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배출한 마을’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정운찬 총리 후보자가 태어난 곳인 충남 공주시 탄천면 덕지리 효도마을. 공주 시내에서도 20분쯤 차를 달려야 나오는, 137세대 298명이 사는 작은 시골마을이다. 축하 현수막 두어 개가 걸려 있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저걸 확 찢어버렸어야 했는데 지금까지 걸어뒀네 그려.” 마을회관에서 만난 임주옥씨(71)는 격한 말을 쏟아냈다. 그는 총리 지명 발표가 나던 날의 마을 풍경을 이렇게 회상했다. “3시에 내정 뉴스 뜨는 거 보고 만세 부르고 신나서 현수막까지 만들었는데, 6시 뉴스에서 첫마디 하는 거 보고 다들 에라이 했지. 아주 잘못 얘기한 거야 그건.” 총리 지명 소식에 환호했던 효도마을이지만, 정 후보자의 ‘지명 일성’인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 축소 시사 발언에는 고개를 저었다.
 

 

“3시에 만세 부르고 6시에 에라이 했다”

마을회관에 모여 있던 주민 10여 명도 한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순식간에 정 후보자 성토장이 됐다. “지금 이장 선거 나오면 열 표나 받을까 모르겠다” “고향 팔아 잇속 챙기는 것이, 옛날 김종필이랑 다른 게 뭐 있나” 따위 날 선 말이 곳곳에서 나왔다. 옹호하는 목소리라고 해봐야 “대통령이 시키니까 한 소리겠지” 정도였지만, 그나마도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그런 말을 왜 하나”라는 반박에 묻혀버렸다. 청와대가 야심차게 내놓은 ‘충청권 인물’ 정운찬 카드는, 세종시 문제와 엮이면서 충청권 전체는 고사하고 고향 마을에서조차 떨떠름한 반응을 샀다.

충청권에서 정 후보자의 세종시 발언 후폭풍이 심상찮다. 특히 세종시 유치가 예정돼 있어 이해관계가 직접 걸린 대전·충남 지역 여론은 ‘충청 총리 카드’의 약발이 안 받는다. 〈시사IN〉과 리얼미터가 대전·충남·충북 지역 유권자 2100명(지역별 7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정운찬 카드가 세종시 문제로 흉흉한 충청권 민심을 반전시키기에 역부족인 것으로 나타났다.

참신성과 통합의 메시지로 좌우 양쪽에서 긍정 평가가 많은 이번 총리 인사지만, 충청권에서만은 평가가 박했다. 대전 지역 응답자의 36.0%가 총리 지명을 ‘잘못된 인사’라고 평했다(〈표 1〉). ‘잘된 인사’라고 답한 비율 39.4%와 불과 3.4%포인트 차이다. 충남에서도 응답자의 35.4%가 잘못된 인사라고 답해, 잘된 인사라는 응답(41.3%)과 5.9%포인트 차이에 그쳤다. 지역 출신 인물이 기용된 인사에 대한 평가로는 이례적이다. 정 후보자는 고향인 충남보다도 충북 지역에서 오히려 후한 평가를 받았다(긍정 평가 44.6%, 부정 평가 32.5%). 정 후보자의 출신 지역에 관계없이, 세종시에 거는 기대가 큰 지역일수록 평가가 나빴다는 얘기다.

충청 지역의 대표 정치인을 꼽아달라는 질문에도 정 후보자를 거론하는 응답은 드물었다. 대전에서 3.5%, 충남에서 4.7%, 충북에서 4.1%만이 정 후보자를 대표 정치인으로 꼽았다(〈표 2〉). 자유선진당을 탈당한 심대평 전 대표와 이회창 선진당 총재는 물론 정치인으로 분류하기 애매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도 크게 뒤지고, 지역색이 옅은 이해찬 전 총리와 비슷한 수준이다.

 

 

충청권이라는 지역 기반을 바탕으로 단숨에 유력 대선주자로 뛰어올랐다는 중앙 정치권의 평가가 무색해지는 결과다. 수도권 여론 주도층에서는 나름 자리잡은 ‘정운찬 브랜드’이지만, 정작 고향에서는 이름조차 입에 붙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공주·연기 일대에서는 “이번 총리 지명과 세종시 발언을 계기로 정운찬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라는 시민이 다수였다. 충남 연기군에서 40년째 택시를 몰았다는 김형수씨(67)는 “고향 사람이라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 우리는 모르던 사람이다. 손님 중에도 총리 후보자 얘기하는 사람을 못 봤다”라고 지역 분위기를 전했다. 정 후보자의 고향인 공주시에서 만난 한 시민은 기자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그 사람 농수산부 장관 하다가 쇠고기 수입협상 때문에 쫓겨난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을 왜 총리로 쓰는지 모르겠다.” 고향 시민이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과 혼동할 정도로, 정 후보자의 ‘존재감’은 약했다. 

인지도가 낮았던 정 후보자의 취임 일성이 하필 세종시 축소 시사였으니 문제가 더 꼬였다. 지역 기반도 부실한 정치인의 ‘첫인상’이 단단히 틀어진 셈이다. 대전 지역 응답자의 54.1%, 충남의 51.5%, 충북의 47.3%가 세종시를 원안대로 추진해야 한다고 답했다(〈표 3〉). 원안보다 축소가 가능하다는 응답은 각각 23.1%, 15.6%, 20.1%였다. 정 후보자의 상황 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전문수축하 현수막은 걸렸다. 하지만 분위기는 착잡하다. 정운찬 후보자의 고향인 충남 공주시 탄천면 풍경.

