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출판문화협회 등 18개 출판 관련 단체가 8월17일 서울 용산구 문화체육관광부 서울사무소 인근에서 ‘책 문화 살리기 출판문화인 궐기대회’를 열고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대한출판문화협회 등 18개 출판 관련 단체가 8월17일 서울 용산구 문화체육관광부 서울사무소 인근에서 ‘책 문화 살리기 출판문화인 궐기대회’를 열고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2024년도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안에 예산 코드(1433-308) 하나가 사라졌다. ‘국민독서문화증진 지원’ 사업이다. 2023년 예산안에 59억8500만원으로 책정된 칸이 이번에는 텅 비었다. 영유아와 초등학생에게 책꾸러미를 배달하는 ‘북스타트’, 고령층을 위한 비대면 독서 프로그램 ‘전화로 찾아가는 책친구’를 포함해 청소년 독서문화 캠프, 독서동아리 활동 등의 기반이 되었던 예산이다. 교정시설과 병영 독서활동 예산도 여기 포함된다. 2007년 시행된 독서문화진흥법에 따라 마련된 이 사업들이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지역서점 활성화 예산도 삭감되었다. 문체부 보조사업자인 한국서점조합연합회(한국서련)는 8월31일 지역서점 활성화 예산 11억원이 전부 삭감되었다는 사실을 공론화했다. 지역서점에서 진행하는 750여 개 문화 프로그램을 내년부터는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폐점 시간을 연장해 문화행사를 진행하는 ‘심야책방’과 서점별 특색을 살린 ‘오늘의 서점’, 지역서점에 전문 큐레이터 컨설팅을 제공하는 ‘큐레이터 서가 지원’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한국서련 권미선 팀장은 “지역서점과 문체부의 요구로 올해 신설된 사업들이다. 문체부 전체 예산의 약 0.2%밖에 되지 않는 예산이지만 만족도가 높았다. 그런 사업들이 내년부터 없어지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안찬수 상임이사가 보기에, 2024년도 예산안은 ‘책 읽지 말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15년간 독서문화진흥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2008년부터 문체부가 독서문화진흥 기본계획을 5년마다 수립하고 있는 것도 운동의 성과다. 풀뿌리 책읽기 운동부터 독서 정책까지 중앙 부처와 지자체가 지속 가능한 독서 생태계를 조성해가겠다는 일종의 합의다. 그 합의를 거스르는 예산안이었다. “예산안은 주무부처의 의견 표명이다. 국민독서문화 예산 코드를 삭제한 건 독서진흥 정책 15년을 뒷받침해온 무수한 논의를 함께 없애버리는 것이다.”

문체부는 9월1일 설명자료를 내고 “지역서점에 대한 지원 예산은 15억1000만원으로 올해 예산 대비 증액되었다”라고 반박했다. 문체부에 따르면, 디지털 도서물류 지원 사업(12억5000만원), 지역서점 통합전산망(POS) 지원(1억6000만원)을 합한 예산이다. 북콘서트나 독서모임 같은 문화 행사 대신 출판 유통 고도화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것이다. 문체부 미디어정책과 관계자는 〈시사IN〉에 “지역서점의 물류 비용을 줄여달라는 한국서련 측 요구로 추진된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독서문화 사업 폐지에 대해서는 “지자체 중복 사업이 많은 데다 프로그램성 사업의 예산이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 줄이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독서문화진흥 예산 코드가 삭제된 건 맞지만, 모든 문화 사업이 사라진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서점업계는 반발한다. 지역서점 2000여 개의 기능이 책을 유통하는 소매업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2018년 지역서점이 문체부 고시에 따라 ‘생활문화시설’로 지정된 배경에는 지역사회의 문화 거점 역할을 인정한 측면이 크다. “유통 인프라 구축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지역서점이 책만 구입하는 곳이라면 온라인 서점의 편리성을 능가할 수 없다. 지역서점은 가장 최전방에서 지역 주민, 문화 소외계층을 책과 연결하는 곳이다.” 권미선 팀장은 예산 삭감의 피해를 지역서점을 통해 문화 프로그램을 향유하던 국민들이 고스란히 안게 되었다고 말한다.

