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첫아이를 낳은 직장인 김 아무개씨(35)는 올봄 친정어머니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내 나이 벌써 60대 중반이다. 힘에 부쳐서 도저히 아이를 못 봐줄 것 같다. 너희끼리 알아서 잘 키웠으면 좋겠다. 가끔씩 내가 아이를 보러 가마.”

어머니의 ‘선언’은 하필이면, 출산휴가가 끝나기 2주일 전에 이뤄졌다.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봐줄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김씨는 부랴부랴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제 월급이 모두 나오는 출산휴가(3개월)와 달리 월 50만원씩 1년 동안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게 전부인 육아휴직은 오래 사용하기가 부담스러웠지만, 그녀는 결국 4개월째 육아휴직 중이다. 영아(만 1세까지 아기)도 맡아주는 어린이집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제대로 기지도 못하는 어린 아기를 제3자의 손에 맡기기가 꺼림칙했다. 어린이집 원장 역시 “면역이 약한 어린 아기가 개방된 공간에 오게 되면 한동안 병을 달고 살게 것이다”라며 아기 맡기기에 신중할 것을 요구했다. 
 

산후조리원에서 사귄 ‘육아 친구들’에게 이런 사정을 하소연했더니 뜻밖에 비슷한 처지의 엄마들이 많았다. “첫아이 한번 봐주시고 나서 팍삭 늙었다며 둘째부터는 어림도 없다고 하시더라” “집안 어른들 모임에서 우리 집안은 아범·어멈 대신 손자녀를 봐주지 말자고 결의하기도 했다.” 그중에는 2세 계획이 없던 자식 부부에게 “손자는 내가 다 돌봐줄 테니 안심하고 아이를 낳아라”고 했다가 막상 손자가 생기자 나 몰라라 하는 조부모도 있어서 부모 자식 간에 미묘한 갈등이 생긴 경우도 있었다.

조부모·아이 모두에게 ‘죄책감’

전통적으로 자녀 양육의 중요한 축을 담당해온 조부모 세대가 3세(손자·손녀) 양육으로부터 벗어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부모가 첫아이를 갖는 연령대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말한다. 지난해 육아정책연구소가 영·유아가 있는 2554가구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영·유아(0세부터 만 6세)를 키우는 가정의 평균 아빠 나이는 35.8세, 엄마 나이는 33세였다(지난해 여성 첫 출산연령 역시 31세로 점점 더 높아지는 추세다). 연령대별로 살펴보면 부모 나이가 35~39세 사이인 경우가 아빠는 33.9%, 엄마는 37.9%로 가장 많았다. 부모 나이가 40~44세인 경우도 각각 29.4%, 18.2%나 되었다. 부모 나이가 29세 이하인 경우는 아빠 8%, 엄마 21%에 그쳤다. 영·유아 가정 부모의 나이는 ‘30대 후반’ 이상이 ‘대세’라는 것이다.

덩달아 조부모의 연령대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는 늘그막에 첫 손자·손녀를 본 연로한 조부모가 양육에 참가하기 어려워짐을 뜻한다. ‘실버 세대’의 사회·문화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노후를 즐기겠다’는 욕구가 커진 것도 조부모가 양육을 기피하려는 까닭이다. 양극화 현상으로 인해 노년에도 경제활동에 나서야 하는 노인 세대가 늘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통계도 이런 현실을 뒷받침한다. 육아정책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낮 시간 동안 영·유아를 돌보는 사람’ 중 가장 높은 비율은 단연 엄마(68.4%)였다. 그 다음이 보육기관(14.4%), 친조부모와 외조부모는 각각 6.7%, 6.2%에 그쳤다. 아빠는 1.2%였다. 영아의 경우 엄마가 돌보는 비율은 74.9%로 더욱 높아진다. 다만 외조부모 비율은 6.7%로 약간 높아져 친정어머니(외할머니)의 양육 비율이 높으리라는 추측을 뒷받침했다. 엄마가 취업했을 경우에는 조부모 양육 비율이 33.9%로 높아지는데, 이는 보육시설에 맡기는 비율(33%)과 비슷했다. 

조부모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육아는 전쟁이다. 아이를 맡기기 위해 주말마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거나, 아이를 봐주는 친·인척 집 근처로 이사를 해야 하는 일이 잦다. 경기도 이천에 사는 교사 이정미씨(가명·37)은 주말마다 친정인 광주까지 오가느라 왕복 8시간씩 투자해야 했다.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한 언론사 기자(40)는 아이를 맡아줄 친·인척을 찾아 지난 4년 동안 무려 7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조부모와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다. 지난해 아이를 낳고 6개월 동안 육아휴직을 사용한 뒤 회사에 복귀한 직장 여성 정 아무개씨(38)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직장을 그만둘까 고민 중이다. 주중에 시부모에게 아이를 맡기는데 요즘 들어 부쩍 시부모가 전화를 걸어 힘겨움을 호소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지난봄에는 시어머니가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나갔다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아이 역시 엄마랑 헤어지는 월요일 아침에는 유달리 보채는 일이 잦아졌다. 정씨는 “월요일 아침만 되면 아이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차라리 내가 일을 그만두는 게 모두에게 좋은 선택일 것 같다”라며 괴로워했다.

