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장님.” 누군가 ‘형사 박미옥’을 이렇게 불렀다. 강력반장 자리에 오른 게 20년도 더 전의 일이고 이후 승진도 했지만 오랫동안 ‘박 반장’으로 통했다. 2년 전 형사를 그만둔 뒤에도 마찬가지다. 반장이 된다는 건 등산으로 치면 산의 중턱을 넘었다는 의미다. 경위로 승진할 때 동료들끼리 도장을 선물하는 문화도 있다. 영장을 신청할 때 쓰는 도장이다. 그만큼 형사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경찰 조직에서 계급이 높아질 때마다 사고도 그만큼 확장되어야 했다. 반장이 되었을 때의 설렘, 그 초심을 기억하려고 한다.

순경 공채시험에 합격해 경찰 생활을 시작한 박미옥씨는 1991년 한국의 첫 강력계 여자 형사가 된다. 23세였다.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여자형사기동대 희망자를 모집했고 그가 속한 민원실이 모집 업무를 담당했다. 지원해보라는 상사의 말에 덜컥 형사가 되었고 첫 단속을 나간 날 사우나실의 여성 도박꾼을 검거했다. 이후 ‘최초의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최초의 여성’ 강력반장, 마약범죄 수사팀장, 강력계장 등 걷는 길마다 전설이 되었다. 탈옥수 신창원과 연쇄살인범 정남규 사건 수사를 주도했다. 만삭 의사 부인 살인사건, 한강변 여중생 살인사건, 숭례문 방화사건 현장을 지휘했다. 〈시그널〉 〈히트〉 〈감시자들〉 등 꽤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경찰 관련 조언을 하거나 인물 자체로 모티브가 되었다.

2년 전, 제주 서귀포경찰서 형사과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형사 생활 30여 년, 정년을 8년 앞둔 시점이었다. 제주도에 후배 형사와 집을 지었다. 마당 한편에 서재 겸 책방을 만들었다. 25평 규모, 3000여 권의 책이 있다. 후배 형사들과 지인, 또 그 지인들이 오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내고 책을 읽고 쉬다 간다. 그 책방에서 책을 썼다. 제목은 〈형사 박미옥〉. 형사 초창기, “수갑 채우는 맛을 아십니까”라고 방송에서 당차게 말했던 부끄러운 경험을 고백하기도 하고 범인에게 물어뜯겨 지금도 흉터가 남은 부상의 기억도 전한다. 터진 손등을 가진 범인에게 느낀 인간적인 미안함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가해자도 피해자도 간단치 않다는 진리에 닿게 된다. “형사가 현장에서 이런 고민을 했더라는 얘길 하려던 건 아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고민해야 하고 무엇보다 나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한 줄로 요약하면 ‘형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해야 하고, 수사는 결국 사람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일이나 다름없다고 믿는 전직 형사’가 건네는 이야기다. ‘하도리 박 반장’에게 ‘사랑하는 일’에 대해 물었다. 형사 다음으로 많이 나온 단어는 당연히 ‘사람’이었다.

자신의 30년 형사 생활을 정리한 책 〈형사 박미옥〉을 최근 출간한 박미옥 작가. ⓒ시사IN 이명익

30년 형사 인생이 전생 같다고도 했는데, 전생의 이야기를 왜 쓰기로 했나.

여형사가 드물다 보니 많은 형사들이 말했다. “박미옥이가 경험한 걸 책으로 좀 쓰지.” 나는 사건이 끝나면 잊는 편이다. 다른 경찰서로 발령이 나도 USB 하나조차 가져가지 않을 만큼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사건이 끝나면 그 기록을 잊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올레길을 걸으며 제2의 인생을 제주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책을 내보라고 3년간 설득했다. 형사로서 내 시각이 좀 다르다고 생각한 것 같다. 사건을 사건으로만 대하지 않고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사건을 일으키게 되는지, 강력범죄 현장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있는지 읽어낸 것 같다. 그동안 ‘사회적 단어’만 써왔기 때문에 솔직한 감정을 안 써봤다. 켜켜이 묵혀둔 감정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고 글을 쓰며 나를 직면했다. 내게 잘한 일 같다.

순경으로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중학교 때부터 꿈을 조사할 때 기자 아니면 경찰이라고 답했다. 7남매의 막내라 내가 중학교 때 아버지가 회사 생활을 이미 접었다. 고2 때 취업정보센터라는 곳을 찾아가서 어떻게 경찰관이 될 수 있는지 찾아봤다. 고등학교 졸업이면 자격이 되더라. 집을 속였다. 체력장을 보는 날 경주 불국사에 갔고, 학력고사를 보러 갈 것처럼 집을 나왔지만 시험을 안 봤다. 경찰관이 된 다음 엄마에게 약속했다. 내 모습대로 살 수 있게 내버려두라고. 그렇게 시작한 경찰 생활이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다. 어떻게 보면 주목받는 자리였고 달리 보면 누군가 주시하는 자리다.

