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9일 가수 지드래곤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막한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CES 2024)에서 SK 부스를 방문해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1월9일 가수 지드래곤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막한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CES 2024)에서 SK 부스를 방문해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 'CES 2024(CES)’가 개막한 1월9일. 올해 CES에서 기조연설자로 선정된 HD현대의 정기선 부회장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누군가를 기다렸다. 가수 지드래곤(GD·본명 권지용)이었다. 지드래곤이 등장하자 주변에 있던 한국인들은 물론 젊은 외국 참관객들이 몰려들어 휴대전화를 일제히 꺼냈다. 지드래곤이 삼성전자와 LG전자, SK, HD현대, 롯데정보통신 등 국내 부스를 차례로 돌 때마다 대기업 관계자들은 마치 그룹 총수를 모시는 것 이상으로 극진히 안내했다.

지드래곤은 삼성전자의 AI 컴패니언(동반자) 로봇 '볼리'를 체험하고 LG전자의 미래 모빌리티 콘셉트카 'LG 알파블'에 직접 탑승해 체험하기도 했다. SK 부스에서는 AI 기술을 적용해 타로카드 점을 봐주는 'AI 포춘텔러'에서 얼굴 사진을 찍고 ‘사랑꾼(The LOVERS)’이라는 카드를 뽑고 환히 웃었다. 지드래곤은 지난해 12월, AI·메타버스 등을 다루는 갤럭시코퍼레이션과 전속계약을 맺은 뒤 소속사와 동행하는 방식으로 현장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10년째 CES 현장을 거의 빠짐없이 찾은 필자에게 올해 CES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을 꼽으라고 하면 주저 없이, 지드래곤을 쌍수 들어 맞이하는 국내 대기업 젊은 오너들의 모습이다.

올해 CES의 공식 주제는 ‘모두를 위한, 모든 기술의 활성화(All Together, All On)’다. AI·지속가능성·스타트업·디지털 헬스·모빌리티 등 주요 카테고리를 중심으로 영역 파괴가 이뤄지는 격변의 글로벌 기업 환경에서 ‘미래 먹거리’를 찾으려는 절박감은 차세대 주역인 젊은 오너들의 CES 방문으로 이어졌다. CES를 이끌고 있는 게리 샤피로 CTA(전미 소비자기술협회) 회장은 개막에 앞서 1월7일 진행한 미디어데이에서 “AI 기술이 모빌리티, 인프라, 스마트홈 등 모든 산업 영역에서 혁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CES 2024는 비즈니스 리더들이 만나고, 꿈꾸고, 해결하는 허브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CES 2024에서는 CES 역사상 최초로 화장품 제조사 로레알 그룹 연구 및 기술 담당 부사장 바바라 라베르노가 개막식 기조연설을 했다. ⓒREUTERS
CES 2024에서는 CES 역사상 최초로 화장품 제조사 로레알 그룹 연구 및 기술 담당 부사장 바바라 라베르노가 개막식 기조연설을 했다. ⓒREUTERS

이를 반영하듯 올해 CES 2024에서는 CES 역사상 최초로 세계적 화장품 제조사 로레알 그룹의 CEO 니콜라 이에로니무스가 기조연설자로 나섰다. CES가 개막식 최초 키노트 연설자로 누구를 선정하느냐는 이미 수년째 상징적 장면으로 회자돼왔다. 지난해에는 농기계 회사 존디어의 CEO 존 메이가 기조연설자로 나서, 180여 년 전 쟁기를 만들던 회사가 자율주행 트랙터를 제조해 어떻게 변화와 혁신을 이끌었는지 연설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코로나와 오미크론이 한창이던 2022년 CES에서는 헬스케어 기업으로는 최초로 애보트의 로버트 포드 회장 겸 최고경영자가 기조연설을 했다.

국내 수상 기업 86%가 벤처·창업 기업

올해 ‘영광의 자리’는 로레알이 차지했다. 로레알은 지난 10년간 CES에 꾸준히 참가하며 아홉 번이나 CES 혁신상을 수상할 정도로 ‘뷰티’와 ‘테크’ 융합 트렌드를 선도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날 생성형 AI 챗봇 ‘로레알 뷰티 지니어스’·합타(HAPTA)·컬러소닉·워터세이버 등 다양한 로레알 그룹의 뷰티 테크 사례와 함께 CES 2024 혁신상을 받은 차세대 헤어드라이어 에어라이트 프로(AirLight Pro)를 공개했다. 에어라이트 프로는 드론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이 설립한 하드웨어 스타트업 ‘주비(Zuvi)’와 협력해 제작한 제품이다. 누구나 사용하는 흔한 헤어드라이어이지만 사용자의 모발 유형에 최적화된 열 흐름으로 모발을 더 빠르게 건조하여 에너지 소비를 최대 31% 절감한다. AI와 테크가 결합하여 사용자 특성과 니즈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CES가 표방하는 환경보호와 지속가능성에 부합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올해 CES의 공식 주제는 ‘모두를 위한, 모든 기술의 활성화(All Together, All On)’다. AI 기술을 통해 미래 비전을 제시한 대다수 기업들이 혁신상을 수상했다. ⓒAFP PHOTO
올해 CES의 공식 주제는 ‘모두를 위한, 모든 기술의 활성화(All Together, All On)’다. AI 기술을 통해 미래 비전을 제시한 대다수 기업들이 혁신상을 수상했다. ⓒAFP PHOTO

