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이 침몰한 지 2주가 돼가지만 의혹은 오히려 커져만 간다.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해군 특수전여단(UDT) 소속 한주호 준위가 사망하고 어민 9명이 죽거나 실종했다. 사고를 당한 장병 외에도 벌써 희생자가 10명이나 나왔지만 어째서 배가 갑자기 두 동강이 났는지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군과 정부의 발표가 오락가락해 불신만 키운다. 정부가 무능하거나 뭔가 숨기고 있는 걸까.

폐로 숨을 쉬는 인간은 사실 바다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달이나 화성의 표면보다도 지구의 열길 물속을 더 모르는지도 모른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했다지만 아직 잠수함을 탐지할 뾰족한 방법은 없다. 전문가들이 한 나라의 군사력을 논할 때 잠수함을 가졌느냐 아니냐를 중요한 잣대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간이 잠수복을 입고 들어가 볼 수 있는 한계는 기껏 수심 100m 정도이다.

ⓒ사진공동취재단천안함 수색 작업에 나선 UDT 대원들
접근하기 힘들어서일까. 바다는 인간에게 항거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한다. 바다에선 숨을 쉬지 못하는 대신 중력을 이기는 부력 덕분에  새처럼 날아다닐 수 있다. 뭍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수억년을 살아온 생물과 풍광이 마치 외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바다 밑에는 인간이 배를 만들어 타고 다니면서부터의 역사가 고스란히 가라 앉아 있다. 지상의 어떤 박물관보다 풍부한 유물을 간직한 보고이다. 식민 제국과 나치, 군국주의자들의 허망한 권력욕이 처참하게 침몰한 곳이기도 하다. 바다에 수장된 이들은 애꿎게도 그같은 권력을 휘둘렀던 자들이 아니라 대부분 앳된 젊은이들이다. 격전지 바다 밑 전사들의 공동묘지는 그래서 더욱 애틋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그들의 한이 너무 사무쳐 살아 숨 쉬는 자들의 목숨을 불러들이는지도 모른다.

바다 속 경이를 처음 인류에게 가르친 캡틴 쿠스토

바다 속의 경이를 인류에게 처음 가르친 이는 잭 이브 쿠스토이다. 프랑스 군인 출신으로서 현대적인 스쿠버 장비의 발명자이고 해저 다큐멘타리 제작자이며, 환경론자이자 생물학자이기도 하다. 그와 ‘겁이라곤 모르는’ 그의 동료들이 없었다면 인류는 바다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적게 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쓴 〈더 싸일런트 월드〉는 수중 세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유명한 고전 중의 고전이다. 그는 심해 잠수 분야를 개척하면서 숱하게 죽음의 위기를 맞았으나 87세 천수를 누렸다. 누구보다도 치밀하고 냉정하고 인내심이 많았던 그를 동료들은 항상 캡틴 쿠스토라 불렀다.

캡틴 쿠스토에게 바다는 수천 수만 번의 잠수를 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곳이었다. 그는 매번 입수할 때마다 “불쑥 침입했다”는 느낌을 가졌다. “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더욱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힘든 곳”이 바로 바다였다. 확실한 것은 물고기들은 소리보다는 소리없는 파장에 훨씬 민감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물고기들이 아주 멀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도 몸체에 있는 옆줄로 예민하게 감지한다고 느꼈다. 어떤 때는 다이버들이 위협적인 몸짓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주변에 물고기가 하나도 없을 때가 있었다. 모두가 어디론가 떠나 버린 곳에 혼자 달랑 떠 있으면서 이곳은 뭍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 지배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래서 쿠스토는 바다속을 싸일런트 월드라고 불렀다.

공기통을 메고 들어가 바다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현대식 잠수법을 개발한 쿠스토와 그의 동료들은 개척자답게 자기들의 몸으로 모든 부작용을 실험할 수밖에 없었다. 수심 30m 이상의 잠수를 하면 술에 취한 듯한 질소마취 현상이 일어나고 심하면 간단한 것도 판단할 수 없는 멍청이가 돼버린다. 질소에 중독된 다이버는 지나가는 물고기가 숨이 막힐까봐 마우스 피스를 물려주려고 하기도 하고, 바닥의 바닷 가재가 자기에게 다정하게 말을 거는 것을 듣는다. 심해에서 작업을 하다 물 밖으로 나갈 때는 일정한 높이에서 알맞은 시간 감압을 해 몸 속의 질소를 배출해야 잠수병에 걸리지 않는다. 쿠스토와 그의 동료들은 어느 정도 깊이가 한계인지, 어떤 높이에서 얼마나 오래 감압해야 하는지 알아내려고 기꺼이 목숨을 걸었다. 쿠스토의 절친한 동료였던 베테랑 잠수부 모리스 파르귀에는 수심 환각 증상을 직접 체험해보려고 120m 까지 내려갔다가 끝내 사망했다. 파르귀에 덕분에 쿠스토와 그의 동료들은 그 뒤 100m 이상은 내려가지 않게 됐다. 
 
