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진과 인터뷰하는 지윤 양(가명)의 뒷모습이 액자 속 거울에 담겼다. 15세 지윤 양은 아픈 어머니와 동생을 돌보는 가족돌봄 아동이다. ⓒ시사IN 조남진
취재진과 인터뷰하는 지윤 양(가명)의 뒷모습이 액자 속 거울에 담겼다. 15세 지윤 양은 아픈 어머니와 동생을 돌보는 가족돌봄 아동이다. ⓒ시사IN 조남진

※기사에 등장하는 아동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열 살 하은이는 김밥을 쌀 줄 안다. 학교 현장체험학습(소풍) 도시락을 스스로 챙겨왔다. 장애를 가진 엄마와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아빠를 돌보느라 그 나이에 벌써 청소·빨래·요리에 능해졌다. 여덟 살 미소는 아침마다 오빠(14)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등교한다. 오빠는 중증 지체장애인이고 부모는 모두 지적장애를 앓고 있다. 오빠에게 배정된 장애인 활동지원사가 갑자기 일을 그만둘 때마다 미소는 학교를 결석해야 했다. 민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3이 된 지금까지 언어·청각장애인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혼자 돌보고 있다. 집안일은 물론이고 아버지가 은행, 관공서, 병원을 들를 때마다 동행해 의사소통과 통역을 돕고 있다. 가족을 돌보느라 자기 자신에게는 시간과 에너지를 거의 쓰지 못한다.

하은, 미소, 민수와 같은 아이들을 외국에서는 ‘영케어러(young carer)’라고 부른다. 신체적·정신적 질병이나 장애를 지닌 가족 구성원을 돌보는 아동·청소년·청년을 아우르는 말이다. ‘숨겨진 집단(hidden army)’ ‘비공식 간병인(informal carer)’ ‘잊혀진 최전선(forgotten front line)’으로도 비유된다. 1980년대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이들에 대한 실태조사와 연구가 시작되었다. 지금은 영국·오스트레일리아·스웨덴·독일·이탈리아·미국·일본 등 많은 국가에서 영케어러 지원 근거를 만들어 정책들을 시행하고 있다. 각국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나라마다 대략 청소년 인구의 5~8%가 영케어러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는 이런 아이들을 그저 ‘효자 효녀’ 혹은 ‘소년소녀가장’ 정도로 불러왔다. 그리 놀랍거나 생소한 존재는 아니다. KBS 〈동행〉 같은 유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만 떠올려보아도, 병든 부모와 조부모를 간호하며 동생 밥 차려주고 머리 묶어주고 등하교시켜주는 ‘장하고 대견하고 짠한’ 아이들의 삶을 우리 사회는 꽤 익숙하게 목격해왔다.

하지만 이들은 한 번도 공식적으로 호명된 적이 없다. 국가와 지자체에서 이 아이들을 부르는 법적·정책적 이름도, 지원의 틀도 없다. 제대로 된 실태조사를 한 적이 없어서 이런 아이들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공식적 통계조차 없다. 몇 년 전부터 ‘영케어러’라는 명칭이 국내에도 소개되었지만 가족을 돌보는 20~30대 청년을 일컫는 말로 굳어져버렸다. 영케어러 정책은 ‘청년정책’으로만 한정되어서 10대 이하 아동은 거기 낄 자리가 없게 되었다. 가족돌봄 ‘청년’을 위한 정책은 쏟아지는데 가족돌봄 ‘아동’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같은 자리에 머물렀다.

사실 ‘영케어러’ ‘가족돌봄 아동’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긴 하다. 아동·청소년은 돌봄의 대상이지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동이 돌봄 행위에 매진한다는 건 그 자체로 아동 권리의 침해다. 아동 권리 측면에서 가족돌봄 아동, 아동 영케어러는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이다. 하지만 이는 이론적이고 이상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가정 내에서 돌봄받는 대신 ‘돌보는’ 아동·청소년이 다수 존재하고 있다. 사회적 관심과 정책의 부재 속에서 이들은 가족돌봄의 고통과 부담을 혼자 오롯이 짊어지고 있다.

