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는 겨울방학이 길었다. 중동전쟁 때문이었다. 기름값이 치솟아 초겨울에 이미 방학을 예고했다. 70일짜리 기록적인 겨울방학을 했던 때 같다. 교실 난로에 공급하는 조개탄 양을 반으로 줄였다. 석탄 창고에 가는 주번들이 다른 반 아이들과 싸웠다.

“소사 아저씨들이 빠께쓰에 반도 안 채워줘."

저학년들은 소사 아저씨들, 그러니까 학교 잡무를 봐주는 분들이 석유를 가지고 다니며 불을 피워줬다. 고학년이 되면 약간의 장작으로 알아서 불을 살려야 했다. 주번의 몫이었다. 제대로 피워내지 못하면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핀잔을 들었다.

조개탄 반 양동이로 하루 난방이 되지 않았다. 선생님은 그 빼곡한 교실에 아이들이 움직이고 장난치고 들끓어서 공기가 매울 지경이 되어도 좀처럼 창문을 열지 말라고 했다. 난로 열이 빠져나가는 걸 막으려는 거였다.

교실에서 조개탄을 때던 어느 겨울, 기름값이 치솟자 조개탄 양이 반으로 줄었다.ⓒ연합뉴스
교실에서 조개탄을 때던 어느 겨울, 기름값이 치솟자 조개탄 양이 반으로 줄었다.ⓒ연합뉴스

몇 주 전에 콩나물 교실 얘기를 썼더니 한 반에 90명 정도였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어떤 분이 댓글을 단 적이 있다. 당시 서울시 평균을 보니 80명 정도였다. 그게 평균이었으니 인구가 폭발하는 변두리 지역은 90명 정도는 거뜬했다는 걸 밝히고 싶다.

하여튼 그런 교실에서 모자란 조개탄을 땠다. 날씨는 더 극성맞게 추웠다. 난로에서 먼 자리는 4교시가 되도록 손이 곱아서 연필 글씨를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아침에 이미 몸이 얼어서 등교했다. 등굣길에는 하필 바람이 매서운 하천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왜 볼을 감싸는 모자 하나, 장갑 하나 변변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 칼바람이 소맷부리를 파고들었고, 볼은 얼얼해서 감각이 없었다. 그때 약국에서 ‘글리세린’을 사다가 언 살에 발랐다.

학교는 멀고도 멀어서 거의 한 시간을 걸었다. 서울에서 그렇게 먼 등굣길이 있을 수 있냐고 누가 그럴까 봐 스마트폰으로 현재 거리를 재보니 3㎞가 넘는다. 아이 걸음에 한 시간을 꼬박 걸을 수밖에. 내가 지금도 참 잘 걷는데 그때 단련된 걸음이 아닌가 싶다. 하기야 나중에 들으니 시골에서 20리 산길을 걸어 통학하던 친구들도 있었다. 살려고, 배우려고 다들 기를 쓰던 시대였다. 아버지가 150원, 300원 하던 육성회비만 내주면 얼마든지 다닐 수 있었다.

방학이 되지 않았는데 학교를 며칠 못 갔다. 아직 정정하신 어머니가 읽게 되면 뭐라고 하실 게 분명한데, 그래도 이걸 써야 마무리를 할 수 있겠다. 지난 호에는 ‘오함마에 무너진 시멘트밥’을 썼는데 이번에는 그나마도 못 먹었던 ‘결식’의 기억이다. 친구들에게 술 한잔 마시며 몇 번 얘기를 했다가 본전도 못 건진 사연이기도 하다.

“설마, 아주 초를 쳐도 어지간히 치고 양념을 해도 적당히 해라. 무슨 1970년대에 서울에서 밥을 굶냐.” 그랬다. 내가 그때 제일 바랐던 건 ‘영세민’이었다. 요즘 기초생활수급자쯤 되는. 그때도 ‘동회(주민센터)’에 영세민 등록이 되면 철마다 연탄 몇 장, 수제비 떠서 먹으라고 독수리표 2등급인 갈색 밀가루가 한 포쯤은 나왔다. 굶어 죽지 않게는 해주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우리 어머니는 죽어도 영세민 등록은 하지 않았다. 동네 창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체면에 평생을 걸고 사시는 분이니, 지금은 이해가 간다.

