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만의 미투' 당사자인 최말자씨는 1964년 '혀 절단 사건'에 대한 재심 개시를 신청했다. ⓒ시사IN 이명익
'56년 만의 미투' 당사자인 최말자씨는 1964년 '혀 절단 사건'에 대한 재심 개시를 신청했다. ⓒ시사IN 이명익

최말자씨에게 5월은 아픈 계절이었다. 1964년 5월6일, 당시 만 18세였던 그는 자신에게 성폭행을 시도하던 노 아무개씨의 혀를 깨물었다. 노씨의 혀 1.5㎝가 잘렸다. 일명 ‘김해 혀 절단 사건’이다. 이 일로 최씨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최씨는 강간미수 피해자임에도 중상해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혀 절단 사건’은 법학도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사건이다. 정당방위를 다툰 대표적인 판례로, 형법학 서적에도 실려 있으며 1995년 대법원이 법원 100년사를 정리하며 발간한 책 〈법원사〉에도 소개돼 있다.

최씨는 재판이 끝난 이후, 그 누구와도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가 겪은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가족과도, 동네 친구와도 말하지 않았다. 가슴속의 한을 그저 품고만 살았다. 그는 판례로만 존재하던 당사자였다. 그로부터 56년이 흐른 2020년 5월6일, 최씨는 부산지방법원 앞에 섰다. 처음으로 가슴 벅찬 5월이었다. 그사이 열여덟 소녀는 일흔넷 노년이 되어 있었다. 최씨는 자신의 행위가 정당방위였음을 주장하며 법원에 재심 청구서를 제출했다. 그가 자신의 일을 말하기로 결심한 건 다른 피해자들의 고백 덕분이었다. 2018년 성폭력 피해자들의 미투는 최말자씨에게도 희망이 됐다. ‘56년 만의 미투’, 그 시작이었다.

재심은 기존 판결을 뒤집는 일인 만큼 엄격한 요건을 충족할 때만 개시된다. 사실관계를 변경할 수 있을 만한 명확하고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거나, 판사·검사·경찰이 직무상 범죄를 저지르는 등 수사·재판의 위법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했다. 공문서 보존규칙에 의하면 형사사건 기록 보존기간은 유죄의 경우, 형의 시효까지다. 재심 사건에서 가장 힘든 것이 증거 수집이다. 최씨 사건 역시 56년 전의 수사·재판 기록은 이미 폐기됐고, 판결문도 국가기록원에서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어렵사리 자료를 끌어모아 재심 개시를 신청했지만 2021년 부산지방법원은 최씨의 재심 신청을 기각했다. 항고 역시 기각됐다.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대법원에 재항고하는 것이었다. 현재 최씨는 1년8개월째 재심 개시 신청에 대한 대법원의 답을 기다리고 있다.

2023년, 다시 5월이다. 지난 5월2일, 최말자씨와 여성단체 활동가, 시민 70여 명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즉각 재심을 개시해 성폭력 피해 여성의 방어권을 인정해달라고 대법원에 요청했다. 여성 인권단체 ‘한국여성의전화’가 진행한 재심 촉구 온라인 서명에는 2020년 5월부터 지난 5월17일까지 시민 3만9706명이 참여했다.

이날 마이크를 잡은 최말자씨는 이렇게 말했다. “사법부는 이 사건이 단지 시대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판결이었다는 부끄러운 변명이 아니라 억울한 판결로 한 사람의 인생이 뒤집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제라도 정의로운 판단으로 책임져야 합니다.”

그는 당시 기준으로 옳았던 판결을 시대가 달라졌으니 다시 판단해달라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최말자씨는 이렇게 요구한다. “위법하게 진행된 수사와 재판 결과를 이제라도 바로잡아 달라는 것이다. 인권과 평등이라는 사법적 정의는 그때도 존재했다. 이것을 어긴 것이다. 그러니 법대로 해달라.” 최씨는 왜 59년 전 그 판결에 대해 재심을 요청하는 것일까? 시간을 거슬러 가보자.

