서울가정문제상담소 소장은 “젊은 엄마들은 책과 인터넷에서 배운 육아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려 한다. 반면 할머니들은 이를 지나친 간섭으로 여겨 ‘실컷 고생하고 좋은 소리 못 듣는다’는 피해의식을 갖게 된다. 실제로 이러한 갈등 때문에 시어머니가 육아를 거부하고, 부부가 이혼 직전까지 갈 뻔한 상담 사례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1인 가구 노인’은 손자·손녀 양육이 더 큰 부담이다. 문 아무개씨(60)는 “딸이 늦둥이를 임신했을 때 내가 돌봐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막상 손자를 맡으려니 생활비가 문제였다. 딸이 주는 양육비로는 내 생활을 책임질 수가 없었다”라고 털어놓았다. 채윤희씨(76)는 “손자를 봐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친구들은 대부분 모아둔 재산이 있는 경우다. 손자를 봐주지 않는 대신 베이비시터 월급을 대주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육아에 적극 참여하려는 조부모들도 있다. 8월5일 서울 강남구 보건소에서는 ‘예비할머니와 함께하는 모유수유 및 신생아돌보기 교실(사진)’이 열렸다. 강의 참가자 40여 명 중에는 머리가 희끗한 예비 할머니도 10여 명 있었다. 최영순씨(63)는 “나는 애 셋을 집에서 낳았지만, 이번 기회에 새로 아이 키우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았다. 친구들은 왜 손자를 키워주느냐고 못마땅해하지만 상황이 허락하는 한 손자를 맡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양정민 인턴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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