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 5일장의 모습. 이동 상인들이 천변 이면도로를 가득 채웠다.ⓒ시사IN 신선영
경기도 용인 5일장의 모습. 이동 상인들이 천변 이면도로를 가득 채웠다.ⓒ시사IN 신선영

과일, 야채, 찐빵, 젓갈, 버섯, 때밀이 수건, 마늘, 옛날과자, 뻥튀기, 약초, 마술 돋보기, 쥐눈이콩, 닭, 달걀, 양말, 메추리알, 이불, 콩국물, 족발, 홍어회, 카세트테이프…. 6월15일 오전, 경기 용인시 처인구 금학천변 일대에 파라솔과 좌판이 깔렸다. 거대한 ‘장돌뱅이(장돌림)’들의 집합체가 천변 이면도로 700m를 가득 채웠다. 매 5일과 10일에 서는 용인 5일장 장날이다. 가격표도, 카드 결제 단말기도 드물고, 할인·적립·포인트도 없고, 주로 현금과 에누리와 때론 바가지가 오가는 곳. 하지만 상인과 손님, 구경꾼 모두 들뜬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누비는 장소다.

이호영 전국민속5일장연합회 회장(71)은 1980년부터 43년째 5일장을 다녔다. 3·8일에는 경기 광주장, 4·9일에는 성남 모란장, 5·10일에는 용인장 등 경기도 일대 5일장을 돈다. 식용유, 설탕, 다시다, 미원 등 식료품을 오래 팔아왔고 지금은 잡화를 판다. 그와 아내 이복례씨(66)가 함께 지키는 매대에는 상보, 항아리망, 베보자기, 면주머니, 조청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이 회장이 처음 장사에 나서던 시절에는 물건을 들고 나갈 수 있는 판매처, 그러니까 5일장이 전국에 2500여 곳 있다고 들었다. 지금은 700여 곳으로 추산된다. 지역에 인구가 줄어서 사라지기도 하고, 도시개발로 장 서던 자리가 싹 밀려서 없어지기도 했다. “제가 젊었을 때는 경기 성남만 해도 5일장이 세 개였어요. 모란장, 판교장, 고등장. 분당이 개발되면서 두 개가 사라지고 모란장만 남았죠.”

그래도 아직 전국에 700여 곳이 남았다. 모란장, 충주장, 제주장 같은 곳은 5일장이 설 때마다 상인 500~600명이 물건을 팔러 온다. 장날엔 한 공간에 모이지만 모두가 각자도생하는 모래알 같았다. 이 회장은 5일장이라는 공간을 지켜내려면 사람들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전국 각지를 돌며 5일장 상인들을 만나 네트워크를 꾸렸다. 2002년 전국 17개 지부로 구성된 ‘전국민속5일장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조선시대 보부상의 명맥을 이어간다는 자부심 아래 ‘장돌림(장돌뱅이)의 생존권 보호와 소비자 권익 보호’ 활동을 이어왔다.

이호영 전국민속5일장연합회장(오른쪽)과 그의 아내 이복례씨.ⓒ시사IN 신선영
이호영 전국민속5일장연합회장(오른쪽)과 그의 아내 이복례씨.ⓒ시사IN 신선영

〈1박2일〉 방송 이후 오해 늘어

여전히 많은 상인들이 장돌뱅이로 살고 있다. 5일장 상인부터 지역축제장을 도는 상인, 아파트 장터 상인, 푸드트럭 상인 등이다. “오늘은 이 장으로 내일은 저 장으로 삶의 터전 찾아서 이어나가(민속5일장연합회 회가(會歌) 가사 중)”는 여러 종류의 ‘이동 상인’은 공식 통계에도 정확히 잡히지 않고 한 단체 아래 모여 있지 않지만, 분명 지역 곳곳의 경제와 문화를 만들고 유지해 나가는 중요한 한 축이다.

이들이 도매금으로 욕을 먹는 일이 최근 자주 벌어지고 있다. KBS 〈1박2일〉 옛날과자 상인 바가지 논란, 지역축제장의 바가지 음식점 논란 등이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일파만파 커졌다. 〈1박2일〉 출연자들이 경북 영양군의 한 재래시장을 들러 전병, 강정 등 옛날과자를 담았는데 상인이 한 봉지 7만원씩을 책정해 파는 모습이 지난 6월4일 방송분에 고스란히 담겼다. 논란이 일자 영양군청은 “해당 상인은 영양산나물축제 기간 중 옛날과자류 판매를 위해 이동해온 외부 상인으로, 영양 전통시장 상인들과는 전혀 무관하다”라고 해명했지만 시청자와 누리꾼들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바비큐 한 접시 5만원’ ‘오뎅 한 그릇 만원’으로 대표되는, 지역축제장 이동형 풍물 장터의 바가지 상술에 공분이 쌓이던 참이었다.