“네가 아픈 엄마 잘 돌봐야지”

가족돌봄 아동이 관리하는 부엌 냉장고의 약병들. ⓒ시사IN 이명익
가족돌봄 아동이 관리하는 부엌 냉장고의 약병들. ⓒ시사IN 이명익

아픈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사는 열다섯 살 지윤이도 그런 경우다. 올해 중3이 된 지윤이는 며칠 전에도 새벽에 응급실을 다녀왔다. 심한 신경성 흉통을 호소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응급실에서 밤을 꼬박 지새웠다. 기억나는 횟수만 벌써 30번째다. 아침이 밝아서야 집에 돌아오면 곧장 이불 위로 쓰러지기 일쑤다. 학생부가 지각·결석·조퇴로 얼룩진 지 오래다. 학교에 있을 때도 친구와 놀 때도 언제 집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연락이 올지 몰라 늘 초조하고 긴장된다. 스트레스성 두통과 위염으로 잘 먹지 못하거나 한꺼번에 몰아서 먹고, 먹고 나면 자주 토한다. 좀 더 어릴 때는 그래도 누가 꿈을 물어보면 ‘바리스타’라고 답했다. 지금은 장래희망을 적는 난에 ‘없음’이라고 적는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지 묻자 지윤이는 답했다. “주변에서 다 그래야 한다고 하니까요. 친척들 만나면 모두 그러세요. ‘네가 엄마 잘 돌봐야 한다’.”

지윤이 같은 상황에 놓인 아동·청소년은 얼마나 있을까? 정확히 조사·집계된 바가 없어서 관련된 몇 가지 통계들을 바탕으로 어렴풋이 짐작만 해볼 수 있다. 2018년 아동종합실태조사에서 ‘집안일 돕기’에 하루 3시간 이상을 쓴다고 답한 만 18세 미만 아동의 비율이 3.5%였다. 지난 한 해 ‘가사’를 이유로 학업을 중단한 고등학생이 전국에서 115명이다(2023년 교육통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재단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은 아동·청소년 149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46%가 가족돌봄 아동·청소년이었다. 그중 23%가 초등학생이고 28.3%가 5년 이상 장기 돌봄 상황이었다. 청소년 인구의 대략 5~8%가 영케어러라는 해외 연구 사례들을 바탕으로, 한국이 그 나라들보다 상황이 결코 낫지 않다는 전제하에 단순 대입해보면, 국내 10~19세 청소년(2022년 해당 연령 인구 총 460만8479명)으로만 범위를 좁혀도 약 23만~36만9000여 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최근 들어 영케어러 정책이 많이 생겼다. 2021년 발생한 22세 청년의 ‘간병 살인’ 비극이 계기가 되어 영케어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보건복지부는 이듬해 4월부터 관련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서울, 대전, 광주, 대구, 서울 서대문구, 경기 광명, 충북 괴산, 전남 나주, 경남 김해 등 지자체 단위에서도 조례를 만들거나 영케어러의 가족돌봄 부담을 나누는 지원책들을 하나둘씩 내놓고 있다.

그런데 정부와 지자체에서 정의하는 영케어러는 주로 20~30대 ‘청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조금 더 넓혀봤자 10대 중후반까지만 지원 대상 연령으로 포함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더 어린 연령의 아동까지 포괄하기 위해 ‘24세 이하(서울 광진구)’ ‘34세 이하(경기도·광주광역시)’ 등으로 연령 하한을 없앤 곳은 일부에 그친다. 조례 명칭도 대부분 ‘가족돌봄청년 지원에 관한 조례’이고 보건복지부가 올해 4월 결과를 발표한 실태조사 명칭도 가족돌봄청년 실태조사다. 조사 대상자 4만3832명 중 13~18세 청소년은 722명에 불과했다. 13세 미만 연령의 어린이는 아예 포함되지 않았다. 보건복지부는 지원 대상자 연령 범위를 만 13~34세 청(소)년으로 못 박아 내년도 가족돌봄청년 지원 시범사업 예산 20억9400만원을 배정했다. ‘지자체 조례에 따라 연령 상한(34세 초과) 조정 가능’이라는 단서만 붙었다. 만 13세 미만 초등학생 이하 아동은 아무리 힘든 가족돌봄 상황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정부의 영케어러 정책 지원 대상에 들어가지 못한다.

반면 해외에서는 영케어러 정책이 청년 지원보다 ‘아동보호’ 정책에 더 가깝다. 관련 연구와 정책의 역사가 가장 깊은 영국의 경우 ‘아동 및 가족법(The Children and Families Act 2014)’에 근거해 18세 이하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영케어러 지원을 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도 영케어러의 연령 범위를 25세 이하로 정해 지원 정책을 펴왔다. 일본 어린이가정청은 영케어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본래 어른이 담당한다고 상정되는 가사나 가족의 돌봄 등을 일상적으로 행하는 어린이를 말합니다. 책임이나 부담의 무게에 의해 학업이나 친구 관계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아래 〈그림〉 참조).”