이런 사례는 수두룩하다. 이전 세대가 일과 육아 모두를 병행하며 ‘슈퍼맘’ 신드롬을 만들어냈다면, ‘IMF 세대’는 일과 육아 중 한 가지를 선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회사 눈치, 시부모 눈치, 아이 눈치 보면서 사는 게 싫다. 내가 이기적인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슈퍼맘’으로 허덕이며 살고 싶지 않다”라는 정씨의 말은 이 세대의 심경을 웅변한다.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디딘 시기에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평생 직장’ 개념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IMF 세대의 경험도 슈퍼맘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시사IN 조남진

이러다보니 선배 세대와 갈등을 겪는 이들도 있다. 교사 이정미씨는 출산 초기 모유 수유와 양육 문제로 힘겨워하다가 여성인 선배 교사들로부터 “왜 그렇게 힘들다는 티를 내고 다니느냐”라는 핀잔을 들었다. 이씨가 기가 막혔던 건 선배들 상당수는 모두 조부모로부터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아예 시어머니가 지방에서 올라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돌봐준 경우도 있었다. 이씨는 “자기들은 조부모 도움으로 직장 생활에만 주력해 슈퍼맘이 되어놓고, 이제 와서 우리더러는 ‘애는 역시 엄마가 키우는 게 낫더라’ 하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같은 여성이 더 날 이해하지 못할 때 정말 서운했다”라고 털어놓았다.  

‘돈’ 문제도 작은 문제는 아니다. 대다수 부모는 조부모에게 양육비로 얼마간 지불한다. 월 30만~40만원씩 용돈 정도를 드리는 경우도 있고, 월 100만원 이상씩 ‘베이비시터’에 준하는 양육비를 드리는 등 천차만별이다. 여기에 분유·기저귀·교재비 등까지 포함하면 가계 부담은 상당하다. 영·유아 가정의 월평균 저축액(57만원)은 전체 가구 평균 저축액(84만원)보다 낮다. 고교 교사 김 아무개씨(39)는 지난해 딸아이를 낳은 뒤로 아침 7시30분부터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산다. 보충수업·자율학습 감독 등 수당이 나오는 일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홑벌이인 데다 부모님까지 편찮아 병원비가 만만치 않다. 김씨는 “아이를 낳자마자 부모님이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셨다. 어느 날 갑자기 자녀 양육과 부모 부양, 이중고를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속빈 강정’ 육아휴직제가 부부 갈등 부추겨

더 심각한 건 부부 관계다. 출산은 원만했던 부부 관계에 빨간불이 켜지게 한다. 지금 세대 남성이 이전 세대에 비해 가사노동에 적극적이라지만, 육아에 관해 무지한 것은 전 세대 남성과 큰 차이가 없다. 출산 전 그나마 나뉘었던 가사노동 분담 비율이 출산 후에는 전적으로 아내 몫으로 돌아온다.

직장인 이 아무개씨(38)는 처음으로 아내에게 ‘이혼’ 소리를 들었던 날을 잊지 못한다. 결혼 6년 만에 아이를 가진 이씨는 출산 초기에 남성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등 아내와의 육아 분담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회사 복귀 후 잦은 모임 등으로 늦게 들어가는 날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육아는 아내 몫으로 돌아갔다. 어느 순간 아이마저 아빠에게 안기면 보채는 날이 많아졌고, 결국 아내가 폭발했다.

이씨는 “그래도 나는 육아휴직까지 하면서 당신을 도왔는데 너무 몰라주는 것 아니냐”라고 맞받았고, 아내는 “두어 달 반짝 도와줘놓고는 생색내는 걸 보니 당신도 옛날 남자들과 다른 게 없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씨는 “애 밥 먹이고, 기저귀 가는 것 등 한다고는 하지만 뭐든 내가 하는 게 서투르다보니 아내에게 눈치가 보인다. 이제는 아내를 볼 때마다 겁부터 난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육아휴직 제도도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현행 제도는 부모 모두 자녀가 만 6세(2008년 이후 출생 대상)가 될 때까지 1년간 육아휴직을 신청할 수 있고, 월 50만원씩 육아휴직 급여를 지급한다. 하지만 실상은 속 빈 강정이다. 지난해 육아휴직을 신청한 직장인 수는 3만5400명(1387억2400만원 수급)으로 전년보다 21.5% 늘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출산휴가를 신청한 직장인(7만3565명)과 비교하면 절반에 불과했다. ‘직장맘’의 절반이 3개월짜리 출산휴가만 사용하고 육아휴직은 쓰지도 못한 것이다.
 

남성 육아휴직은 더욱 심각하다. 지난해 신생아 숫자가 44만8800명인 데 비해, 남성 육아휴직을 사용한 아빠는 고작 502명(0.11%)이었다. 일부 대기업과 공무원 사회에서 남성 육아휴직이 보편화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 직장에서는 육아휴직 쓰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셈이다. 월 50만원에 불과한 육아휴직 급여도 휴직을 망설이게 하는 주원인이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세종은 즉위 8년째인 1426년 4월17일, 관청의 여성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100일 동안 휴가를 주도록 했다. 그전 관청 여성 노비는 출산 후 7일이 지난 뒤 다시 일을 해야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세종은 1434년에는 여성 노비의 남편에게도 육아휴가를 주는 제도를 ‘세계 최초’로 실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남편에게는 전혀 휴가를 주지 않고 그 전대로 일을 하게 하면 산모를 구호할 수 없다. 부부가 서로 돕는 뜻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이 때문에 이따금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어 진실로 가엾다 하겠다. 이제부터 사역인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도 만 30일 뒤에 일하게 하라.” 

현재 우리나라의 출산휴가는 90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육아와 일 사이에서 방황하는 IMF 세대 엄마·아빠들은, 육아에 관한 한 600여 년 전 노비보다 더 못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세종대왕이 지하에서 IMF 세대 엄마·아빠를 ‘어엿비’ 여기고 있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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