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축구는 변방이었다. 아니 제물이었다. 월드컵에서 아시아 국가는 당연히 꺾어야 하는 상대였다. 몇 점 차인지가 중요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1무2패, 이란은 1승2패. 일본은 3전 전패를 기록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출전한 일본·이란·사우디아라비아는 모두 1무2패로 예선 탈락했다. 그나마 한국이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1승을 거두었다. 

아시아 팀의 경기 내용은 더욱 참혹했다. 축구의 기본인 공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시아 공격수 가운데 유럽 수비수 한 명을 제대로 제치는 선수가 없었다. 월드컵에서 아시아의 리더는 한국이었다. 남아공 월드컵이 8번째 출전이었다. 7회 연속 출전. 브라질·독일·이탈리아·아르헨티나·스페인만이 한국보다 많은 연속 출전 기록을 갖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독보적이다. 일본은 이번 월드컵이 네 번 연속 출전이다. 중국은 단 한 번 월드컵 무대를 밟았을 뿐이다.

‘아시아의 호랑이’ 한국. 하지만 거기까지다. 세계 축구의 벽은 높았다. 2002년 4강 신화는 전혀 평가받지 못했다. 남아공 월드컵 직전 최고 권위의 축구 전문 사이트인 골닷컴은 ‘역대 월드컵 최악의 장면 10선’을 선정했다. 한국의 4강이 3위에 뽑혔다. 한국의 4강 진출은 안방 텃세와 심판의 오심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을 지휘한 딕 아드보카트 감독(네덜란드)은 한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는 한국에 너무나 강한 상대다. 한국은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에서 만난 외신 기자들은 한국 팀이 아니라 붉은악마의 응원에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검은 대륙에서 아시아 축구는 돌풍의 핵이었다. 일본은 카메룬과 덴마크를 침몰시키며 16강에 진출해 남아공 최대 이변을 만들어냈다. “카메룬전이 일본의 마지막 행운이 될 것이다”라고 일본을 평가한 영국 BBC 방송은 “덴마크에게 승리를 거둔 일본 축구는 감동적이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비록 2대1로 지긴 했지만, 북한은 최강 브라질을 상대로 깊은 인상을 심었다. 아시아 지역으로 편입된 오스트레일리아도 1승1무1패를 기록했다.
 

ⓒReuter=Newsis

축구의 변방에서 돌풍의 핵으로

남아공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은 전혀 다른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2002년 성공이 전 세계에 충격을 던졌지만 이제 한국의 16강 진출을 쇼킹한 결과라고 보지 않는다. ‘아시아 안방 호랑이’ 굴레를 넘어 세계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하는 이도 적지 않다. 끈질기게 붙어다니던 ‘약팀’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렸다(월드컵 16강·8강 진출이 큰 벼슬은 아니다. 축구 선진국의 임명장을 받는 것도 아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진출했고,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16강에 올랐다. 하지만 그 다음 대회에서 두 팀은 종적을 감추었다).

AP 통신은 “한국이 경이적인 스피드와 빠른 압박으로 축구 변방 아시아 축구의 인상을 바꿔놓았다”라는 기사를 내놓았다. 지난 6월23일 우루과이 최대 일간지인 엘 파이스는 “한국은 아시아 축구 스타일에 전술과 선수들을 진화시켜 다른 아시아 팀들보다 한 계단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리스와의 경기에서 한국 미드필더들은 끊임없이 포지션을 바꿔가며 기습적으로 치고 올라가는 능력을 보여줬으며 공을 잡을 때마다 리듬 전환에 탁월했다”라고 평가했다.
일본 축구 전문기자 요시유키 고미야는 “한국 축구는 일본보다 한 수 위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세계와 싸워볼 만한 수준이다. 아르헨티나에는 패했지만 그것이 아시아 축구의 레벨이다”라고 말했다. 신문선 명지대 교수도 “오카다 재팬의 경기력이 많이 불안하다. 한국 수준이 일본보다 월등히 높다”라고 말했다.

 

 

ⓒReuter=Newsis지난 6월17일 아르헨티나 선수와 볼을 다투는 이청용 선수(왼쪽).

척박한 땅에서 꽃핀 한국 축구

한국은 축구라는 나무가 자라기에는 척박한 토양이었다. 축구 꿈나무를 위해 집을 팔아 뒷바라지를 할 정도로 한국에서 축구는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이다. 고등학교까지는 먼지 펄펄 나는 맨땅에서 경기를 하고 태극 마크를 달고서야 잔디를 밟을 수 있다. 그마저도 승부에 집착하는 어른들이 경기장 안으로 차를 돌진하기 일쑤였다. 축구 최고 명문이라는 고려대 축구감독은 횡령한 돈으로 심판을 상습적으로 매수했다. 한국 K리그에는 스폰서가 없어서 구단은 만성 적자에 허덕였다. 그러는 사이 한국의 대표 기업들은 해외 클럽에 수백억원을 주었다. 서울시마저 FC 서울이 아니라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구단에 연 25억원을 후원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 축구는 고질병을 스스로 고쳐가며 진화하고 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 한국 팀은 문전 처리 미숙과 ‘뻥 축구·빽 패스’ 등 한국병을 말끔히 날려버렸다. 월드컵 본선 3경기 5골은 대단한 성과다. 이제 한국의 약점은 수비 불안 정도가 남았을 뿐이다. 16강전 상대였던 우루과이의 오스카르 타바레스 감독은 “한국 수비에 문제가 있다. 꺾지 못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

