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책을 출간한 고은 시인. ⓒ시사IN 윤무영

지난해 12월, 고은 시인의 시집과 대담집이 출간됐다. 5년 공백을 깬 복귀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시집 〈무의 노래〉와 대담집 〈고은과의 대화〉는 출간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출판사의 공급 중단 결정에 따라 서점에서 사라졌다. 1월20일, 고은 시인의 책을 출간한 실천문학사의 윤한룡 대표는 입장문을 통해 1월17일부터 국내 모든 서점에 고은 시인의 신간을 유통하지 않고 있으며 “공급 중단은 여론의 압력에 출판의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이 날 때까지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책 공급 중단 결정이 실천문학사 출간 도서 불매운동 등에 따른 불가피한 판단임을 밝힌 것이다.

고은 시인의 복귀에 대한 여론은 냉정했다. 문학 전문 매체 〈뉴스페이퍼〉가 지난 1월7~8일 1989명(문인 172명, 독자 1817명)을 대상으로 고은 시인의 문단 복귀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99.2%가 복귀에 반대했다. 적절한 자숙 기간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응답자 97.8%가 ‘복귀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답했다. 출판사는 대담집 〈고은과의 대화〉의 부제에서 고은 시인을 ‘전 지구적 시인’으로 명명했지만, 대중은 그를 반성과 사과 없는 성폭력 가해자로 평가한 셈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출판인은 이번 고은 시인의 복귀가 공식적 문단 활동을 개시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도 충족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미투 의혹에 대한 명확한 입장 표명이 선행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번 시집과 대담집에서 고은 시인은 자신에 대한 의혹을 회피해온 기존 태도를 유지했다.

고은 시인은 2018년 2월 최영미 시인이 성추행 의혹을 폭로하자 같은 해 3월, 영국 일간지 〈가디언〉을 통해 “자신과 아내에게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 집필 활동을 계속할 것이다”라는 입장을 밝힌 뒤 국내 언론과는 일절 접촉하지 않은 채 잠정적 집필 중단에 들어갔다. 이후 5년간 국제 문학축제 등에서 시 낭송, 강연 등을 하며 활동했으나 국내 활동은 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최영미 시인과 해당 내용을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10억원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 했으나 이 역시 실패했다. 1심과 2심 모두 패소한 고은 시인은 상고를 포기했다. 이로써 해당 소송은 일단락됐다.

그는 최근 낸 책 두 권에서도 해당 사안에 대해 끝까지 함구했다. 특히 윤한룡 대표가 “경전처럼 매일매일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평가한 대담집 〈고은과의 대화〉는 공동체를 향한 고은의 헌신과 소명, 나아가 문인으로서의 철학에 초점을 맞추며 고은의 독보성을 조명하는 데 그친다. 대담을 진행한 캐나다 시인 라민 자한베글루는 고은 시인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

“선생님께서는 치열하게 정치적 활동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글을 쓰셨습니다. 단기 투옥되셨을 때도 계속 시를 쓰셨는지요?” “선생님께서는 어린이나 농부 그리고 마을 여인네들 등 보통은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해 쓰시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더 가까움을 느끼십니까?” 과거 치적에 대한 찬사는 있고, 성추행 의혹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신간이 출간된 지난해 12월 〈실천문학〉 제146호도 출간되었다. 이 계간지에는 고 김성동 작가에 대한 고은 시인의 추모시가 실렸다. 해당 계간지의 편집주간이던 구효서 소설가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실천문학사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이번 〈실천문학〉에 고은 시인의 시가 실리는 줄 알았으면 자신은 반대 의사를 밝혔을 것이라며, 편집 과정에서 편집주간인 본인이 배제되었다고 말했다.

2018년 그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최영미 시인.ⓒ연합뉴스

‘다르게 쓰기·말하기’를 통해 책임지는 문화

2016년 실천문학사는 내홍을 겪었다. 계간지 〈실천문학〉의 문인 편집위원들이 소수 대주주의 출판사 운영과 편집권 장악에 문제를 제기하며 사퇴했다. 이후 실천문학사는 윤한룡 대표 중심으로 운영되어왔다. 구효서 소설가는 “지금의 실천문학사는 규모도 조직도 없이 겨우 유지되고 있는 상태”로 자신 역시 편집위원 사퇴를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번 고은 시인의 복귀를 문단 권력이 작용한 일이라기보다는 실천문학사의 이런 기형적 구조에서 비롯된 일로 평가했다.

권지현 성폭력예방치료센터 센터장은 ‘미투 가해자’의 특성으로, 그가 일해온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미투 폭로 이후에도 가해자의 권력은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의 상징성에 기댄 ‘공생자’들이 그의 비호 세력으로 계속 존재하는 이유다.” 권 센터장은 “사과와 반성 없는 가해자의 복귀를 막기 위해서는 ‘공생자’를 비판하고, 그들에게 ‘가해자의 권력에 기대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라는 사회적 메시지를 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실천문학사가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오혜진 문학평론가는 “‘고은은 왜? 실천문학사는 왜?’라는 질문을 넘어서, ‘우리 사회는 왜 가해자가 반성하는 문화를 만드는 데 거듭 실패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책을 사지 말자’ ‘밥벌이를 못하게 하자’ 같은 경제적 단죄 혹은 교과서나 도서관에서 그의 흔적을 즉각적으로 삭제하는 것 이상의 고민과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투 이후 한국 사회가 학습해야 하는 것은 가해자와 더불어 사는 법이다. 나 자신 혹은 내 가족이나 친구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가해자를 영원히 추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묻고 논의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지금까지 가해자가 자기의 가해 사실에 대해 처절하게 반성하는 방식으로 문학 세계를 바꾼 경우가 매우 드물다.” 가해자가 면죄부를 찾으며 회피할 게 아니라, ‘다르게 쓰기·말하기’를 통해 가해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다음에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미투 이후, 가해자의 복귀에 대한 찬성과 반대를 넘어선 공동체의 질문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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