최초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참 외로운 단어다.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들어야 하니까. 스물세 살에 시작해 살아남아야 하니까 열심히 했고 그사이 승진의 기회도 왔다. 서른세 살에 강력반장이 되었다. 또 다른 형사들한테는 굉장히 낯선 존재였을 거다. 35세쯤 되니 여자 남자 구분 없이 동료들 속에서 편안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끼리 밤을 새우고 담배를 맞대고 얘기할 때 그 틈에 못 들어가는 외로움도 있었다. 그 시절 그 상황에서 최초라는 단어는 그냥 숙명 같았다. 외롭다고 생각하기보다 낯선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최초, 최고보다 ‘그 사람이 맡은 사건은 어땠다’고 기억되길 바란다.

1991년 즈음, 서울지방경찰청 화보용 사진 촬영 현장에서 박미옥 당시 형사(맨 왼쪽)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야기장수 출판사 제공
1991년 즈음, 서울지방경찰청 화보용 사진 촬영 현장에서 박미옥 당시 형사(맨 왼쪽)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야기장수 출판사 제공

글을 쓰며 누군가의 아픔을 건드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쓰다 멈추고 울기도 하고 한동안 놓아도 보았다. 이분 저분 입장을 고려해 못 쓴 일화가 많다. 허락을 구하는 과정에서 접어버린 이야기도 있다. 이름은 감췄지만 대형 사건은 많이 노출되어 있다. 그 일을 내 시선으로만 다루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같이 근무했던 분들이 책을 읽고 나서 왜 그때 그 사건은 다루지 않았냐고 하는데, 내 개인의 고백을 쓸 것 같으면 일기로 그쳤을 것이다.

2011년 강남경찰서 강력계장으로 부임할 때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

형사 생활을 하며 배운 것이 있다면 위기는 선물을 가지고 온다는 점이다. 강남서는 뜻하지 않게 갔으나 두 가지 숙제가 있었다. 우선 (경찰의 유착) 비리 척결이 첫 번째 과제였다. 형사과 인원 3분의 2가 넘게 교체되고 나머지는 형사 경력이 없는 새내기로 채워졌다. 또 강남에 얼마나 많은 기자들이 있나. 항상 30분 안에 출동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고 그런 삶을 3년6개월 살았다. 현장에 제일 먼저 가서 장악하지 못하면 기사가 먼저 나오는 곳이다. 사건의 본질이 흐려진 채 이슈만 남는 경우도 있었다. 그걸 알 만한 연차라 사건 해결만 중요한 게 아니라 정무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 언론이 무엇을 중시할지 생각해야 한다는 걸 염두에 두었다. 못된 상사를 만나고 나면 다음 상사가 수월하다는데 강남서가 그런 곳(못된 상사)이었다. 사회병리 현상이 1년 정도 빠른 곳이라 접해보지 못한 사건들이 있어 긴장감이 높았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사건을 많이 담당했다.

사건 규모는 상사의 평가나 밖에서의 시선일 뿐이다. 대중을 상대로 글을 쓸 때는 사건의 균형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숭례문 방화 사건의 경우 다행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국민을 두 번 울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복원 가능한 감식을 진행했다. 복원 전문가들과 시작부터 같이했다는 데 의미를 둔다. 또 사건에서 법의학 증거를 많이 얘기하는데 형사소송에서 법의학의 법적 증거능력은 미미하다. 아무리 정교한 법과학적 증거라도 범죄행동을 직접 증명하지 못하는 이상 간접증거다. 형사의 발품이 증명해내야 한다. 만삭 의사 부인 사망사건이 그랬다. 법의학적 증거를 형사들이 형상화시켜 유죄를 받게 한 사례다. 그때 가정주부들이 집에도 CCTV를 달아야 하냐고 말하기도 했다.