일본 어린이가정청에서 영케어러의 예시를 알려주는 그림. ⓒ일본 어린이가정청
일본 어린이가정청에서 영케어러의 예시를 알려주는 그림. ⓒ일본 어린이가정청

단순히 정의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섬세하게 발굴하고 연령에 따라 맞춤형 지원이 이루어진다는 점도 해외 영케어러 정책의 중요한 포인트다. 이를테면 스웨덴에서 영케어러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질문에는 간병, 청소, 설거지뿐 아니라 부모를 위한 통번역 활동, 동생의 등하교 돕기, 가계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용돈을 따로 받지 않기 등이 포함되어 있다. 영국은 각각의 영케어러가 아동·청소년이 행하기에 부적절한 돌봄 행위(목욕시키기, 용변 처리, 상당한 물리력이 필요한 일, 과도한 정서적 돌봄 등)를 하고 있는지를 평가한 다음, 그 행위를 아동 대신 국가나 지자체가 해줄 수 있는 방안을 찾는다. 꼭 빈곤계층이어야만 영케어러인 것도 아니며 이민자 가정일수록, 첫째 자녀일수록, 여성 아동·청소년일수록 가족돌봄 확률이 높다는 해외 연구 결과들도 나와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케어러를 알아보는 ‘눈’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특히 학교와 병원 종사자들에게 그 역할이 요구된다. 정부와 지자체는 영케어러를 식별, 평가, 지원할 수 있는 지침서를 만들어 학교와 병원에 배포하고 각 교육·의료·복지기관들을 연계해 워크숍, 레저 활동, 심리 상담 지원, 페스티벌, 어워드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영케어러를 최대한 조기 발굴해, 가족돌봄의 늪에 빠져 개인의 시간과 기회를 온전히 희생하지 않게끔 도와준다. 빨라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나이에 이르러서야 발굴되고 지원받을 수 있도록 설계된 현재 우리나라 영케어러 지원 체계가 놓치는 부분이다.

2019년 영국에서 열린 ‘영케어러 페스티벌’을 소개하는 영상의 한 장면. ⓒThe Children's Society
2019년 영국에서 열린 ‘영케어러 페스티벌’을 소개하는 영상의 한 장면. ⓒThe Children's Society

국내외 영케어러 지원 제도를 연구하는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얼마 전 오스트레일리아의 가족돌봄 지원 기관을 면담하면서 그 차이를 다시 한번 느꼈다. “우리는 영케어러 정책 타깃이 19~34세 같은 청년층인 데 비해 그곳에서는 5~6세 아이들부터 열심히 들여다보더라. 부모가 입원해 있는데 어린아이가 간병하고 있는 경우 등을 병원에서 적극적으로 찾고 있었다.” 허 조사관은 청년기가 되어서야 발굴되는 영케어러는 이미 손쓰기 늦었을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다. “케어러 기간이 오래될수록 우울이 깊고 학업 중단 확률이 높다. 자립 기반을 잡을 기회를 이미 놓쳐버린 청년에게 뒤늦게 생계비를 주고 임대주택을 지원하는 것보다, 어린 나이에 일찍 찾아내서 가족돌봄의 굴레에서 애당초 벗어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조금 더 일찍 발굴되었다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용역 수행한 보건복지부 가족돌봄청(소)년 실태조사 및 지원방안 연구 보고서(2022년 11월 제출)에 따르면, 실제 가족돌봄 기간이 장기화될수록 영케어러의 우울 수준이 높게 나타났다. 조사 대상자 중 18세 이하 미성년자의 평균 가족돌봄 기간이 이미 36.81개월에 이르러 있었다. 올해 8월 서울시복지재단이 발표한 서울시 가족돌봄청(소)년 실태조사 심층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청년에 비해 청소년 연령의 영케어러가 상대적으로 가장 많이 호소한 고충이 ‘학업 유지의 어려움’이었다.