최말자씨가 5월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재심 개시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말자씨가 5월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재심 개시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성의 정조에 대한 찬반 갈등

1964년 5월6일 저녁 8시 무렵,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니 이미 해가 져서 사방이 어두웠다. 최말자씨(당시 만 18세)의 언니는 배가 아프다며 여동생에게 설거지를 부탁했다. 최씨가 설거지를 마친 후 방에 돌아와 쉬고 있는데 친구 둘이 대문을 두드렸다. “먹을 게 귀하던 시절이었거든요. 친구가 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남은 떡을 주려고 온 거예요. 그런데 친구들 뒤를 쫓아온 남자(가해자 노 아무개씨·당시 만 21세)가 대문 밖에 있어서, 친구들이 다시 나가지를 못했어요. 그 남자는 자꾸 할 말이 있다며 친구들을 불러달라고 했고, 얘들은 나가기 싫다고 하고요. 내가 나가서 중간 역할을 해야겠더라고요.” 무엇보다 최씨는 마실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에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모른다는 노씨에게 그럼 길을 알려주겠다 말하고 집을 나와 동쪽 논두렁길로 걸었다. 그사이 친구들은 서쪽 길로 빠져나갔다. 그제야 최씨는 큰길을 따라 나가라고 길을 알려주고 뒤를 돌았다. 그러자 노씨는 그의 양어깨를 잡고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이내 배 위에 올라타 키스를 시도했다. 최씨는 몸부림을 치며 그를 밀쳤다. 도망치고, 붙잡히고, 바닥에 넘어지길 세 번이나 반복했다. “그때는 젊으니까 나도 힘이 있었거든요. 두 번째까지는 내가 정신이 있었어. 그런데 세 번째 넘어졌을 때는 땅에 머리를 부딪혔는지 정신을 잃은 거예요. 바닥이 얼음처럼 단단했거든요.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니까 내 배 위에 올라 있던 사람이 없고 입 안이 뭐가 이상했어요. 그래서 그걸 뱉어내고 집으로 뛰어간 거예요.” 최씨는 당시 자신이 노씨의 혀를 잘랐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사이 잘린 혀를 치료하러 병원에 갔던 노씨는 절단된 혀가 있어야 봉합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최씨의 집에 쳐들어와 혀를 찾아달라, 병원에 같이 가달라 요구했다. 최씨가 알아서 하라며 대꾸를 하지 않았더니 노씨는 어머니가 자고 있는 큰방 문을 열려고 했다. 최씨는 결국 그와 함께 혀를 찾아서 병원에 가야 했다.

사건이 알려진 건 노씨 가족들이 부산인권상담소를 찾아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한 5월12일 이후였다. 당시 5월13일자 〈부산일보〉에는 ‘키스 한 번에 벙어리’라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노씨 가족들은 “총각이 좀 뻣났기로서니(어긋났기로)” 혀를 깨물어 말을 못하게 만든 것이 억울하다며, 최씨를 고소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인권상담소를 찾아갔다는 것이다.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관련 기사가 이어졌다. 다음 날인 5월14일, 〈국제신문〉은 한쪽 지면을 할애해 한국 사회에서 키스가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다. “요즘 '아프레' 아가씨에게는 키스쯤 대단찮은 것이다. ‘뭐 키스 한 번쯤 했다고 당신 애인이나 된 줄 생각하세요?’ 정도다. 그러나 법률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한국 땅에선 입술은 제2의 정조로 간주된다고 최 양의 변호사는 말한다. (중략) 한국의 경우 과연 처녀의 입술이 총각 혀를 두 동강 낼 만큼 값진 것인지 한번 생각해볼 만한 문제가 아닐까?(당시 기사 인용)" 당시 대개의 기사들은 노씨가 최씨에게 가했던 성폭력이 아니라, 혀가 잘렸다는 가해자의 상해를 부각했다. 동시에 여성의 정조(키스)와 남성의 신체(혀)의 가치를 비교하며 여론 재판을 부추겼다.