전 세계 150여 개 국가, 4120개 이상의 기업이 참가한 CES 2024에서 지난해 대비 40% 이상 늘어난 3000여 개 혁신상(CES Innovation Awards) 출품작 중 수상작들은 거의 대부분이 AI 기술을 통해 미래 비전을 제시한 제품들이었다. 인공지능(AI), 디지털 헬스, 스마트시티, 로봇공학 등 29개 카테고리의 제품들이 최고혁신상 36개와 혁신상 522개를 수상했다. 한국의 국내 벤처·창업 기업들의 성과도 대단했다. 삼성전자, LG, SK 등 국내 기업 134개사, 158개 제품이 혁신상을 차지하며 글로벌 국가들 사이에서 기술적 위상을 확인했다. 국내 수상 기업 중 86.6%를 국내 벤처·창업 기업 116개사가 차지하기도 했다.

창업 3년째를 맞은 신생기업 ‘딥비전스(대표 강봉수)’는 디지털 영상 기반 AI 미세먼지 농도 측정 솔루션인 '비전플러스'로 혁신상을 받았다. 비전플러스는 설치된 CCTV 또는 폐휴대폰을 재활용해 영상 데이터를 확보하고, AI 딥러닝을 통해 미세먼지 농도를 측정하는 인공지능 딥러닝 기술이다.

딥비전스는 정부나 지자체가 대당 1억원이 넘는 소수의 측정 장비에 의존하던 미세먼지 정보 취득 방식을 크게 개선하고 세금 낭비를 많이 줄일 수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비전플러스를 통하면 실시간으로 골목길까지도 미세먼지 정보 제공이 가능한 입체적인 미세먼지 지도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서울 성동구청에서 사용하면서 획기적인 효과를 보고 있다고 한다.

‘지크립토(대표 오현옥)’는 블록체인 기반의 투표 시스템인 '지케이보팅 폴 스테이션'으로 2년 연속 CES 최고혁신상을 수상했다. 지크립토는 투명하고 공정한 투표 시스템을 통해서 사회 혼란과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역시 최고혁신상을 수상한 ‘로드시스템(대표 장양호)’은 블록체인과 서버 보안, 암호화 기술 9가지를 적용한 세계 최초 모바일 여권 앱 ‘트립패스’를 개발했다. 지크립토와 트립패스 모두 CES로부터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인정받았다.

대학들의 변신도 놀랍다. 서울대와 포스텍,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를 비롯한 국내 대학들의 CES 참가가 두드러진 가운데 전북대 송철규(연구부총장) 연구팀이 ‘실시간 혈전 탐지 디지털 이미징 장치’로 CES 2024 디지털 헬스 부문 혁신상을 수상했다. 혈관 내 혈전을 탐지하는 기존 이미징 장치는 암실에서만 기능이 작동하지만, 해당 장치는 자외선 필터를 활용해 일상적인 광원이 있기만 하면 혈전을 정확히 이미징할 수 있다고 한다. 수술 및 진료 환경에서 사용 편의성을 제고하고 첨단 바이오 분야 발전의 촉진제 노릇을 하는 획기적인 장치로 평가받았다.

창업 3년째를 맞은 신생기업 딥비전스는 디지털 영상 기반 AI 미세먼지 농도 측정 솔루션인 '비전플러스'로 혁신상을 받았다.  ⓒ민경중 제공
창업 3년째를 맞은 신생기업 딥비전스는 디지털 영상 기반 AI 미세먼지 농도 측정 솔루션인 '비전플러스'로 혁신상을 받았다. ⓒ민경중 제공

챗지피티(chatGPT)로 상징되는 생성형 AI가 가져올 혁신은 스마트 가전·자율주행차·모빌리티·미디어 장치·반려동물·쇼핑·금융·총기 감지 보안장치 등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 녹아들었다. 최고혁신상을 받은 독일 보쉬(Bosch)의 ‘총기 감지 시스템(Gun Detection System)’도 생성형 AI 기술을 이용한 제품이다. 얼핏 일반 CCTV처럼 보이지만 영상과 음향을 분석하는 AI를 적용해 총기 사고 징후를 미리 포착한다. 만약 총기 소지자가 학교에 난입하면 이를 감지해서 보안 담당자에게 알려 빠른 사전 조치가 가능하게 한다. 만약 영상에 총기가 포착되지 않더라도 총성이 들리면 이를 분석해 총기 위치를 파악하고 제압과 구조활동을 돕는다.