가족돌봄 청소년 성규 군(가명, 18)이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 성규 군은 오랜 기간 아픈 어머니와 초등학생 동생을 돌보다가 지난해 학교를 자퇴했다. ⓒ시사IN 이명익
가족돌봄 청소년 성규 군(가명, 18)이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 성규 군은 오랜 기간 아픈 어머니와 초등학생 동생을 돌보다가 지난해 학교를 자퇴했다. ⓒ시사IN 이명익

성규(18)도 그런 경우다. 성규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아픈 어머니와 갓 태어난 11살 터울 여동생을 위해 집안 살림을 도맡아왔다. 어머니가 환청 등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나서부터는 집 밖 출입조차 부담스러워졌다. 혼자 있기 무서워하는 어머니를 돌보고 그런 어머니 대신 어린 동생도 보살폈다. 결석이 잦아지자 학교에서는 자퇴를 권했다. 지역 사회복지 단체에서 성규 사례를 발견했을 때 이미 성규는 ‘학업 중단자’가 된 이후였다. 어머니 대신 동생 등하원을 도맡은 성규를 눈여겨본 어린이집 원장이 사회복지기관에 성규를 연결해준 ‘우연한’ 기회로 여러 가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미 중단한 학업은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성규 가족을 담당하는 사회복지사는 “조금 더 일찍 발굴되었으면 학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었는데 아쉬움이 크다”라고 말했다.

아동 영케어러가 취약한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고 도움받을 방법을 찾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의 가족돌봄 청(소)년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공공과 민간에서 지원하는 각종 복지 서비스를 이용해본 비율이 연령별로 차이가 났다. 13~18세 청소년이 19~34세 청년보다 복지 서비스 이용 경험이 낮았다. 가족돌봄과 관련한 정책 지원 정보 탐색 경험도, 정보 획득 용이성도 낮았다. 서울시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가족돌봄을 위한 외부 도움 경로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응답한 19세 이상 청년은 26.7%인 데 비해 18세 이하 청소년은 40.9%였다.

어린 영케어러일수록 자신이 사회적으로 도움받아야 할 대상에 해당하는지 인지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문제 인식이 안 되니 발굴과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이기 쉽다. 보건복지부와 서울시 실태조사에서 연령대가 낮은 청소년이 연령대가 높은 청년에 비해 돌봄 자체에 대한 어려움을 낮게 인식하고 지원에 대한 필요성도 상대적으로 덜 느낀다고 나타났는데, 이는 꼭 긍정적으로 해석할 만한 결과는 아니다. “가족돌봄 자체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여 도움을 구하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결과일 수 있다. 어려움과 고민들이 어린 시기부터 삶 속에 운명처럼 내재되어 돌봄 부담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서울시 보고서).”

‘가족돌봄 아동’이라는 개념의 틀이 없으면 사회복지 전문가조차 그들을 발견해내기 어렵다.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한 교육복지사는 “그동안 학교 현장에서 교육복지사로 근무하면서도 가족돌봄 아동에 대한 내용을 알기 전까지는 아이들의 가족돌봄 상황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다. 민간단체에서 보내온 후원 사업 공문을 보고 아이들의 상황을 다시 면밀히 살피다 보니 학교에서도 2명이 가족돌봄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라고 말했다.

그는 장기적이고 연속적인 지원을 위해서라도 가족돌봄 아동을 위한 별도의 법과 정책이 꼭 필요하다고 봤다. “취약 아동을 돕기 위한 여러 지원책이 이미 많다곤 하지만 대부분 일회성이고 그때그때 신청해서 길어봤자 몇 개월 지속되다 끝난다. 단발적인 예산 지원을 넘어 가족돌봄 아동을 위한 꾸준한 지원 틀과 체계가 절실하다.” 초록우산이 지난해 여름 가족돌봄 아동에게 설문지를 돌렸을 때 한 12세 가족돌봄 아동은 이렇게 적어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닌, 이렇게 조사하고 물어봐주는 설문지라도 자주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 번 지원이 아닌 일정 기간 동안만이라도 지속적인 지원이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가족돌봄 아동이 관리하는 집안 싱크대 모습. 깨끗이 설거지한 식기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시사IN 이명익
가족돌봄 아동이 관리하는 집안 싱크대 모습. 깨끗이 설거지한 식기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시사IN 이명익

‘소년소녀가장’이 사라진 이후

국회에 이런 요구들을 담은 법안이 몇 개 제출되어 있다. 지난 3월23일 더불어민주당 서영석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가족돌봄 아동·청소년·청년 지원법안’은 34세 이하 가족돌봄 아동·청소년·청년을 대상으로 지원 계획을 5년마다 수립하고 지원위원회와 지원센터를 설치·운영하는 등 국가와 지자체의 종합적·지속적 지원 의무를 명시했다. 24세 이하를 지원 대상으로 정한 강민정 의원 안도 기본 골조가 비슷하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별도의 법률로 가족돌봄 아동을 지원하는 방안에 난색을 표했다. “아동복지법 등 기존 법 체계 내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고 목적과 기능이 중복되는 제정안의 취지 달성이 가능하며, 목적·기능이 중복되는 세부 복지 대상자별 위원회·지원센터 설치는 국가와 지자체에 막대한 재정 부담 발생이 우려된다”라는 것이다(국회보건복지위원회 ‘가족돌봄 아동·청소년·청년 지원법안(서영석 안) 검토보고’, 2023년 4월).