두 사람이 경찰 조사를 받게 된 것은 5월23일, 노씨가 자신의 친구들을 데리고 최씨의 집을 찾아와 행패를 부린 일 때문이었다. 친구 열 명을 데리고 온 노씨는 부엌 식칼로 마루를 내리찍으며 ‘나를 불구로 만들었으니 책임을 져라, 아니면 최씨를 죽이겠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자신의 혀가 잘린 데에 대한 보상금으로 마구간에 있는 소를 가져가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최씨와 가족들은 노씨를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 혐의로 고소했고, 노씨는 중상해죄로 최씨를 맞고소하며 경찰 조사가 시작되었다.

“경찰서를 간다고 집을 나와서 마을을 걸으면 사람들이 ‘저 가시나가 뭘 어쨌다’ 하면서 욕을 하는 게 다 들리는 거예요. 누구한테 힘들다는 말을 할 수도 없고. 안 되겠다, 죽어야겠다, 하고 물에 빠지려고 선창가도 가고 수면제를 사와서 그걸 다 먹고 의식을 잃기도 하고 그랬어요.”

아버지와 함께 검찰에 조사를 받으러 간 첫날, 최씨는 구속됐다. “검찰청에 가니까 일단 저만 데리고 들어가서 수갑을 채워요. 그러더니 딱 요만한, 한 평쯤 되는 방에 앉히더니 조사를 하는 사람이 구둣발을 의자 위에 올려놓고 나를 죽일 듯이 보는 거예요. ‘남자랑 성관계 해봤나’ ‘니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살래’ ‘이년아, 남자를 병신 불구로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 될 거 아이가’ 때릴 것처럼 손을 올리면서 겁을 주더라고요.” 밤이 되어 조사를 마친 그는 포승에 묶여 다른 여성들과 버스를 타고 부산교도소로 옮겨졌다. 열여덟 살이던 그는 자신이 구속됐다는 사실도 몰랐다.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불법 구금이었다. 당시 검사는 구속영장을 제시하지 않았고,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나 진술을 거부할 권리 등도 알려주지 않고 최씨를 구속했다. 조사 과정에서 불리한 진술을 강요한 행위 역시 재심 신청 요건 중 ‘수사의 위법성’에 해당된다.

재심 개시를 신청할 때 최씨 변호인은 이 같은 위법성을 증명할 수 있는 최씨의 일관된 진술과 당시 구속 결정에 대한 언론 보도 등을 증거자료로 제출했다. 위법성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없더라도 개연성 높은 당사자의 진술은 증거능력을 가질 수 있다. 재심으로 이어진 대부분의 국가 폭력 사건은 당시 시대상과 역사적 사실, 당사자 진술 등을 수사 위법성의 증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심 신청을 기각한 재판부는 이 같은 위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최씨가 변호인을 선임해 재판을 받았으며 재판 중 수사 과정에서 겪은 부당한 일을 호소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교도소에서 보낸 첫 밤을 최씨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린 날이었거든요. 감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코로 숨을 쉴 수가 없게 냄새가 나는 거예요. 처음 왔으니 ‘똥통’ 옆에 누워서 자라는데 다른 방법이 있나. 그러고는 며칠을 밥을 못 먹었어요. 밥을 물에 말면 쌀벌레가 둥둥 뜨더라고. 이 벌레가 얼마나 큰지 머리랑 몸 색깔이 달라. 그런 밥이랑, 퍼진 보리밥을 한 움큼 주는데 내가 입을 못 대고 남기면 주위에서는 살겠다고 그걸 다 먹었죠.”

