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실의 〈우리 안의 인종주의〉(메멘토, 2023)에는 한국 정부와 사회가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 난민, 무슬림에게 행사하는 제도적 인종차별 사례가 가득하다. 가장 충격적인 사례는 아시아 곳곳에서 찾아온 이주노동자와 한국인 사이의 ‘다문화 결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문화 결혼을 한 부부는 똑같은 국제결혼이지만 ‘글로벌 패밀리’라고 불리는 백인과 한국인 부부가 당연히 누리는 법적·제도적 처우를 받지 못한다. 많은 제약을 뚫고 혼인신고를 마친 이주민 배우자는 영주나 귀화를 위해 국가에 또 한번 ‘결혼의 진정성’을 입증해야 한다. 결혼의 진정성? 그것을 출산으로 입증하란다. 현 대한민국 대통령 부부를 비롯해 한국에는 갖가지 이유로 무자녀 부부가 존재하고 있으니, 그들 역시 결혼의 진정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지영 그림
ⓒ이지영 그림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결혼을 했기에 이혼할 권리도 생긴다. 그러나 이주 여성이 이혼을 하면 바로 출국 대상이 된다. 자녀가 있다면 면접교섭권이나 양육권이 한국에 남을 근거가 되지만 자녀가 없다면 체류 자격을 상실한다. “그나마 이혼할 때 남편의 귀책사유가 입증된다면 한국에 체류할 가능성은 있다. 결국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되어야만 이혼 후에도 체류할 수 있는데, 그 폭력이 반드시 물리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이혼의 자유를 제약하는 이런 법규는 엘리트 상류층이나 연예인들의 국제결혼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뉘른베르크법으로 유대인과 아리안(독일인) 사이의 결혼을 법으로 금지한 나치와, 아시아계 이주노동자와 한국인 사이의 결혼을 감시·관리하는 한국 정부는 무엇이 다른가.

〈우리 안의 인종주의〉를 읽으며 J. 스콧 버거슨의 〈대한민국 사용후기〉(갤리온, 2007)를 떠올렸다. 그는 방송에 출연하여 한국을 ‘인종차별이 없는 정(情)의 나라’라고 추켜세우는 서구 백인들의 말은, 한국인들이 외국인의 인정에 목말라한다는 것을 갈파한 아부성 발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야말로 두 번 생각해볼 가치조차 없을 만큼 터무니없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버거슨에 따르면, 한국의 정과 유사한 환대는 서구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오히려 한국에 만연한 인종주의는 파시즘에 도달하기 직전이다. 한국 사회의 인종차별은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을 필요로 한다. 정혜실은 언론과 시민이 우선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불법체류자를 ‘미등록 체류자’로 옳게 인식해줄 것을 당부한다.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차이

2003년에 출간된 실라 미요시 야거의 〈애국의 계보학〉(나무연필, 2023)은 오래된 책이지만, 미국의 한국학 연구자들에게는 필독서다. 원제는 ‘한국에서의 민족 만들기 서사’이고, 지은이의 한국어판 서문에도 “이 책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룬 주제는 한국의 민족주의다”라고 적혀 있다. 책 제목은 독자에게 혼돈을 선사한다.

애국(주의)과 민족주의는 호환될 수 없으며, 정치학자들은 이 용어를 분명히 구분한다. 앞서 나온 〈대한민국 사용후기〉에서도 버거슨은 전자를 시민들이 자신의 손으로 만든 공동체(조국)에 대해 느끼는 자발적인 충성과 애정이라고 긍정적으로 풀이한 반면, 후자는 동질한 언어 사용자나 역사를 공유한 부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이데올로기라고 못을 박는다. 애국주의는 나와 함께 공동체를 이룬 시민의 성분(민족)을 따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화주의적 덕성과 연관되지만 민족주의는 내 이웃의 성분을 따진다는 점에서 파시즘이라는 비탈진 길로 미끄러진다. 나치는 이웃이던 유대인을 동질한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구인이 애국(주의)과 민족주의를 자명하게 구별하게 된 것은 시민(국민)이 정치의 주체가 된 근대국가를 만들어보고 난 이후의 일이다. 요시자와 세이치로의 〈애국주의의 형성: 내셔널리즘으로 본 근대 중국〉(논형, 2006)을 보면, 양계초와 같은 청나라 말기의 계몽 지식인들은 ‘애국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국민주의’를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 왕조(王朝)와 신민(臣民=왕의 백성)만 있어온 중국 역사에서는 ‘애국’도 ‘민족’도 ‘국가’도 ‘국민’도 모두 미분화된 생소한 개념이었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조선 왕조가 끝나고 막 일제에 합병된 시기가 중요 분석 대상인 실라 미요시 야거의 책에 〈애국의 계보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아주 엉뚱하지만은 않다. 나라가 없었기에 애국이고, 나라를 만들려고 했기에 애국이다.

정한욱의 〈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정은문고, 2023)는 대단한 책, 놀라운 책, 올해의 책이다. 이 책의 부제 ‘기독교에 회의적인 교양인과 나누고 싶은 질문 25가지’에 나오는 교양인들은 딱히 회의적이어서가 아니라, 한국 교회와 목사를 비칭(‘개독’과 ‘먹사’)으로 부르는 것에 익숙하다. 한국 교회의 선민주의, 배타성, 탐욕, 샤머니즘, 반지성, 이중성, 보수성이 우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비칭으로 불리는 한국 교회는 2000년 기독교 역사라는 풍요한 대양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 교회는 성경의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는 문자주의(근본주의)에 매달려 있는데, 지은이는 “수천 년 전 고대 근동에서 살아가던 1차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쓰인 종교적 문서가 21세기의 세상에서도 어떠한 오류도 없는 진리여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은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인 난센스”라고 말한다. 또 성소수자, 여성, 이교도, 동물, 부활과 천국에 대한 해석도 2000년 전의 해석을 되풀이할 게 아니라 오늘의 해석이 새로 있어야 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재해석이 일어난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신다는 증거”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2000년 전의 해석을 구구단처럼 외우는 것은 하나님이 죽었다고 떠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의 목사들은 신도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요하는데, 하나님을 알기 위한 공부에 등한하면 평신도나 목사가 다 같이 무식해진다. 공부를 외면하면 할수록 기존 해석이 더욱 소중해지고, 세상의 변화와 새로운 해석의 필요성에 눈귀를 막게 된다(폐쇄적인 선민주의에 빠지게 된다). 지은이는 기독교를 통해서만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배타적 기독교관을 거부하고,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기독교인의 신앙은, ‘지금 여기서’ 희생과 실천을 통해 이웃을 돌보고 환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부활 신앙은 장사치들이 파는 독이 든 불량품”이며 영생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듯이 말하는 자들은 “인간의 고난과 죽음을 미끼로 종교라는 아편을 팔아치우는 죽음의 장사치”이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