참혹한 결식은 몇 번 있었다. 정말 양식이 없어서 굶었다. 배가 고프니 그냥 단칸방에 온 식구가 누워 있었다. 물론 살려고 무엇인가 하기는 했다. 처음에는 어머니 한복을 팔았다. 어머니는 체면에 산 분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몇 번인가 내게 그 기억을 말씀하시며 괴로워하셨다.

“네 큰누이에게 그걸 맡겼더니라. 참 미안하지. 그 어린 게 척 보따리를 들고 가서 몇백 원인가 받아왔니라.” 그러니까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인가 하던 누이가 한복을 싼 보따리를 들고 전당포에 가서 돈으로 바꿔온 것이었다. 그때는 전당포가 도처에 있었다. 사람들은 돈이 궁하면 물건을 잡혔다. 그때는 흔한 말이 ‘잡혀 먹었다’였다. 전당포에 시계, 양복이나 한복감, 라디오 등 무엇이든 갖다 맡기게 되는데 대개는 다시 찾을 수 없어서 잡혀 먹는다고 했다. 전당포 이자는 엄청난 고리이고, 다시 찾을 돈이 생길 사람이 전당포를 드나들겠는가.

한복과 옷가지를, 나중에는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우표책을 누나가 시내에 가서 돈으로 바꿨다.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는 삼일우표사였다. 아버지는 “이승만 박사 취임 기념우표도 있고, 귀한 우표가 그리 많은데 겨우 3000원을 줬다”라고 우표사를 책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돈을 주고 산 게 어디인가. 그날은 밥을 먹을 수 있는데.

겨울이었다면 그날 반찬은 이랬을 것이다. 우선 기름이 도는 큰 동태를 한 마리 토막 쳐 사와서 무와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벌겋게 양은냄비에 끓인다. 애들은 보통 생선 머리를 안 먹는데, 나는 그때 이미 동태의 모든 걸 알았다. 지느러미를 빨면 미끈한 것(젤라틴)이 나와서 맛있고, 동태 머리에 붙은 볼살의 쫀득함이며, 대가리 위쪽에 꽤 많은 살이 붙어 있고, 심지어 아가미도 피를 머금고 있어서 비리고 진한 맛이 난다는 걸 말이다. 어머니가 뿌린 미원의 맛이 녹아 혀가 아린 국물의 맛도 그때 이미 다 깨달았다. 동태찌개 맛을 가장 먼저 알아버린 소년이었다.

굶는 날은 온종일 누워 있었다

결식(缺食)이란 한자어의 의미는 ‘밥을 빼먹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얘기는 결식이 아니다. 그냥 통으로 며칠을 굶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랑 가게 앞 구멍가게에 가서 마지막으로 외상을 얻으려다가 퇴짜를 맞은 후였다. 온 식구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작은 창밖으로 아침과 환한 대낮과 밤이 인사를 왔다 하루가 지나가는 루틴이었다.

나는 누워서 온갖 먹을 것을 상상했다. 학교 앞에서 파는 핫도그. 기다란 소시지를 소독저에 끼워서 밀가루 반죽을 돌돌 말듯이 묻힌 후 쇼트닝이 끓는 직사각형 기계에 가지런히 꽂아 튀기는데, 적당하게 색이 나오면 파는 이가 꺼내서 케첩을 뿌려 주었다. 그걸 더 얻어먹으려고 ‘케첩 많이’ 같은 추가 주문을 넣어봤자 파는 이는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때는 케첩도 비쌌다. 지금은 길에 트럭으로 토마토케첩을 가득 부어놓고 그 위를 뒹구는 ‘토마토케첩 축제’를 한다고 해도 될 그런 싸구려 케첩도 그때는 귀했다.