최씨와 달리 노씨는 구속됐으나 곧 “혀가 잘려 벙어리가 된 정상을 참작, 구속이 해제(〈부산일보〉 1964년 9월4일자)”됐다. 최씨만 130일이 넘는 기간 동안 구속 수사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인정해 최씨는 무혐의로, 노씨는 강간미수 혐의 등으로 검찰에 송치했으나 검찰은 강간미수 혐의를 법적 판단 대상으로 보지 않고 노씨를 특수주거침입 및 특수협박죄로만 기소했다. 최씨에 대해서는 중상해죄로 기소했다. 결국 최씨의 정당방위 이유가 사라지면서 혀 절단이라는 중상해 결과만 남게 되었다. 가해자인 노씨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성폭력 피해자인 최씨는 중상해죄로 노씨보다 더 높은 형량인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검찰이 강간미수 혐의를 기소 대상에서 제외한 점이 ‘재심의 첫 단추’라고 봤다. 검사가 이 사건을 어떤 시선으로 보았는지, 그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수사를 유도하고 진행했을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것이다. 특히 최씨의 진술과 당시의 언론 보도 등을 종합해보면, 피의자(최씨)가 형사사법적 절차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정황은 개연성 있는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간미수’ 기소하지 않은 검찰

검사 측이 이 사건을 강간미수로 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최말자씨의 변호인 김수정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키스를 했던 당시 상황을 제압이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보지 않았던 것”이라 답했다. 이는 1심 판결문에도 언급된다. “노씨가 혀를 넣었다는 것뿐이지, 그와 같은 강제 키스가 최씨로 하여금 반항을 못하도록 꼼짝 못하게 해놓고 한 것은 아니라 할 것”이라는 대목이다. 최씨가 스스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러한 사법부의 판단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고 심재우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논문 〈강제 키스에 대한 혀 절단 사건은 정당방위인가 과잉방위인가?〉(1995)에서 이 같은 판단에 문제를 제기하며 “오히려 소리를 질렀을 때 그것을 저지하려고 입을 틀어막는다거나 목을 조르는 경우 더 큰 위험을 부담할 수 있을 터인데, 왜 그것을 정당방위의 성립요건으로서 방위자에게 요구해야 하는가. 피해자가 피고인을 세 번이나 넘어뜨리고 그 배 위에 올라타 엎드려 강제 키스를 할 때 그 공격 행위를 방어하는 유일한 수단은 혀를 깨물어 격퇴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부산지방법원의 유죄판결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1차 공판을 취재한 1964년 10월21일자 〈국제신문〉 보도에 따르면, “재판의 초점은 ‘노 피고가 최 피고에게 키스를 하게 된 것은 최씨의 어느 정도의 묵인 아래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라는 데 있었다.” 검찰이 강간미수 혐의를 기소하지 않음으로써, 성폭력이라는 사건의 본질은 사라지고 키스를 유발한 최씨의 책임 여부가 심판대에 올라가게 된 것이다. 재판 방청이 인기를 모은 이유이기도 했다. 160명이 방청할 수 있는 법정에 1000여 명의 방청객이 몰려들어 공판이 연기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당시 언론 역시 ‘혀 절단 사건’을 여성과 남성의 대결 구도로 보도하며 가십성 보도를 재생산했다. 1964년 9월11일 〈부산일보〉는 최씨가 구속된 후 독자들이 신문사에 투고한 찬반 의견을 소개하는 기사를 몇 차례에 걸쳐 내보냈다. 여성 독자들은 ‘치한들을 향한 통쾌한 경고’라고 반응했고 남성 독자들은 ‘남성의 공격 본능을 미리 알고 피하지 않고, 자신을 그대로 뒀다면 반승낙이나 같다’며 반박했다는 내용이다. ‘키스법을 제정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라는 남성 독자의 편지 전문을 소개하기도 했다. 일부 신문에서는 최씨의 얼굴을 그대로 싣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최씨의 인권이 가장 많이 침해된 곳은 재판정이었다.

