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중전에서 북한이 포르투칼에 대패했지만, 멀리 대한민국 봉은사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따로 없었다. 모두가 승자였다. 21일 야외 응원을 하기 더 없이 좋은 날씨였다. 결과는 냉혹했다. 7대0. 6월21일 북한 축구 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해 서울 강남구 봉은사에 모인 600여 명은 ‘대~한민국’ 대신 ‘One Korea’, ‘우리는 하나’라고 외쳤다. 입에 설어 큰 소리가 되진 못했지만 한반도기를 든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였다. 승리를 바라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며 북한의 패색이 짙어지자 1승 대신 “한 골만, 한골만”을 외치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경기 전, 봉은사 주차장을 응원장으로 내준 명진스님이 전광판 앞에 마련된 작은 무대에 올랐다. “어렵게 결정했지만 현명한 판단이었다. 응원전 주제가 피스 코리아(Peace Korea)다. 전쟁은 피해야 한다. 우파라고 해서 총알이 비켜 가고, 좌파라고 해서 맞는 것이 아니다. 공멸하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응원전은 ‘라디오21’의 제안을 명진 스님이 받아들이며 성사됐다. ‘진실을 알리는 시민들’이 3일간 봉은사 응원전을 준비했다. “박지성 선수가 정대세 선수한테 패스해서 골을 넣으면 그게 6.15 정신이다”라고 말한 명진 스님은 전반전만 보기로 했다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천정배 민주당 의원,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도 봉은사를 찾았다.

ⓒ뉴시스봉은사에 모인 응원단은 "피스 코리아"를 외쳤다.
밤 8시30분 경기 시작 때만 해도 여유가 있던 봉은사 주차장 앞마당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로 꽉 찼다. 휠체어에 의지한 몸을 이끌고 부천에서 지하철로 봉은사에 온 강미숙씨(45)는 일찌감치 와서 맨 앞자리에 앉았다. 경기 시작 3시간30분 전에 집에서 출발했다. 오는 길에 길을 물어본 경찰이 봉은사에 북한을 응원하러 간다니까 ‘빨갱이를 왜 응원하느냐’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강씨는 “북한 사람들은 한 민족 아닌가. 정말 이겼으면 좋겠다. 북한이 이겨서 정대세 선수가 이번엔 기쁨의 눈물을 흘렸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들 사이 나이든 할아버지 응원단도 눈에 띄었다. 박희성씨(75)는 평안북도가 고향인 비전향장기수다. 형무소에서 27년을 보냈다. 북송을 기다리는 비전향 장기수 20여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에겐 이 자리가 더 특별하다. “함께 응원하는 문화가 있어야 경색된 남북 관계의 국면이 완화될 수 있다 이북을 나쁘게만 생각하는 사람들과도 함께 응원하고 싶다. 봉은사에서 장소를 제공해주신 데 감사한다.”

ⓒ뉴시스응원단은 정대세의 통일 골 세레모니를 기대했다.
자리를 메운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선수는 단연 정대세 선수였다. 지난번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눈물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남시에서 온 박명재씨(47)는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정대세 선수가 흘린 눈물 보며 느껴지는 바가 많았다. 일본 뿐 아니라 외국에 진출해 한국의 비극을 더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정대세 선수의 사진을 코팅해 목에 걸은 그는 손수레에 돗자리, 마이크, 막걸리, 꽹과리 등 응원도구를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아이 둘과 수원에서 봉은사를 찾은 김윤수씨(43)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수경 스님과 명진 스님을 존경한다. 이번 결정도 대단히 용기 있는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정대세의 눈물엔 우리 민족의 정서가 다 들어있다”라고 말했다.

정대세 선수가 이날 통일 골 세레모니를 준비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응원단은 그의 발끝을 주목했다. 정대세 선수가 아깝게 기회를 놓치자 탄식이 터져 나왔다. 회사원 김태영씨(28)는 “퇴근하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왔는데 비가 오는 경기장에서 힘들게 경기한 북한 선수들을 보니 안쓰럽다. 졌지만 함께 북한을 응원한다는 게 색다르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누구보다 가슴 졸이며 경기를 지켜봤을 정대세 선수의 형 정이세 선수는 경기종료 직후 시사IN과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할 말을 잃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7대 0의 스코어가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실력 차가 있긴 했지만 많이 아쉬웠다”라며 짧은 관전평을 마쳤다. 한국에서 수백 명이 모여 북한을 함께 응원했다는 소식에 놀라며 소식을 전해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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