최대 인구 50만명이 신규 유입될 것으로 예측되는 세종시 건설은 인근 주민에게는 사활이 걸린 사업이다. 연기군 중심가인 조치원역 일대에는 벌써부터 이름을 ‘세종’으로 바꾼 가게와 교회 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자칫하면 간판 값도 안 나오게 생겼다. 인지도도 높지 않던 인물이 갑자기 등장해 지역 최대 현안에 초를 친 모양새다. 충남에서 활동하는 야권의 한 정치인은 “집 나갔던 아들이 수십 년 만에 돌아와 대뜸 돈부터 달라는 꼴이다. 나중에야 그래도 아들이라고 마음이 풀어질지 모르지만, 당장은 곱게 보일 리가 있겠나”라고 되물었다.

“그 사람 농수산부 장관 하던 사람 아닌가?”

화살은 정 후보자에게만 쏠리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도 함께 도마 위에 올랐다. 연기군에 사는 임현욱씨(57)는 “MB가 충청도를 갖고 논다. 대선 때부터 반드시 하겠다고 해놓고, 결국 하기 싫으니까 충청도 사람을 총리로 앉혀서 무마하려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택시기사 정진섭씨(54)는 기자가 세종시 얘기를 꺼내자 대뜸 화부터 냈다. “말도 꺼내지 마라. 우리가 그거 없으면 못 사는 거지인가? 우리도 필요없다 그래. 안 하고 싶으면 대통령이 직접 못하겠다 말하면 되지 무슨 꼼수가 그리 많은지.”

 

 

 

 

세종시 관련 활동을 활발히 해온 행정중심복합도시 주민생계조합의 정경훈 실장은 “정부와 여당 간에 역할 분담이 끝났을 걸로 본다. 선거를 치러야 하는 여당은 충청권 민심을 고려해 한발 물러서 있고, 정부에서는 충청권 총리를 내세워 정면 돌파를 시도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정 후보자의 발언에 대해 한나라당이 비판하는 것도 그런 조율이 된 결과로 본다”라고 말했다. 결국 핵심은 총리가 누구냐가 아니라 세종시를 축소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라는 얘기다. 실제로 대규모 행정부처 이전 대신 1개 부처, 대기업 본사, 주요 대학의 1개 단과대를 옮기는 대안을 모색한다는 얘기가 유력하게 떠돌기도 했다.

중앙 및 현지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심대평 총리설이 나올 때부터 “세종시와 ‘교환조건’ 아니냐”라는 관측이 유력하게 돌았다. 지역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심대평 총리설이 나오면서 지역 기자들은 세종시 원안 추진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심대평 전 대표의 탈당 파동을 겪은 자유선진당의 한 의원도 “당내에서 그런 관측이 많아 반대 기류가 셌다. 심대평 카드와 정운찬 카드는 사실상 용도가 같은 셈이다”라고 말했다. 지역 여론은 MB의 충청권 총리 카드를 ‘충청권 포용 노력’이라기보다는 ‘세종시 축소를 위한 포석’으로 의심한다는 얘기다. 이 경우 일종의 ‘낚싯밥’ 격인 정 후보자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전문수충남 연기·공주 지역에는 현수막이 넘친다. 세종시가 지역의 사활을 건 이슈이기 때문이다.

“경상도나 전라도였다면, 민란이 나도 몇 번은 났을 거다.” 야권의 한 충청 지역 기초의원은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른바 ‘홀대론’이다. 지역민에게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도 “멍청도”니 “여기는 대가 약해서 안 된다”니 하는 자조적인 한탄이다. 확실한 ‘비빌 언덕’이 없어서 충청도가 홀대를 받는다는 감수성은 충청권 유권자의 바탕 정서다. 자민련과 자유선진당이라는 두 번의 ‘지역 정당 실험’은 그에 따른 귀결이었다.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지역민들의 정서는 “우리 지역당은 밀어줘봐야 안 되더라”와 “힘이 없어서 그러니 똘똘 뭉쳐 밀어줘야 한다”로 갈린다. 민주당과 선진당은 각각 전자와 후자의 정서를 확산시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다. 두 당 모두 9월9일에 지도부가 총출동해 세종시 건설 현장을 방문하는 등 충청권 공략에 발벗고 나섰다. 결과는 미지수이지만, 정 후보자가 성급한 발언으로 파고들 ‘빈틈’을 보여준 것만은 틀림없다.

정운찬이 충청도의 ‘비빌 언덕’ 될까

변수는 있다. “총리 전문 지역”이라고 자조할 정도로 어느 정권에서나 ‘2인자’를 배출하는 것이 한계였던 충청권이니만큼, 정 후보자가 유력한 대선주자로 몸집 불리기에 성공한다면, 첫인상이야 어쨌든 여론의 쏠림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지 않다. 대권주자보다 더 확실한 ‘비빌 언덕’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수세종시 건설 현황을 보고받는 민주당 대표단.

정 후보자의 고향 덕지리 효도마을. 기자를 앞에 두고 한참 정 후보자 비판에 열을 올리던 임주옥씨는 취재가 끝날 때가 되자 “내가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더 큰일 해야 할 양반이 초장부터 헛발질을 하는 게 안타깝고 분하고 해서…”라며 말을 흐렸다. 주민들의 성토를 듣고만 있던 마을 노인회장 심규철씨(78)는 조용히 기자를 붙잡고 “인사청문회인가 하는 게 남았다던데, 그거 끝나면 투표해서 통과해야 하는 거요?”라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 지역 정치인의 말대로 정 후보자가 ‘집 나갔다 한참 만에 돌아와 손부터 벌리는 망나니 아들’이라고 한다면, 부모 마음이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전문수세종시 건설 현장에는 건물이 없다. 총리공관을 제외하곤 지반 공사만 진행 중이다. 정부가 ‘역진 불가능한’ 건물 공사를 미룬다는 게 지역 정치권의 의심이다.

 

 

기자명 공주·연기·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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