관리 못한 지자체나 축제 주최 측도 욕을 먹었지만, 비난의 대부분은 이동 상인들에게로 향했다. “그동안 균형발전, 소수의 편, 지역 상권 등을 사유로 전통시장이나 아파트 단지에서 진행되는 이동 상인 장터 등을 애용했는데 오냐오냐 하니 상인들이 너무 버르장머리가 없어졌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대형마트, 대형슈퍼를 이용해서 약자인 척하는 상인들 폭삭 망하게 해야 물가안정과 공급과 수요의 안정화가 이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정○○)” “뭣 하러 위생도 안 좋고 바가지 씌우면서 사람 좋은 척, 에누리해주는 척하는 전통시장 갑니까? ㅋㅋ 쿠팡으로 구매하세요. 적립도 되고 카드할인도 되고 쿠폰도 있고(박○○).” 옛날과자 상인 논란 이후 영양군청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은 이런 내용의 게시물들로 도배되고 있다.

6월4일 방영된 〈1박2일〉 한 장면. 한 상인이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옛날과자를 판매해 논란이 일었다. ⓒKBS 화면 갈무리
6월4일 방영된 〈1박2일〉 한 장면. 한 상인이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옛날과자를 판매해 논란이 일었다. ⓒKBS 화면 갈무리

이동 상인들도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다. 최근 이슈가 되는 바가지 사례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같은 상인이 봐도 심했다. 근절해야 할 나쁜 상술이다”라고 말한다. 이호영 회장은 “축제장마다 부스비라고 수십만~수백만 원씩 내고 들어간 상인들이 얄팍하게 본전을 생각하느라고 무리하게 가격을 매기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옛날과자 논란 이후) 행정안전부 관계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연합회 차원에서 이런 일이 좀 없게 도와달라고 요청하더라. 사실 5일장 상인들은 날짜에 맞춰 5일장만 주기적으로 다니기 때문에 지역축제장은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이 이동 상인을 한 묶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각 지부 5일장 상인들에게 합리적인 가격으로 판매해달라고 공문을 보냈다.”

이동 상인이라고 모두가 한번 팔고 떠나는 ‘뜨내기 상인’은 아니다. 15년 차 장돌림 오현철씨(71)는 경기 지역 5일장을 돌며 화초 장사를 한다. 원예 관련 학교를 다니고 직접 비닐하우스 농장을 꾸리며 키운 봉선화, 맨드라미, 선인장, 관엽수 등을 시장에 내다 판다. 그는 “어떤 사람들은 난전에서 이렇게 장사하는 우리를 보고 ‘한번 팔면 그만 아니냐’ 하지만 우리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수십 년째 같은 장에 주기적으로 다니면서 생기는 단골이 있고 쌓아가는 신뢰가 있다. 대다수 이동 상인들은 자기가 파는 물건에 자부심을 가지고 손님도 만족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라고 말했다. 이호영 회장은 “변해가는 시대상에 맞게 5일장 상인들도 가격, 품질, 위생 관리에 많이 신경 쓰며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오현철씨는 경기 용인·안성·오산 5일장을 돌며 화초를 판다.ⓒ시사IN 신선영
오현철씨는 경기 용인·안성·오산 5일장을 돌며 화초를 판다.ⓒ시사IN 신선영

다만 어려움이 있다. 5일장 상인 등 이동 상인 대부분이 법 제도의 바깥에 존재한다. 5일장이 아무리 유구한 세월 이어져왔어도 그곳에 개발계획이라도 한번 잡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을 만큼 위태로운 토대 위에 서 있다. 법적으로 따지자면 대부분의 5일장과 이동 상인들은 도로교통법, 식품위생법, 소득세법 등을 위반한 불법 공간 속 범법자가 되어버린다. 푸드트럭이나 아파트 단지 알뜰장터도 여전히 ‘비공식 영업’ 상태로 운영되는 곳이 많다. 그런 공백 가운데 일부 선을 넘은 상술 사례가 눈에 띄면 이동 상인 전체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박태하 〈전국축제자랑〉 작가는 전국 지역축제장을 다니며 여러 형태의 이동 상인과 그것을 이용하는 지자체·관광객의 모습을 관찰해왔다. 박 작가는 지역축제장이나 5일장 같은 공간에 대해 도시 관광객이 가진 기대, 그리고 그것이 현실과 어긋나는 괴리를 느꼈다. “양면적인 기대가 있는 것 같다. 지역이 가진 고유 문화나 시골 인심 같은 걸 기대하는 한편, 지역 역시 서울만큼의 합리성과 딱딱 떨어짐을 갖추길 바란다. 바가지나 뒤통수를 맞지 않고 주차도 편리하게, 위생과 가격도 도시만큼 투명하고 합리적이길 원한다.” 하지만 도시 관광객의 기대만큼 지역은 견고하게 전통과 문화와 인심을 보존하기 힘든 게 지금의 형국이다. 그 엇박자 속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 사이 불신과 원망만 쌓이고 있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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