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 박노해 지음

박노해 시인은 기자를 부끄럽게 하는 분이다. 2006년 7월 이스라엘군(미국을 등에 업은)이 헤즈볼라에 납치된 자국 군인 2명의 송환을 요구하며 장장 33일간 레바논 전역에 폭탄을 퍼부었다. 이 폭격으로 레바논의 민간인, 그중에서도 천진무구한 숱한 어린이가 죽거나 다쳤다. 박 시인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한 레바논 남부를 돌며 피해자를 인터뷰하고 참상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았다. 국내 기자는 물론이고 어떤 외신 기자도 취재하지 않았던 곳을 일일이 발로 뛰며 취재한 기록을 묶은 책이 바로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이다.

폭격이 계속되는 동안 전부터 알고 지내던 레바논의 소녀는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도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아요. 여기 레바논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라고 울먹인다. 전화는 끊겼다가 다시 연결되지 않았다. 이 개명 천지에 홀로 버려진 듯하다는 소녀의 외침은 충격이었다.

이 책을 읽을 무렵엔 플레이보이로 이름 높은 홍콩의 가수 겸 배우 진관희가 유명 여배우들과 놀아난 적나라한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한창 전 세계로 퍼져나가던 중이었다. 후배에게서 은밀하게 사이트 주소 하나를 귀띔 받아 기술의 진보를 찬양하며 열심히 ‘취재’를 하던 참이었는데, 박 시인이 쓴 책을 읽고 새삼 깨달았다.  광속의 두 배쯤 빠른 속도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다 해도, 그것이 정말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는 데는 막상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흔히 기술의 발달(혹은 첨단 매체의 출현)이 언론의 자유를 확대하리라고 믿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멋진 신세계〉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김수현 작가의 반응

김수현 작가

방송 드라마계의 대모 격인 김수현 작가가 영화 〈아바타〉를 보고 트위터에 올린 글이 흥미롭다. 그녀는 “〈아바타〉 보면서 나는 왜 중간 중간 졸았을까. 너무 단순한 이야기는 따분하고, 목침 하나 가로로 코 위에 얹은 우스꽝스런 동물들은 헛웃음 나오게 하고”라고 썼다. 그리고 “창작물로서가 아니라 현란한 시각 홀림으로 밖에는…. 이미 보았던 장면들, 설정들 짜깁기를 3D 기법으로 확대 재탄생시킨 거 아니냐”라고 혹평했다.
그녀의 반응을 접한 누리꾼의 의견이 찬반으로 뜨겁게 갈렸다는데 나는 문득 올더스 헉슬 리가 1932년에 쓴 소설 〈멋진 신세계〉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이 작품은 극도로 발달한 기계 문명이 끝없이 오감의 만족과 안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심과 맞물렸을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 그려낸 대표적인 반(反)유토피아 소설이다. 비할 바 없이 위생적이고 깨끗하며 인간의 모든 번민과 갈등이 계획적이고 과학적으로 거세된 〈멋진 신세계〉에 어느 날 외곽지역에서 자란 야만인 존이 나타난다. 타잔처럼 엘리트 핏줄이면서도 우연한 사고로 야만지역에 고립돼서 자란 그는 육감적인 남녀가 곰털 가죽 위에서 털 한올 한올의 감촉을 즐기면서 나누는 정사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촉감 영화를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보다가 폭발한다.

“당신이 저런 것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존, 저런 것이라니 무슨 뜻이죠?”
“그 무서운 영화 말입니다.”
“무서워요?” “난 재미있던데요.”
“그것은 아주 저속합니다, 천합니다.”

첨단 기술의 결정체인 촉감 영화와 3D 영화에 대한 존과 김수현 작가의 반응은 ‘저속하다’와 ‘허접하다’로 갈리지만 반감이 크다는 점에서는 같다. 존은 야만지역에서 우연한 기회에 셰익스피어 전집을 발견해 달달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김수현 작가는 영상매체인 텔레비전 드라마 작가이면서도 그림이 아니라 대사로 승부하는 전형적인 셰익스피어의 후예이다. 두 사람 모두 인쇄 체제에 익숙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아바타〉의 격을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빗나간 〈1984년〉, 적중한 〈멋진 신세계〉의 예언

고도로 발달한 기술 문명이 인간을 노예로 만들 것이란 예언을 한 소설 중에서는 조지 오웰의 〈1984년〉이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빅 브라더는 세상을 수중에 넣는 데 실패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과학 기술 통제권을 쥔 독재자가 모든 책을 불살라버리고 전 국민의 사생활까지 24시간 감시하리라던 그의 예언은 빗나간 것으로 보인다. 마치 지뢰처럼 도시 곳곳에 살포된 CCTV 카메라만이 가끔 그의 불길한 예언을 상기시키고 있을 뿐.

