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자루의 칼을 연달아 잃었다. 5월23일에 노무현을, 그로부터 석 달도 못 돼 8월18일에 김대중을 잃었다. 민주당 이야기가 아니다. ‘반DJ’ ‘반노무현’ 깃발을 내세워 숱한 선거를 치렀던 한나라당이 DJ 없는 정치, 노무현 없는 정치에 적응해야 할 때가 왔다. 1971년 대선부터 본다면 38년, 1987년 대선부터로 좁게 잡아도 22년 만의 일이다.

한때 ‘반DJ’는 잊혀진 구호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여권에게는 ‘반노무현’이 더욱 매력적이었던 탓이다. 노 전 대통령이 현직일 때는 물론 퇴임 후에도 그랬다. 지난해 촛불집회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정부는 대통령 기록물을 둘러싼 논란을 일으키며 봉하마을을 겨눴다. 촛불집회의 배후에 친노세력이 있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며 ‘친노 죽이기’에 나선다는 분석이 당시부터 유력했다. 지난해 말 박연차 게이트가 본격 불거진 이후부터는 정부와 여당을 가리지 않고 노 전 대통령에게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상대적으로 김 전 대통령은 관심 밖이었다. ‘더 잘 드는 칼’이 있는데 ‘녹슨 칼’까지 휘두를 이유가 없다는 식이었다.

상황은 5월23일 이후 급반전됐다. 노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에 당황한 한나라당은 다시 ‘반DJ’를 칼집에서 꺼냈다. 한나라당은 서거 정국에 휩쓸리던 6월 한 달 동안만 DJ 관련 논평을 5건 쏟아냈다. 5건 모두 DJ를 정면으로 겨눴다.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5월23일 이전까지 15개월 동안 DJ를 언급한 논평이 16건에 그쳤던 것과 대조된다. 그중에서도 8건은 북한에 대한 비방논평에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이름을 한 줄 걸치는, 뚜렷하게 각을 세우지 않는 논평이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차이는 더 두드러진다. 사실상 전면전을 선언한 기세였다. “반노무현 공세를 펼치다 자초한 서거정국을, 반DJ로 돌파하겠다는 거냐”라는 비판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진공동취재단한나라당은 역설적 의미로 ‘든든한 버팀목’을 잃었다. 8월19일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의 빈소를 찾은 한나라당 지도부.


‘선동가 DJ’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논평의 내용만 봐도 노골적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이란 질책은 넋두리성 선동에 불과했다”(6월12일 조윤선 대변인), “선동가 DJ의 뿌리 깊은 분열적·편향적 사고는 그분이 과연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있는지 국민적 분노와 의문만 남겼다. DJ야말로 우리 국민이 어렵게 쟁취한 민주주의의 달콤한 열매만 홀로 따 먹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6월12일 황천모 부대변인),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상 간의 성급한 6·15 선언은 단지 이벤트에 불과했다”(6월14일 조윤선 대변인), “김대중 정부는 처음부터 북한의 침략행위를 축소하고 김정일을 보호하는 데만 급급했다”(6월29일 윤상현 대변인) 등등, 날 선 논평이 쏟아졌다. 민주주의와 남북관계라는 DJ의 ‘양대 브랜드’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

이런 전사(前史)에 비춰 보면, DJ 서거 당일인 8월18일에 나온 한나라당 논평은 당황스러울 정도다. 이날 윤상현 대변인은 “우리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 한 분을 잃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누구보다도 민주화, 인권,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헌신해오셨다”라고 논평했다. 망자에 대한 의례적인 수사야 그렇다 치더라도, 서거 직전까지 가장 거세게 비판하던 민주화와 남북관계를 돌연 대표 업적으로 치켜세우는 태도 변화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20년 넘게 마구 휘둘러 왔던 전가의 보도, ‘반DJ’라는 칼을 하루아침에 빼앗겨버린 한나라당은 당황했다.

반DJ 전략은 뿌리가 깊다. 한국 정치의 양대 갈등 축인 지역주의와 레드 콤플렉스를 동시에 포괄하는 것이 반DJ 전선이다. 성공회대 정해구 교수(정치학)는 “‘안티’를 만들어 선거를 치르는 것은 박정희 정권 말부터 이어지는 한국 보수 블록의 오래된 전략이다”라고 짚었다. “1978년 총선에서 이미 여당인 공화당이 야당인 신민당에게 득표수에서 뒤지기 시작했다. 호남을 포위해서 지역구도로 선거를 치르는 것 외에는 보수 블록에 탈출구가 없었다. ‘내부의 적’을 만들어내야 했다. 특히 1990년 3당 합당은 호남 포위전략의 정점이었다. 호남 포위와 김대중 포위는 사실상 동의어였다.”

 

 

DJ는 보수층에게 ‘20년 숙적’이었다. 지난 6월14일 동교동 DJ 자택 앞에서 인공기 화형식을 갖는 보수 단체 회원들.

호남 차별에 레드 콤플렉스가 더해지면 반DJ 정서가 완성된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역사학)는 결정적인 시점을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봤다. “박정희 정권은 DJ를 국회의원도 못하게 하려고 애를 썼을 만큼 정권 내부에서는 오래 전부터 DJ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그게 대중에게로 확산된 계기가 1980년 내란음모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김대중=빨갱이’라는 등식이 자리 잡았다. 이것이 1987년 대선의 지역분할 구도와 결합하면서 반DJ 정서는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됐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북한의 사주를 받아 광주 민주화운동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신군부가 DJ 등 20여 명을 재판에 회부한 사건인데, DJ는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호남과 빨갱이의 결합’이다. 한국 정치에서 보수 블록이 가장 즐겨 설정하던 두 가지 전선이 DJ라는 교차점에서 만났고 DJ는 두 전선 모두에서 ‘악마’가 됐다. DJ를 욕하고 저주하는 것만으로 선거를 이길 수 있었던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싸가지 없는’ 노무현, ‘빨갱이’ 김대중”

같은 ‘안티 정서’라도, 보수층이 DJ를 보는 시각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는 시각은 미묘하게 갈린다. 보수층이 노 전 대통령은 무시한다면, DJ를 보는 눈길에는 공포와 혐오가 섞였다. ‘비주류 정체성’의 대변자였던 노무현과 ‘친북’으로 낙인찍었던 김대중의 차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 보수층이 가진 거부감의 원인은 ‘싸가지’의 문제와 ‘이념’의 문제로 갈린다는 얘기다. 정해구 교수는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결이 다른 거부감을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구호로 묶어낸 것은 ‘안티 정치’의 정점이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이 생전에 항상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지역 기반도 정치 스타일도 다르지만, 죽음을 맞는 상황이 두 사람을 ‘한 쌍’으로 기억되게 했다. 한나라당에게는 두고두고 큰 부담이 될 것이다.” 단순히 ‘안티의 대상’이 사라진 것을 넘어, 두 전직 대통령은 ‘스토리가 있는 죽음’으로 한 쌍의 상징이 됐다는 얘기다. 박정희 신화가 두고두고 민주당의 발목을 잡는 것과 같은 현상이 한나라당에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

 대단히 역설적인 얘기지만, 정신적 지주를 잃은 것은 민주당만이 아니다. 한나라당 역시 어떤 의미에서 ‘든든한 버팀목’을 잃었다. DJ라는 거목이 사라진 지금,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가 자립이라는 숙제를 떠안았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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