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그룹 라이즈가 9월4일 첫 싱글앨범 ‘겟 어 기타’ 발매 기념 기자간담회 무대에 섰다. ⓒ연합뉴스
지난해 그룹 라이즈가 9월4일 첫 싱글앨범 ‘겟 어 기타’ 발매 기념 기자간담회 무대에 섰다. ⓒ연합뉴스

요즘 케이팝을 이야기하며 어딘가 허전한 기분이 든다면, 아마 십중팔구 ‘세계관’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2024년 케이팝에는 그동안 케이팝의 핵심이자 원천기술, 필수 불가결한 요소처럼 여겨지던 세계관이 사라졌다. 올해 상반기 차트에서 인기를 끈 케이팝 면면을 보자. 지난해 연말 분위기를 타고 차트를 거슬러 오른 르세라핌의 ‘퍼펙트 나이트(Perfect Night)’는 이들의 첫 영어 싱글이자, 복잡한 메시지를 내세우지 않은 편안한 팝 넘버였다. 지난 1월5일 발매된 신인 보이 그룹 라이즈(RIIZE)의 ‘러브 119(Love 119)’는 한국을 대표하는 노래방 애창곡 가운데 하나인 밴드 이지(izi)의 ‘응급실’을 샘플링해 세대를 막론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했다. 이 외에도 새해 들어 발표된 수많은 앨범과 노래 가운데 세계관을 앞세운 작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마치 세계관의 소멸 같았다.

세계관은 한때 케이팝의 ‘얼굴마담’이었다. 강력한 팬덤을 모으는 데도, 나는 도무지 모를 케이팝의 세계적 인기를 납득시키는 데도 유용했다. 세계관은 그룹 전체의 서사를 감싸안는 건 물론 앨범과 곡 단위로 세분화되어 케이팝을 듣고 보는 재미의 폭을 넓혔다. 세계관은 일종의 미끼상품이기도 했다. 독특한 세계관으로 그룹에 호기심이 생긴 이가 음악을 듣고 팬이 되기도 하고, 음악과 퍼포먼스만 좋아하던 이가 세계관을 파다 보니 어느새 코어 팬이 되어버렸다는 훈훈한 미담이 이어졌다. 끝까지 케이팝 인기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이들을 설득한 효자상품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공들여 빚은 서사를 바탕으로 한 세계관은 비단 케이팝만의 것이 아니었다. 문학에서 영화까지, 인류가 사랑한 예술 곳곳에 스며 있는 것이 세계관이다.

현실을 발아래 둔 요즘 아이돌

이러한 세계관의 보편성을 바탕으로 어렵게 다수의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사실 케이팝의 세계관은 여타 장르의 세계관과는 다소 다른 양상을 띠었다. 케이팝 세계관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세계관 자리에 ‘콘셉트’를 넣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즉 케이팝의 세계관은 엄밀히 말해 작품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주된 생각이나 주제, 콘셉트였다.

케이팝 세계관의 성공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BTS의 ‘청춘 2부작’이나 여자친구의 ‘학교 3부작’으로 예를 들어보자. 두 그룹은 각각 청춘과 학교라는 키워드로 여러 장의 앨범과 타이틀곡, 그에 따른 뮤직비디오 및 관련 영상을 발표했다. 그들은 기획사에서 공들여 만든 세계관 속 주요 오브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들 스스로 하나씩 벽돌을 놓아 세계관이라는 집을 짓는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세계관은 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는 놀이터인 동시에 두 손에 쥐고 마음껏 놀 수 있는 장난감이기도 했다. BTS는 결국 ‘화양연화’를 앞세운 ‘청춘 2부작’을 거치며 성장한 멤버 7인의 진짜 청춘을 통해 지금까지 그 어떤 가상의 세계관도 이룩하지 못한 거대하고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해냈다. 아무리 촘촘하게 구성한 세계관도 이들이 직접 몸으로 현실과 부딪쳐 만든 무수한 최초와 최고 앞에선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직접적 질문을 앞세운 곡 ‘아이돌(IDOL)’을 타이틀로 한 앨범 〈러브 유어셀프 결 ‘앤서’(LOVE YOURSELF 結 ‘Answer’)〉(2018)가 대표적 결과물이었다. 현실의 세계관이 가상의 세계관을 집어삼킨 셈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의 결과일까. 이제 막 데뷔했거나 활발하게 활동 중인 케이팝 가수 대부분은 거창한 세계관을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급부의 가치가 눈에 띈다. 인기 신인 보이 그룹 두 팀의 사례를 보자. SM엔터테인먼트가 NCT 이후 7년 만에 선보인 보이 그룹 라이즈를 상징하는 두 가지 캐치프레이즈는 ‘리얼타임 오디세이’와 ‘이모셔널 팝’이다. 각각 ‘성장사’와 ‘감성적인 팝’을 뜻하는 두 단어가 지향하는 건 바로 지금 눈앞에 놓인 사람과 감정에 대한 집중이다. 세븐틴 이후 9년 만의 신인으로 화제를 모은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의 보이 그룹 투어스(TWS)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내세운 장르는 ‘보이후드 팝’. 소년 시절의 긴장과 설렘을 담은 이들의 목소리는 데뷔곡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를 통해 충실히 구현되었고 음원 성적도 호조를 보인다.

지난해 7월5일 그룹 키스오브라이프가 예스24라이브홀에서 타이틀곡 ‘쉿’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연합뉴스
지난해 7월5일 그룹 키스오브라이프가 예스24라이브홀에서 타이틀곡 ‘쉿’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연합뉴스

걸그룹의 경우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결이 다르다. 보이 그룹이 감성 또는 소년 시절이라는 명확한 키워드를 바탕으로 한 콘셉트를 그려낼 때, 걸 그룹은 멤버들의 실질적 능력과 서사에 집중한다. 지난해 데뷔한 걸 그룹 키스오브라이프(KISS OF LIFE)는 데뷔 앨범부터 멤버 네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솔로곡과 뮤직비디오로 주목받았다. 가상의 스토리이지만 해당 곡의 주인공인 멤버들의 개성과 실제 삶의 여정을 녹여낸 촘촘한 스토리텔링이 케이팝 마니아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이끌었다. 이 분야의 선배라면 단연 르세라핌이다. 그룹 이름 탄생의 배경이자 2022년 발표한 데뷔곡의 제목이기도 한 ‘아임 피어리스(IM FEARLESS)’,즉 ‘두려움이 없다’라는 메시지는 지금까지도 그룹의 콘셉트와 이미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메시지가 데뷔 전 멤버들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도출된 것이라는 점도 가상이 아닌 현실을 발아래 둔 요즘 케이팝을 설명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케이팝에 세계관이 사라진 자리에 직관적이고 심플한 콘셉트와 실재를 바탕으로 한 서사가 남았다. 이러한 흐름이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최근 수년 사이 케이팝계에서 부쩍 비중을 높인 쉽고 편한 팝에 대한 니즈 덕분이다. 그 욕구 속에는 한동안 줄곧 ‘더 세게’만을 외치던 강한 케이팝 유행에 대한 반작용도, BTS ‘다이너마이트(Dynamite)’, 피프티피프티 ‘큐피드(CUPID)’, 뉴진스 ‘디토(Ditto)’, 정국 ‘세븐(Seven)’ 같은 국내외를 사로잡은 케이팝 히트곡의 면면도 녹아 있다. 두꺼운 겉옷을 벗어던진 서사가 케이팝 안에 가벼운 모양으로 다시 자리를 잡았다. 이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아직 미지수다.

기자명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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