현대차와 삼성전자의 ‘적과의 동침’

네덜란드 스타트업 세비(Sevvy)가 내놓은 ‘스마트 쿠커(Smart Cooker)’도 흥미롭다. 바스켓형 에어프라이어처럼 생겼지만 에어프라이어도, 오븐도, 전자레인지도 아니다. 스마트 쿠커는 식품에 직접 전류를 흘렸을 때 발생하는 저항으로 음식을 가열한다. 식품가공산업에서 식품 조리나 살균에 활용하는 가열 방식을 가정용 제품에 차용해 산업용 조리기구가 가정 주방에까지 진출하도록 했다. 이 방식을 활용하면 식품 전체를 고르게 가열할 수 있어 비교적 저온으로도 빠르게 조리가 가능해 에너지 효율이 높다. 부스에서 만난 세비 관계자는 “AI를 이용해 수없이 많은 설계를 거쳐 신제품이 탄생했다”라고 설명했다.

모빌리티 분야에서는 영원한 맞수인 현대차와 삼성전자가 CES 2024 현장에서 손을 맞잡은 것도 상징적 장면 중 하나였다. 현대차그룹 글로벌 소프트웨어 센터인 포티투닷과 삼성전자는 AI 기반 SDV(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 플랫폼 개발 등에 대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포티투닷은 삼성전자의 전장용 프로세서 '엑시노스 오토'를 활용해 SDV 플랫폼을 개발하고, 삼성전자는 최신 SoC(기술집약적 시스템 반도체)를 적용한 엑시노스 개발 플랫폼을 제공한다.

포티투닷이 공급받는 삼성전자 엑시노스 오토 프로세서는 최신 전장(차량용 전자부품)용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 등을 탑재한 첨단 전장용 반도체다. 운전자에게 실시간 운행 정보를 제공하고 고화질 지도와 영상 스트리밍 기능을 제공할 수 있다. 산업의 경계가 무너져서 전혀 다른 경쟁 상대가 생기는 시대에 ‘적과의 동침’ 정도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그림이 됐다. 이 역시 CES를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CES 2024 참가자가 대화형 AI를 탑재한 휴머노이드 로봇을 촬영하고 있다. ⓒAFP PHOTO
CES 2024 참가자가 대화형 AI를 탑재한 휴머노이드 로봇을 촬영하고 있다. ⓒAFP PHOTO

CES 현장에서 미국과 중국 다음으로 세 번째로 많이 참가한 한국 기업들의 혁신과 도전 정신은 분명 놀랍고도 신선했다. 한국의 기술혁신이 피크에 이르러 정체가 이어질 거라는 자조 섞인 우려들이 나오는 상황에서 올해 CES에서 생존을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하는 대기업과 중소 벤처기업인들을 확인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일부 정부 기관이나 지자체의 예산 지원으로 참가한 공동 전시관이 지원기관과 지자체 명칭을 부각시키며 전시관 규모를 크게 만든 반면 참가 업체들은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보여 실질적인 비즈니스가 이뤄지지 못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소위 지원기관 VIP들의 의전에만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 해마다 반복되고 여전히 개선되지 못하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라 프렌치 테크’ 프랑스관은 뛰어난 디자인과 독특한 창의적 기술로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민경중 제공
‘라 프렌치 테크’ 프랑스관은 뛰어난 디자인과 독특한 창의적 기술로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민경중 제공

CES 현장에서 가장 인기를 독차지하는 ‘라 프렌치 테크’ 프랑스관은 부스는 작지만 해마다 ‘CES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유레카관(스타트업, 벤처관) 첫 출입구 자리에 위치해 뛰어난 디자인과 독특한 창의적 기술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벤치마킹해야 할 대목이다. 또 상대적으로 최근 몇 년간 혁신이 멈춘 것 아니냐는 평가를 받았던 일본관은 올해는 ‘저팬 스타트업관’ ‘저팬 테크관’에서 서툰 영어이지만 열정적으로 설명하며 단 한 명의 바이어라도 붙잡으려 했다. 노력과 열정이 돋보였다.

CES 2024는 1월12일 막을 내렸지만 이미 CES 2025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새로운 분야의 산업이 탄생부터 확산까지 불과 서너 달도 채 걸리지 않는 상황에서 1년이라는 시간은 기업들에게는 끝나지 않는 혁신을 준비하는 시간처럼 느껴질 것이다.

기자명 민경중 (한국외대 초빙교수·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