〈부산일보〉 1964년 10월22일 기사는 검사의 구형이 있었던 2차 공판(10월21일)의 문답을 그대로 옮겼다. 검사는 최씨에게 ‘으슥한 벌판까지 혼자 따라간 이유는?’ ‘키스가 뭔지 아느냐?’ ‘키스할 때 혀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나?’ ‘처음부터 노씨에게 호감이 있었던 거 아니냐?’ ‘노씨와 결혼해서 살 생각은 없는가?’ 하고 묻는다.

최씨의 변호인은 최씨를 ‘농촌에서 자란 순박한 처녀’라며 그의 행위가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지만, 그가 방청객들에게 박수를 받은 순간은 따로 있었다. 변호인이 “노군이나 최양이 이미 다른 처녀 총각과 혼인하기 어려우니, 변호인(본인)이 팔 걷고 나서 양측 부모들로 하여금 한 번 더 마음을 돌리게 해서 혼인 중매에 나서겠다”라고 열변을 토한 순간이다. 방청객들은 변호인에게 격찬을 보냈다. 성폭력 피해자 최씨에게 판사·검사·변호인 할 것 없이 모두가 가해자인 노씨와 결혼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사회·문화·법률상 어쩔 수 없었다?

재판부는 해당 사건의 원인이 최씨의 내부에 있을 수 있다는 판단하에 ‘처녀의 키스 순간의 심리 상태’에 대한 정신과 의사의 개인적 의견을 묻고 이를 유죄 판단의 근거로 이용하기도 했다. 대학병원 정신과 의사 박 아무개씨는 키스 순간, 최씨의 내면에 ‘남성에 대한 본능적인 그리움과 호기심,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동시에 떠올랐으며 이런 미움과 사랑의 갈등에서 혀를 자르는 발작(히스테리) 반응을 일으킨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중과 언론인들 앞에서 진행된 현장검증에서는 최씨는 노씨에게 키스 당하는 모습, 바닥에 넘어져 추행당하는 모습 등을 재연해야 했다. 현재 재심 개시 청구를 맡은 최씨의 변호인은 재판 과정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법관의 재판지휘권 남용 역시 재심 개시 요건인 ‘수사의 위법성’에 포함된다고 봤다. 반면 재심 신청을 기각한 부산지방법원은 이 같은 검증의 방법, 감정의 내용, 법관의 언행 등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부적절하고 청구인의 인격을 침해할 우려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성차별이 뿌리 깊게 존재하던 당시의 사회·문화·법률적 환경에서 이루어진 소송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위법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최말자씨와 변호인은 ‘지금도 틀렸듯, 그때도 틀렸다’고 주장한다. 최씨는 “그때도 대한민국 법이었고 지금도 대한민국 법”이라며 "판결을 바꿔달라는 게 아니라 사실에 입각해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변호인은 법원이 이 사건을 다시 판단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판결이 내려진 1965년에도 존재했던 헌법과 형사소송법을 무시하고 피해자의 존엄과 기본권을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수정 변호사는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지을 가장 결정적인 근거로 최씨의 중상해죄를 철회할 수 있는 새로운 증거를 들었다. 노씨의 병적증명서다. 이에 따르면 노씨는 당시 판결이 확정되고 4개월 뒤인 1965년 6월에 육군에 입대했고, 군복무 중 베트남에 파병된 후 만기 전역했다. 당시 병역법상 아자(瘂子·언어장애인)는 병역 면제였음에도 군 생활을 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노씨가 언어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마을에 살던 주민이 노씨와 대화할 때 문제가 없었다고 증언한 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언어 기능을 상실했다고 보고 최씨를 중상해죄로 처벌하였던 것을 무죄 혹은 단순상해죄로 인정할 만한 새로운 증거인 것이다.

재심 개시 기각을 결정한 재판부는 당시 판결에서도 노씨가 언어 기능을 전부 상실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유창하게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 즉 발음을 하는 데 곤란을 느끼는 불구 상태로 보고 최씨에게 판결을 내렸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최씨 변호인은 ‘유창한 발음’ 여부를 중상해 판단 기준으로 본 판례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 대법원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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