긴축 기조라 하기에는 문체부 전체 예산이 늘었다. 2024년 편성된 예산은 6조9796억원으로 2023년보다 3.5% 증가했다. 콘텐츠 정책금융 공급(1조7700억원), 해외 콘텐츠기업지원센터 운영(267억원), OTT·방송영상콘텐츠 전문인력 양성(10억원) 등이 주요하게 강조되었다. 그에 비해 독서·출판을 담당하는 ‘출판산업 육성’ 분야는 총 418억2900만원으로 올해 대비 총 55억8500만원(11.8%) 삭감됐다. 문체부는 ‘예산 재구조화’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지자체와 중복되는 사업은 삭제하고 방만 운영을 줄인다는 취지다. 실제로 우수 도서를 선정해 도서관에 보급하는 세종도서 사업(교양 부문 550종, 학술 부문 400종)과 문학나눔 도서 사업(문학 520종)도 하나로 통합된다. 내년 예산은 115억원, 올해 세종도서 사업(84억원)과 문학나눔 도서 사업(51억원)을 합친 금액보다 20억원 줄었다.

느닷없는 ‘출판계 카르텔’ 논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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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문화, 서점, 출판을 중심으로 한 전방위적 예산 삭감에 출판문화계가 술렁이고 있다. 발단이 된 사건이 올해 5월 있었다. 문체부가 세종도서 사업을 겨냥하면서다. 연 84억원 보조금이 지원되는 대형 사업인데 도서 선정기준이 불투명한 데다 특정 단체의 추천인이 과도하게 반영된다는 지적이다. 박보균 장관은 5월21일 “(세종도서 사업을 주관하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출판진흥원)이 이를 소홀히 한 것은 치명적이며 리더십의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낸 것으로 사업의 구조적인 수술이 불가피하다”라고 말했다.

서울국제도서전도 논란의 중심에 섰다. 7월25일 박보균 장관은 도서전을 주최하는 한국출판문화협회(출협)가 수익금 내역을 누락했다고 발표하며 “출판계 이권 카르텔”을 언급했다. “국고 보조금을 받는 출협과 감독 의무가 있는 출판진흥원의 묵시적인 담합이 있었는지, 이권 카르텔적 요인이 작동했는지를 면밀히 추적하겠다.” 8월3일 문체부는 윤철호 출협 회장과 주일우 서울국제도서전 대표 등을 서울경찰청에 수사 의뢰했다.

문체부와 출판업계가 전면전을 벌이는 가운데 나온 예산 삭감안이어서 논란이 더 커졌다. 국고보조금 지원 사업에 대한 불투명성이 오랜 골칫거리였다는 지적도 있다. 심사위원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내부 목소리도 제기돼왔다. 다만 출판진흥원의 한 관계자는 “진흥원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사실상 없는 구조다”라고 답했다. 상위 기관과 사업 내용을 공유하는 만큼 문체부도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출판인회의 이광호 회장은 “문제가 있다면 카르텔이라는 용어를 써서 축소나 폐지를 주도하기보다 개선을 논의했어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애초에 세종도서 사업에 민간단체가 관여하게 된 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2001년 문화부 추천도서로 시작된 세종도서 사업은 박근혜 정부 시절 부당한 개입이 드러나면서 민관협의체로 운영방식이 바뀌었다. 5·18민주화항쟁, 북한 등을 다룬 책이 다수 탈락했다는 내부 증언이 나왔다. “민관협의체는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 문체부와 출판계가 오래 숙고한 결과였다. 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것보다 민간과 협의하는 게 최선이라고 봤다. 더 나은 해결책이 있을지 문체부가 출판계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했다.” 그는 2020년 세종도서 사업 운영위원장을 지냈다.

일각에선 세종도서 사업을 주관하는 출판진흥원장을 바꾸기 위한 ‘의도적 흠집내기’라는 의심도 나온다. 이명박 정부가 유인촌 전 문화부 장관을 내세워 방송·문화계를 보수 일색으로 물갈이하기 위해 한국문화예술위원장 등 문화부 산하 기관장들을 해임했다는 의혹을 산 바 있다. 7월17일 김준희 출판진흥원장은 사표를 제출했다. 지난 정부에서 임명된 김 원장의 임기는 원래 내년 12월까지였다.

