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완 주(州)는 샤말리 평야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힌두쿠시 산맥, 서쪽으로는 파로파미사스 산맥이 만나고 있다. 주 면적 70%가 산악 지대다. 지세가 이렇다보니 역사적으로 파르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공격하는 쪽보다 수비하는 쪽이, 이방인보다 원주민 편이 유리한 결과를 낳았다. 유수의 제국이 이곳 파르완에 발을 들였다 쓴잔을 마셨다.

대표적인 사례는 1221년 몽골 제국이다. 이슬람을 무찌르며 승승장구 남하하던 몽골군은 파르완에서 호라즘 제국 황태자 술탄 잘랄 웃딘의 군대를 만났다. 쿠두크 장군이 이끄는 몽골군은 수적으로 우세하고 무장도 잘 돼 있었으나 지형을 잘 이용한 호라즘 군대에 패퇴하고 만다.
 

이는 칭기즈칸 생전 첫 번째 굴욕적 패배였다. 소식을 듣고 분노한 칭기즈칸은 직접 아프가니스탄으로 달려가 가즈니 등 남부 지역 주민을 무차별 보복 학살했다. 어린아이만 70만명을 죽였다는 설이 있다. 이 비극의 역사는 토착민 파슈툰족이 몽골군의 후예(로 알려진) 하자라족을 경멸하게 된 계기가 됐다. 파르완 3대 부족 중 하나인 하자라족은 생김새가 한국인과 비슷하다.
대영제국도 파르완 지역에 안 좋은 기억이 있다. 19세기 러시아 남하를 경계한 영국군은 183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는데(1차 영국·아프간 전쟁) 수도 카불을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파르완 일대를 넘어서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영국군은 1941년 카불을 잃고 1942년 아프간에서 철군한다.

반탈레반 북부동맹의 근거지

그 다음은 옛 소련 차례였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군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무자헤딘 게릴라에 시달렸다. 특히 전설적인 영웅 아마드 샤 마수드가 이끄는 무자헤딘은 근거지를 파르완으로 삼고 소련군을 괴롭혔다. 소련은 1989년 아프간에서 철군했다. 

파르완은 탈레반에게도 쉽게 정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1994년 아프간 남부에서 부흥한 신학생 그룹 탈레반은 카불을 점령하고 아프간 유일 정부를 자임했다. 하지만 2001년 미군이 침공하기 직전까지도 카불 코앞에 있는 파르완을 장악하지 못했다. 타지크족을 중심으로 반(反)탈레반 세력은 북부동맹을 결성했고 파르완은 북부동맹의 근거지였다. 

파르완 일대에는 폐허가 된 건물이 자주 눈에 뜨인다. 미군의 폭격을 맞은 곳도 있지만 상당수는 탈레반과 북부동맹 간의 내전 와중에 피해를 입은 경우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아프간에서 비정부기구(NGO) 활동을 해온 유정길씨는 “파르완 주에서는 탈레반과 북부동맹의 내전으로 죽은 민간인이 많다. 타지크족은 탈레반을 원수처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미군(NPS) 자료에 따르면 타지크 거주지역은 파르완 면적의 69%를 차지한다.

이런 반탈레반 정서는 정부가 파병 지역으로 파르완을 고른 이유가 됐다. 외교부 이용준 차관은 “파르완 지역에는 탈레반에 반대하는 타지크족과 하자라족이 많아 탈레반의 조직적 침투가 힘들다”라고 밝혔다.
2005년 반미 시위 사건 이후 파르완 타지크족 사이에서 반탈레반 정서가 약해졌다는 견해도 있다. 아프간 통신사 파지와크 뉴스의 사미 만시미크 기자는 “미군 입성 초기에는 타지크족이 탈레반에 반대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최근에는 부패한 카르자이 정부에 대한 실망으로 정부군·미군에 대한 반감이 커져가고 있다”라고 전했다.

기자명 신호철 기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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