파는 이는 양을 늘리려고 케첩에 물을 탔다. 그래서 핫도그에 뿌리면 착 붙지 않고 질질 흘렀다. 야박할수록 빨리 흘러내렸기 때문에 재빨리 핥아먹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케첩의 농도로 우리는 핫도그 장수들의 인정머리를 매겼다. 어린 애들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방에 누워서 짜장면도, 그리고 한 번도 먹어보지는 못했지만 구경을 해본 난자완스 같은 중국집 요리도 생각해봤을 것이다. 그래도 먹어본 걸 상상하지 그런 요리는 거의 갈망하지 않았을 것 같다. 풀빵도 생각했으리라. 풀빵의 중량과 팥의 함량 같은 게 중요했겠지만, 따지는 건 어디까지나 개수였다. 100원에 몇 개냐, 50원에 몇 개냐.

풀빵을 살 때 따지는 건 개수였다. 그래서 더 작은 풀빵 기계가 나왔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그래서 나온 게 더 작은 국화빵 기계, 더 작은 물방울 풀빵 기계였다. 크기가 작아지니까 반죽물을 붓는 틀의 크기도 작아졌다. 수많은 틀을 홀랑 뒤집고 풀빵이 적절히 황금색으로 익었을 때 타기 전에 꺼낸다. 다시 기름 먹인 헝겊으로 기름칠을 잽싸게 하고 반죽물을 부어 익힌다. 이 동작을 반복하는 게 풀빵 장수의 기술이었다.

크기가 작아지니 손이 더 바빠졌다. 한 판에 구멍 열댓 개가 올라갈 구이 틀이 스무 개나 서른 개가 되면 풀빵 장수는 미쳐버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연탄 불땀이 세면 아주 난리가 났다. 손이 보이지 않게 뒤집고 꺼내고 봉지에 담아 팔고 셈을 치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거기에 덤을 요구하는 손님과 실랑이도 벌여야 했고, 풀빵 틀 옆에 흘린 반죽물이 익어서 갈색이 되면 훔쳐 먹는 녀석들 단속도 해야 했다.

라면으로 살아났다

하루쯤은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그러다가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면 기억이 가물가물해진다. 의식도 몽롱해진다. 이틀인가 굶고는 어머니가 부엌을 샅샅이 뒤져서 마른 강낭콩을 찾았다. 소금 넣고 삶았는데, 주린 창자가 다 설사로 내보내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강낭콩을 싫어한다. 부잣집에서 먹던, 기름기 도는 하얀 쌀밥으로 지은 까만콩밥만 좋아한다.

사흘을 넘기고 의식이 오락가락할 때 무얼 팔았는지, 아니면 어디 다른 가게를 터서 외상을 얻었는지(단골 구멍가게에서는 더 이상 외상을 주지 않았으므로) 롯데라면 덕용 두 봉지를 아버지가 구해왔다. ‘덕용’은 일종의 대형 포장으로 라면 다섯 개가 그냥 한 봉지에 담겨 있는 제품을 말한다. 덜 사용한 포장지 값만큼 값이 쌌다. 그게 두 봉지니까 라면이 열 개였다. 한꺼번에 끓일 솥이 없어서 들통에 끓였다. 그걸 먹고는 며칠을 복통으로 고생했다. 밥을 굶다가 기름진(?) 라면을 급하게 먹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라면 상태가 나빠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라면에서 아주 역한 기름내가 났다. 굶으니 냄새에 아주 예민해져서 그걸 생생하게 느꼈다. 이른바 튀긴 라면의 기름이 산패되어 나는 냄새였다. 안 팔려서 그랬겠지. 인기 없던 롯데라면이여.

여담인데, 한두 해 뒤 롯데라면은 구봉서와 후라이보이 곽규석으로 그 유명한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캠페인을 성공시키며 만년 2등 라면의 이미지를 지웠다. 나중에 업계 1위의 발판이 된 농심라면의 등장이었다.

결국 라면으로 살아났다. 죽지 않고 산 것으로 다행이었다. 도시에는 그렇게 굶는 사람이 많았다. 외로운 도시라 그랬을 것이다.

* 긴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차마 쓰지 못할 얘기들을 다 했어요. 등장하는 많은 친구들과 식구들, 이미 죽어간 사람들에게 고맙고 다시 그립습니다. 살아 있으면 밥을 나누고, 죽은 분들은 나중에 술을 하겠습니다. 그 세계는 선배이니 술값은 당신이 내세요.

※이번 호로 '밥 먹다가 울컥' 연재를 마칩니다. 수고해주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기자명 박찬일 (셰프)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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