그런데 조지 오웰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했던 헉슬리의 예언은 신통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것이 2003년 작고한 커뮤니케이션 학자 닐 포스트먼의 주장이다. 그는 ‘성찰 없는 미디어 세대를 위한 기념비적 역작’이란 부제가 붙은 그의 책 〈죽도록 즐기기〉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웰은 누군가 책을 금지할까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굳이 책을 금지할 만한 이유가 없어질까 두려워했다. 오웰은 정보 통제 상황을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정보 과잉으로 인해 우리가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전락할까봐 두려워했다. … 헉슬리는 자유주의 시민과 합리주의자들이 전제정치에 대항하는 경계태세는 늘 빈틈없었으면서도 인간의 거의 무한정한 오락 추구 욕구는 살피지 못했다고 간파했다. 〈1984년〉에서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해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즐길 거리를 쏟아부어 사람들을 통제한다(이곳에서는 소마라는, 행복해지는 약을 무한 리필한다). 한마디로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봐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서 집착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봐 두려워했다.

올더스 헉슬리가 조지 오웰보다도 뛰어난 천재였다고 재평가한 닐 포스트먼 자신도 죽은 뒤에 더욱 명성이 높아졌다. 그가 〈죽도록 즐기기〉를 쓴 해는 1985년이었다.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PDA, 수백 개의 케이블 TV 채널, 통화중 대기, 발신자 번호 표시, 블로그, 아이팟, 스마트폰, 트위터 같은 것이 나오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그런데 은근하면서도 뿌리 깊은 텔레비전의 해악에 대해 일찌감치 경고한 이 책은 오늘날과 같은 컴퓨터 시대에 와서 더욱 시의적절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의 아들 앤드루 포스트먼이 2006년 이 책을 다시 펴내면서 지적했듯이.

미국의 한 대학생 독자는 그가 마치 소설이나 시를 쓰듯 암시와 비유를 섞어 놓았다고 불평했는데 맞는 말이다. 〈죽도록 즐기기〉는 본문이 250쪽도 안 되지만 진도 나가기가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참고 정독하다 보면 20년 전에 그가 혹시 지금 시대로 시간여행을 하지나 않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그의 지적은 예리하고 통렬하다. 

심각한 모든 것을 단순한 오락물로 만들어버리는 텔레비전의 마력

〈죽도록 즐기기〉 닐 포스트먼 지음

닐 포스트먼에 따르면 일찍이 마셜 맥루한이 간파했듯이 매체는 단순히 내용을 담아내는 그릇이 아니라 그 내용물을 결정하기까지 한다. 포스트먼의 표현을 빌리면 생각을 표현하는 형식이 이로 인해 드러날 사고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인디언이 사용하던 연기라는 매체가 철학토론을 중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좀 더 복잡하게 얘기하자면 시계라는 매체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예로 들 수 있다. 루이스 멈포드가 그의 명저 〈기술과 문명〉(Technique and Civilization, 한국에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다)에서 지적했듯이 시계는 사람을 시간 기록자에서 시간 절약자로, 그리고 지금과 같은 시간의 노예로 전락시켰다.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태양과 계절을 무시하는 거만함을 터득해왔는데 이는 분과 초 단위로 엮인 세계에서 자연의 권위가 폐기된 탓이다.”  시계의 발명으로 사람들은 더 이상 영원성을 인간 활동의 목적과 기준으로 삼지 않았으며, 그것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쏟아낸 모든 논문보다도 더 신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빚었다.

흔히 생각하듯 〈죽도록 즐기기〉가 텔레비전을 비롯한 전자매체에 눈총을 쏘는 것은 그것에 값싼 오락물이 넘쳐나기 때문이 아니다. 인생은 꽃으로 뒤덮인 탄탄대로가 아니기에 즐거움을 누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충분히 이해한다. 문제는 텔레비전이 오락물을 전달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전달되는 내용이 오락적 행태를 띤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텔레비전은 쓰레기 같은 오락물을 방영할 때 가장 쓸모 있게 기능한다. 반대로 심각한 담론 형식(뉴스, 정치, 과학, 교육, 교역, 종교)을 다룰 때는 최악으로 기능하여 이들 담론을 제멋대로 오락 프로그램으로 변질시킨다.

그는 자신의 얘기가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유명 뉴스 앵커인 로버트 맥닐의 소신을 소개한다. 맥닐은 뉴스 쇼를 관통하는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핵심은 모든 것을 간단하게 처리하는 것이며, 누구의 관심도 끌려고 하지 말고, 대신 갖가지 볼거리와 신기함, 생동감, 동적 효과를 이용해 끊임없이 자극을 가한다. 시청자가 개념, 특성, 문제 등에 대해 수초 이상 집중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뉴스는 짧을수록 좋으며 복잡한 것은 금기이다.… 시각적 자극으로 생각을 무력화해야 한다. 명확한 언어 표현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런 뉴스의 폭격을 받은 시청자가 어떻게 변하는지는 1983년 2월15일자 뉴욕타임스 기사가 친절하게 해설해준다.