대륙붕을 점령하려는 자는 직접 바다에 몸을 적셔라

쿠스토는 해상 사고 조난자를 구출하고, 2차대전 뒤 독일이 전세계 바다에 뿌린 기뢰를 제거했으며, 에게해에서 그리스 시대의 귀중한 유물을 건져냈다. 그는 수중 생물 다큐멘타리를 찍다가 상어에게 잡혀 먹을 뻔하기도 했다. 1997년 6월25일 그가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프랑스 언론은 프랑스인 중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드골도 피에르 가르텡도 아닌 쿠스토였다는 헌사를 보냈다. 그는 “대륙붕을 정복하려는 자는 바닷물에 몸을 적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로 〈싸일런트 월드〉를 마무리했다.

미국에는 자격증을 가진 다이버가 자그마치 1천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들은 대부분 수심 40m 이상의 심해 잠수를 꿈꾸지만 그걸 할 수 있는 경험과 배짱을 갖춘 이는 수 백명에 불과하다. 심해 잠수자들은 위험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항상 정면으로 대응한다. 그들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거나 동료가 죽는 걸 목격하거나 아니면 직접 죽는다. 그들은 질소마취가 한계에 달하는 60m ~70m 지점의 난파선을 탐험하는 것을 가장 즐긴다. 난파선 중에서도 U-보트 같은 잠수함, 그중에서도 특히 ‘처녀 잠수함’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처자식도 버리고 달려간다. 1939년부터 1945년 사이 독일은 U-보트 1167척을 건조했는데 그 중 757척이 침몰 혹은 나포당했고, 65척 가량은 행방을 모른다.

로버트 커슨이 쓴 〈어둠 속의 다이버〉는 바로 미국의 뉴저지 해역에서 미지의 U-보트를 발견한 심해 다이버들이 1991년부터 장장 7년 동안 그 배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분투한 기록이다. 작가는 이 탐험을 끝까지 주도한 두 베테랑 다이버 존 채터튼과 리치 콜러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1944년 2차 대전 중 독일의 U보트를 붙잡은 미군이 잠수함에 미국기를 달았다.
심해 다이버에게는 ‘성배’와 같은 처녀 잠수함

낚시꾼에게 배를 빌려주는 선주에게는 자기만의 황금 수역이 있다. 물 반 고기 반에 대물이 심심치 않게 걸려 나오는 비장의 수역을 한 두 군데는 알아야 인기 있는 선주가 될 수 있다. 선주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고객이 항법 장치를 가져가는 걸 금한다. ‘며느리’에게도 좌표를 말해주는 법이 없다. 그 자신 베테랑 다이버이며 다이버들에게 배를 빌려주는 선주이기도 한 빌 네이글은 술을 마시다가 전부터 알고 지내던 선주에게서 이상하게도 대물이 많이 걸려나오는 수역이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난파선 세계의 에베레스트라고 불리는 안드레아 도리아호에서 수십년간 다른 다이버들이 찾아 헤맸던 종을 발견해낸 심해잠수계의 전설 네이글은 그 수역 밑에 거대한 난파선이 누워 있으리라는 걸 직감한다(침몰한 여객선에서 종을 찾아내는 것은 다이버들에게는 지상의 영광이라고 한다). 난파선은 물고기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보금자리이다.