10여 년 전 문화예술계와 대립각을 세워온 유인촌 전 장관은 9월13일 문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유 장관 후보자는 8월28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예산 문제를 거론했다. “문화·예술도 경쟁을 통해 살아남아야 한다. 쥐꼬리만 한 예산을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주면 경쟁이 될까? 생계 보조형 지원은 그만해야 한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을 확실하게 밀어줘야 한다.” 문화예술 지원 정책의 변화를 예고한 말이다.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인 정우영 작가는 과거 보수 정부와 달라진 문화예술계 대응을 이렇게 짚는다. “카르텔이라는 명명으로 출판계를 부조리한 세력으로 몰아감으로써 민간 경상보조 지원구조 자체를 흔들고 있다.”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으로 있던 2014년 그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를 가까이 경험했다. “과거 보수 정부에서는 비판적인 문화예술인들을 정권의 반대편에 선 세력으로 인식했다. 지금은 보조금과 예산 자체를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블랙리스트 때보다 더 교묘해졌다.”

출판 없이 K콘텐츠도 없다

쥐꼬리만 한 예산을 나눠주기보다 경쟁을 통해 살아남도록 하는 게 맞을까? 한 출판사 관계자는 세종도서 사업에 대해 “수익성은 떨어지지만 가치에 중점을 둔 학술 도서들이 꾸준히 출간될 수 있는 여력을 만들어주었다”라고 평가했다. 상업 논리로는 유지되지 않을 인문사회과학 서적 출판의 연속성을 담보했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정부가 우수도서를 도서관에 배급함으로써 출판 생태계를 유지시켜온 측면도 있다. “바깥에서 보면 사양산업이고 출판사들끼리의 이해관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출판이 어려워지면 작가, 도서관, 서점이 다 어려워진다. 출판 생태계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이광호 회장의 말이다.

결국 해체되는 건 풀뿌리 조직들이다. 지역서점들은 당장 생존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대관료, 기획료 같은 수익을 낼 수 없는 국고 지원 사업임에도 독서문화 거점을 만들겠다는 개별 서점의 분투로 이어져온 사업이 많다.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 사무국장이자, 경기도 파주에서 쩜오책방을 운영하는 이정은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에도 몇 시간 공들여 기획서를 쓰는 이유는 지역 작가를 발굴하고 좋은 작가를 지역에 모시기 위해서다. (지역서점 활성화 지원 예산인) 11억원을 쪼개고 쪼개서 전국 동네책방의 750여 개 활동을 유지시켜온 것이다. 이것보다 국가재정 사업 중에 이정도로 효율이 좋은 투자가 있는가.” 그는 서점 사업이 아니라 결국 책읽기라는 문화를 없앨 거라고 우려했다.

작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서점은 작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독자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당장 책이 좀 안 팔린다 하더라도 창작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다. 창작자를 직접 지원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부분이다. 이런 간접 효과가 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당장은 표가 나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 문화산업 전반이 위축될 수 있다고 출판계가 염려하는 이유다. 정우영 작가는 “네트워크상으로 보면 중요한 기능을 했던 점들이 폭삭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수 정부가 들어서면서 책과의 전쟁은 더욱 가시화되고 있다. 실제로 서울 마포구의 경우 단체장이 바뀐 후로 작은도서관을 스터디카페로 바꾸거나 출판문화진흥센터(플랫폼P)의 용도를 변경하려는 시도가 벌어졌다. 서울, 대구, 경기 등에서 단체장이 바뀌면서 도서관 예산이 삭감되는가 하면, 충청 지역에서는 페미니즘과 인권 관련 어린이책 일부가 보수 단체의 민원으로 열람이 제한되었다. 지자체 중복 사업이라는 지적에 대해 안찬수 상임이사는 “중앙정부에서 예산을 날리면 지자체도 예산을 안 세울 가능성이 크다. 자치단체장의 성향에 따라 문화 소외 지역은 더욱 열악해지고 지역 간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55억’ 문체부의 출판 예산 삭감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닌 이유다.

지난 8월17일 서울 용산구 문화체육관광부 서울사무소 앞에서 출판문화인 궐기대회가 열렸다.  이날 출판인들이 든 슬로건은 ‘출판이 뿌리다!’였다. 출판 없이는 K콘텐츠 산업도 없을 거라는 의미다. 정우영 작가는 출판을 제조업에 비유한다. “지식 정보의 맨 밑바닥은 출판 행위다. 반도체 제조 공정을 없애면 IT 산업이 남아나지 않듯, 출판은 가장 밑바닥 공정에 해당된다. 떠돌아다니는 지식을 체계화해서 책으로 공급하는 행위를 바탕으로 문화가 쌓인다. 출판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반도체 칩 생산을 멈추겠다는 얘기와 똑같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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