한국 축구 도약의 구심점은 주장 박지성과 골잡이 박주영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선수인 박지성은 월드컵 3개 대회 연속 골을 기록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가 되었다. 박주영은 아르헨티나전 자살골에 위축되지 않고 나이지리아전에서 프리킥 골을 기록했다. 박주영은 “코칭스태프와 동료들이 잘 위로해줘 부담은 없었다. 선수들끼리 정말 재밌게 경기를 했던 게 좋은 결과로 나온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국 축구의 진화 인자는 이청용(22·볼턴 원더러스)이었다. 한국팀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강팀에 결코 주눅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했던 한국 선수들은 발이 얼어 있었다. 멕시코전에서 선제골을 넣은 뒤 3분 만에 퇴장당했던 하석주(전남 코치)는 “너무 떨려서 내가 태클을 했는지도 몰랐다”라고 말했다. 벨기에와의 마지막 경기에 출전했던 하석주 코치는 “퇴장이 무서워 상대 선수들 곁에 제대로 붙지도 못했다. 벌벌 떨면서 뛰었다”라고 말했다. 

이청용은 아르헨티나·나이지리아에 선제골을 허용한 뒤에도 가장 발랄한 몸놀림을 보였다. 남아공에서 만난 홍명보 올림픽 대표팀 감독은 “이청용 선수에게서는 유럽 선수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한국 축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축구를 즐긴다. 발랄한 그는 한국 축구가 한 계단 나간 증거다”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청룡열차’로 놀림받던 이청용은 ‘주눅’이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는 듯했다. 그에게 도전은 즐겁기만 하다.

한국 축구 진화의 결정체, 이청용

2009년 8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 이청용은 영국에 도착한 지 이틀이 채 지나지도 않아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이청용을 두고 현지 언론은 “연약해 부러질 것 같다”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자신의 진가를 증명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세 경기 만에 이청용은 우아한 기술과 볼 터치로 데뷔골을 장식했다. 그리고 단숨에 볼턴의 중심이 되었다. 이청용을 영입한 게리 멕슨 전 볼턴 원더러스 감독은 “얼굴은 열네 살짜리로 보이지만 워낙 머리가 좋다”라고 말했다. 볼턴의 오언 코일 감독은 “이청용이 팀 체질까지 바꿨다. 승리를 부르는 보증수표다”라고 극찬했다. 이청용은 올 시즌을 마치고 ‘볼턴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이 밖에도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상’ ‘올해의 이적 선수상’ ‘올해의 톱3상’까지 받았다. 이청용은 “한국에 좋은 선수들이 많다는 걸 알렸으면 좋겠다. ‘한국 선수들 능력이 이 정도야’라고 으스대고 싶다”라고 말했다. 

 월드컵 직전 만난 이청용에게 부담감은 없었다. 기자에게 “재미있을 것 같아 월드컵이 기다려진다”라고 했다. 그는 “남아공 월드컵이 부담스럽지 않다. 세계와 맞부딪칠 패기와 열정이 가득하다. 내 기술이 월드컵에서 통할지 맘껏 즐기겠다”라고 말했다.

이청용은 남아공에서 가장 반짝이는 재능을 보였다. 그리스 수비수들은 이청용을 잡지 못했다. 전반 15분 이청용이 제치고 들어가 슛을 날리는 과정에서 뒤늦게 달려오던 수비수가 이청용을 가격해 넘어뜨렸다. 분명히 페널티 상황이었다. 심판본부에서도 그렇게 판단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는 “그리스 수비수가 퇴장을 당하고 한국에 페널티킥이 주어져야 했으나 심판의 판정은 실망스러웠다”라고 지적했다. 아르헨티나에 두 골을 먹어 한국 선수들의 발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청용은 달랐다. 전반 종료 직전에는 수비수의 공을 빼앗아 골까지 터뜨렸다. 골키퍼를 앞에 두고 오른발로 정확히 찍어 올린 기술적인 슈팅이었다. 나이지리아전에서도 이청용은 상대의 집중적인 파울을 돌파해냈다. 16강 진출을 확정한 이청용은 “남아공에 오랫동안 머물고 싶다. 더 큰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요시유키 고미야 기자는 “이청용은 한국 축구의 가장 큰 축복이다. 이제 스물두 살인데 터치와 패스 기술은 세계 수준이다. 이청용을 비롯해서 기성용·이승렬 등 어리고 기술 좋은 선수가 어떻게 한국에만 떨어졌는지 부러울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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