어렵게 좌표를 알아낸 빌 네이글은 14명의 다이버로 탐험팀을 꾸렸다. 맨 처음 물 속의 물체가 잠수함이란 걸 확인한 인물은 알콜 중독으로 몸이 망가져 더 이상 잠수를 할 수 없게 된 선장 빌 네이글 대신 첫 번째로 입수한 베테랑 다이버 존 채터튼이었다. 수심 70m 가까운 곳에 길게 누운 난파선에서 어뢰를 발견한 채터튼은 처음에는 질소마취 때문에 자기가 미친 게 아닌가 의심했다. 미국과 독일의 공식 기록에 그 수역에서 잠수함이 침몰했다는 기록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이버들에게 처녀 잠수함을 발견했다는 것은 성배를 발견한 것과 같은 의미였다.
 
감압을 하지 않느니 죽는 게 낫다

ⓒ이선명
그 뒤 잠수함의 정체를 밝히려는 다이버들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됐다. 다이버의 생명을 노리는 적은 많았다. 수심 70m 가까운 곳에서의 질소마취 증상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작은 일에도 공포감에 눈알이 왕방울만해졌다. 잠수함 내부도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칼날처럼 날카롭게 찢겨 나간 강철 구조물과 난파선에 무리지어 사는 조개류의 예리한 껍데기가 다이버의 살을 도려내고 공기 호스 같은 생명선을 잘라버리려고 노렸다. 오리발로 조금만 휘저어도 부유물이 구름처럼 피어올라 시계 제로 상태를 만들었다. 난파선에서 방향 감각을 잃으면 출구를 불과 2m 앞에 두고도 헤매다 질식해 죽기도 한다.

잠수함 안에서의 사고나, 혹은 질소마취에 의한 공포심 때문에 감압을 하지 않고 튀어 올라간 다이버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잔뜩 흔들어놓은 청량음료처럼 혈액 속에서 기포가 팽창하는 바람에 혈액순환이 불가능해진다. 다이버들은 감압을 하지 않고 상승하느니 차라리 물 속에서 죽는 게 낫다고 믿는다.

자기가 쏜 어뢰에 맞은 U-869호

미지의 잠수함은 좀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다이버들에게 자신이 2차대던 당시 독일이 만든 U-보트라는 정도만 알려주는 유품을 건넸을 뿐이다. 소득은 미미했지만 다이버들이 치른 대가는 너무 컸다. 1년간 3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그 중에 두 명은 부자지간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잠수해 선체 안으로 들어갔다가 강철 캐비닛이 넘어지는 바람에 갇혀 공기를 다 소모하고 감압을 하지 못한 채 수면으로 올라와 고통 속에 죽어갔다. 지난 36년 동안 다이버들이 수천 번이나 잠수해 도리아호를 방문했지만 사망한 사람은 6명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잠수함 탐험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다.


잠수함은 1997년 질소마취 증상이 없는, 새로 개발된 트라이믹스 잠수까지 시도한 존 스태턴과 리치 콜러에게 U-869란 이름이 적힌 예비부품함을 건네고 항복하고 만다. 독일 해군 잠수함 U-869는 전쟁 막바지인 1944년 11월23일 처녀 출항했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함장인 헬무트 노이에르 부르크의 당시 나이가 불과 27살, 나머지 수병은 모두가 풋내기들이었다. 전체 56명 중 10대가 24명이나 됐다. 이들은 허망하게도 자기가 쏜 어뢰에 맞아(모선의 엔진 소리를 적함의 소리로 오인해 돌아오기 때문에 회귀 어뢰라고 부른다) 수장된 것으로 보인다. 바다에서는 때로 불가해한 일이 일어난다.

다이버들은 독일까지 찾아가 유족을 위로하고 유품을 건넸다. 그들은 〈어둠 속의 다이버〉 말미에 “그 누구도 대양의 깊은 해저에 익명으로 누워 있어서는 안 된다. 가족이라면, 친구라면,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아, 천안함이여.

바다 이야기의 고전으로는 본인이 선장 노릇도 해봤던 조셉 콘래드의 〈로드 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 그리고 포경선과 군함에서 근무했던 허먼 멜빌이 쓴 〈모비딕〉을 가장 재미있게 읽은 것 같다. 그리고 최근에는 300년 전 카리브해에 침몰한 해적선 옥스퍼드 호 발굴 과정을 그린 릭 하우프트의 〈해적선〉, 뒤마 클럽 회원이기도 한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항해지도〉를 흥미롭게 봤다. 잭 이브 쿠스토에 따르면 대부분 다 터무니 없는 허풍에 불과하지만 해저의 보물을 찾는 얘기는 언제나 사람을 숨죽이게 만든다.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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