레이건 대통령의 보좌진은 대통령이 정책이나 현안에 대해 종잡기 어려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을 한다는 지적이 있을 때마다 화들짝 놀라곤 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러한 반응은 없는 듯하다.  사실 대통령은 계속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언을 일삼지만 뉴스에서는 예전만큼 집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백악관 측에서는 국민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언론에서도 뜸해진다고 여기는 모습이다.

MB가 숱한 말실수와 허언을 하고도 무사한 까닭

그 후에도 이런 현상은 부시 대통령 임기 8년 내내 계속 빚어졌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다. 지난 대통령선거 직전 당시 이명박 후보가 BBK를 자신이 만들었다고 직접 말한 동영상이 나왔다. 그전 이명박 후보의 발언과 비교하면 중대한 모순이 발견된 상황이었지만 대중은 ‘담담’했다. 대통령의 심각한 실언이나 거짓말이 꼬리를 물고 그에 대해 대중이 무심한 상황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닐 포스트먼이 알아챈 바에 따르면 이른바 인쇄체제 출신은 논리적이고 포괄적이지만, 전자체제 출신의 관점은 파편적이고 불연속적이다. 그는 젊은 학생들의 학위논문 작성을 지도하다 이런 차이를 확연히 깨달았다(인쇄체제 출신과 전파체제 출신으로 인간을 구분한 것은 학생들이었다). “이보게, 여기서는 이렇게 말해놓고 저기서는 반대 뜻으로 말하고 있잖아. 어느 쪽이야?”라고 물으면 학생은 난처해하며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학생의 논문에서 일관된 사고 흐름이 나타나기를 기대하지만 학생에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순간의 미학에 목숨을 거는 영화 〈아바타〉를 보다 김수현 작가가 졸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고 보면 요즘 텔레비전에서 어째서 막장 드라마가 유행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아무리 논리에 닿지 않더라도 순간순간의 장면이 선정적이고 호기심을 끌 만한 내용이면 그만인 것이다. 막장 드라마야말로 전파 매체의 특성을 제대로 활용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현 작가가 막장 드라마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자매체는 인쇄매체에 한다리를 걸친 기성세대에게보다는 청소년에게 정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미국, 유럽, 한국, 일본, 중국 할 것 없이 인터넷이 널리 보급된 나라에서는 공통된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현실 세계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무기력한 청소년 군상의 출현이다. 그들은 기성세대와 대화하지 않으려 하며, 자신의 미래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는 게임 중독이 반드시 포르노 중독으로 연결된다는 사실과 관련이 깊다. 그들은 전자매체를 통해 이미 죽도록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벌써 ‘멋진 신세계’에 가 있는데 다른 어떤 세계가 부럽겠는가.

그렇다고 닐 포스트먼이 텔레비전을 끊거나 컴퓨터를 베란다 밖으로 던져버리자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미국의 한 지역에서는 전 주민이 텔레비전을 한 달간 끊은 일도 있었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그는 인쇄체제에 대한 맹신도도 아니다. 인쇄기가 그랜드캐년을 몇 번이나 채우고도 남을 만한 쓰레기를 생산해왔다는 점을 그는 알고 있다. 짜버린 치약처럼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그가 〈죽도록 즐기기〉란 책을 쓴 까닭은 모든 새로운 기술 체계는 교환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서로 똑같은 만큼은 아니지만 구체제와 신체제는 서로에게 주기도 하고 빼앗아가기도 한다. 그는 기술의 발전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빼앗아가는지 똑바로 쳐다보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스마트폰이 수천만 대 보급된다 해도 레바논 소녀가 계속 눈물을 흘린다면 무슨 대수겠는가.



* 책에 대해서는 처음 쓰는지라 글이 아직 틀이 잡히지 않고 엉성한데 과분하게 많은 칭찬 메일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계속 써볼 테니 격려해주십시오. 다음 주는 〈시사IN〉 식구 모두가 설 합병호를 내고 쉬는 관계로 저도 ‘배신’할 수 없어 한 주 거르겠습니다. 이제는 매주 올리는 걸 알겠으니 일일이 메일로 보내지 말고, 그냥 홈페이지에 올리라는 충고를 여러 분이 해주셨는데, 그 충고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늦어도 목요일 중에는 글을 올리도록 할 테니 계속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글을 다른 데 퍼가도 되느냐고 여러 분이 물으셨는데 상업적으로 이용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상관없습니다. 제게 보내주신 메일 내용 중에서는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이 해주셨다는 독서와 관련한 충고가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포르노를 보더라도 인쇄물로 읽어라.”
대단한 선생님이지 않습니까?  행복한 주말 보내시길….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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