보건복지부는 검토보고서에서 또 한 가지 반대 이유를 덧붙였다. “아동은 돌봄의 대상으로, 사실상 돌봄을 제공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돌봄 주체로서 별도 정책 대상으로 명시하는 것은 아동보호 측면에서 부적절하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가족돌봄 청(소)년 실태조사의 연령 범위를 13세 이상으로 제한하면서 든 이유도 비슷했다. “돌봄을 받아야 하는 연령의 아동이 돌봄을 제공하고 있는 상황은 아동이 적절한 발달과 보호의 권리가 침해될 수 있는 상황이며, 아동 권리의 확보를 위하여 ‘소년소녀가장’이 폐지(2014년)되는 등의 정책 방향과 반대된다.”

보건복지부 설명대로, 소년소녀가장 제도가 ‘아동 권리 확보 차원에서’ 폐지된 건 맞다. 아동에게 가장의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정서적 아동학대일 수 있다는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의 지적에 따라 정부는 2014년부터 공식 문서에서 ‘소년소녀가장’이라는 이름을 지웠다. 대신 ‘보호 대상 아동’을 지정해 시설 입소와 가정위탁을 권장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소년소녀가장’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취약 아동을 발굴·집계·지원하던 시스템도 상당 부분 마땅한 대체 방안 없이 함께 유실되었다는 점이다. 촘촘하지 못한 신규 지원망 속에서 많은 공간이 사각지대로 남았다. 예를 들어 늙고 병든 조부모와 함께 사는 가족돌봄 아동의 경우, 돌봄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 끈끈해 아이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기를 원해도 법적으로 가정위탁 지원 조건에 들지 않는다. 국가 지원을 받으려면 아이가 가족과 헤어져 시설 입소를 하거나, 아니면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기존 가정 속에 남거나 두 선택지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돌봄(아동이 보호자를 돌보는) 상황 속에 있는 많은 위탁가정 아동이 지원금이 끊길까 두려워 자신의 가족돌봄 상황을 숨기거나 드러내기를 꺼린다고, 사회복지 현장 전문가들은 전했다.

용어를 없앤다고 그 대상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제대로 된 대체 방안을 마련하지 않은 채 공식 통계와 지원의 대상에서 빼버렸을 때, 문제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그늘 속에서 더 곪고 커질 수 있다는 걸 ‘소년소녀가장’ 폐지의 빈 구멍이 보여줬다. 가족돌봄 주체에서 아동을 빼는 행위도 마찬가지 우려가 제기된다.

4월5일 국회에서 가족돌봄 아동·청소년· 청년 지원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연합뉴스
4월5일 국회에서 가족돌봄 아동·청소년· 청년 지원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연합뉴스

장영진 보건복지부 청년정책팀장은 가족돌봄 지원 대상에서 13세 이하 아동을 제외한 것에 대해 “지원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3세 이하는 가정 내 방임학대 문제, 의사표현의 취약성 등 여러 특수성도 있기 때문에 가족돌봄 청년정책이 아닌 아동보호 체계로 보호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지 검토가 필요하다. 내년에 청년 대상 시범사업을 벌이면서 별도로 연구용역을 통해 가족돌봄 아동에 대한 실태조사 연구 설계를 계획 중이다.”

무엇이 최선의 방향일지는 아직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 ‘가족돌봄 아동·청소년(영케어러) 정책개선 캠페인’을 벌이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은 지난 4월5일 국회에 제출한 관련 법률안 제정 촉구 의견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족돌봄은 전 생애를 관통하는 연속적인 과정이며, 특정 연령기에만 나타는 현상이 아닙니다. 지원의 목적은 가족과 아동을 분리하거나 가족돌봄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돌봄의 상황 속에서도 또래 아동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국가가 아동이 돌봄의 주체로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돌봄의 대상’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책대상에서 배제한 채 별도의 지원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는 것이 과연 유엔아동권리협약 비준국으로서 ‘아동 최상의 이익(제3조)’과 ‘생존과 발달을 보장할 권리(제6조)’를 고려한 아동보호정책을 수립한 것인지 우려가 됩니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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