2008년 2월 숭례문 화재 현장 화재 감식을 지휘 중인 박미옥 형사(맨 왼쪽). ⓒ이야기장수 출판사 제공
2008년 2월 숭례문 화재 현장 화재 감식을 지휘 중인 박미옥 형사(맨 왼쪽). ⓒ이야기장수 출판사 제공

신창원 사건도 있었다. 세상이 추앙하려는 범죄자의 실체를 밝히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희대의 탈주를 했고 (장기간 검거되지 않아) 많은 경찰이 망신을 당한 사건이다. 본청에서 특별팀을 만들고 추적했는데 여론은 점점 악화되었다. 나도 8개월 동안 전국을 돌았다. 검거 이후 언론에서 아차 싶었던 것 같다. ‘너무 띄워줬구나.’ 급하게 신창원의 실체를 알고 싶다고 출연 요청이 왔다. 방송에 나가 그는 영웅이 아니라고 말했다. 쫓는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강도 강간 사건이 추가로 나오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그가 절도한 돈을 어디에 나눠줬다는 미담에 가려졌다. 티켓 다방 여성들(그의 은닉 방법이었다)의 선불금을 갚아주기도 했지만 사실상 그들을 이용한 거다. 신창원이 내 이름의 연관 검색어로 뜨기도 했다. 이상하게 그 후 탈주범 전담이 되었다.

형사의 진짜 체력은 이골이라고 말했다. 밤 12시에 퇴근해도 새벽 2시에 뛰어나와야 하고 큰 사건이 터지면 기약이 없어서다.

너무 자기 자신이 없는 것 아니냐고 누군가 질문하던데 내가 역으로 말했다. ‘이게 곧 나이지 않은가.’ 대학을 포기하고 꿈을 선택했다. 민원실의 교통 경찰관이 되었을 때 느낌과 ‘담당 형사’가 되었을 때 느낌은 달랐다. 이 무게감이 내게 뿌듯함으로 왔던 것 같다. 형사 생활이 삶의 터전이었다. 나는 일상과 형사를 동일시했다. 두 개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본 내가 별종일까? 어릴 때부터 철학 서적을 좋아했는데 항상 내 앞에는 〈니체의 말〉이 꽂혀 있다. 상사가 극복이 안 될 때, 사건 관계자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을 때 펼쳐 봤고 계속해서 현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감정을 소모하기보다는 매번 증명하려고 하는 편이었다. 하나의 길을 가려고 하면 9가지를 버리는 성격이다.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증거인 정액을 입에 물고 2㎞를 걸어 경찰서까지 온 일도 있었다. 수많은 피해자들을 만났을 텐데.

많은 피해자가 기억나지만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무너진 피해자를 안고 갈 때보다 그래도 일어서겠다는 의지를 가진 피해자를 만날 때 일을 진행하기가 낫다. 피해자를 믿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면 내 감정까지 일으켜 세우며 가야 한다. 그 여학생의 마음과 내 마음이 같을 것 같다. 직면해야 넘어서는 게 아닐까. 얼마 전 아이를 데리고 책방에 오신 분이 질문했다. 두렵지 않았느냐고. 두렵다고 했다. 그걸 뛰어넘는 나를 나에게 선물해야 그다음을 살 수 있는 것 같다고 답했다. 처음 경사가 되었을 때도 1년 만에 도망치고 싶었다. 지금 도망치면 계속 도망치겠다는 생각이 들어 직면했고 어느새 30년이 지났다.

남성 중심의 조직에서 여러 일을 겪었다. ‘시집도 안 가는 보이시한 여자 형사’에 대한 관심을 비롯해 얼굴마담이냐는 비아냥도 들었다. 세상의 편견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흉악범을 검거하는 형사가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형사를 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사고하게 된 것 같다. 교도소 출신 납치범을 쫓을 때 온양에서 범인을 놓쳤다. 당시 내가 유행하는 부츠를 신고 있었다. 하이힐은 아니지만 뛰어보니 이건 아닌 거다. 범인이 건장한 남자였는데 몸싸움을 하는 동안 내가 허리춤을 놓쳤다. 남자는 사시미 칼을 들고 그대로 줄행랑쳤다. 칼보다는 형사인 나를 보고 도망친 범인이 눈에 들어왔다. 현장에서 돌아와 내가 한 일은 집에 실내 자전거를 놓는 것이었다. 평생 실내 자전거를 3대 정도 썼고 재작년에 버렸다. 체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그 방향으로 간 거다. 생각을 뒤집어보면 균형이 생기는 것 같다.

형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해야 하고, 수사는 결국 사람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일과 다름없다고.

강력 형사를 오래 하는 사람은 왜 강력 형사를 오래 할까? 형법도 그렇고 형사소송법도 그렇고 사람 때문에 법을 만들었다. 법은 적용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다. 해석이 법보다 앞서는 게 판례다. 사건과 피해자를 어떻게 해석하고 그렇게 해석한 것을 입증하는 게 판례가 되는 거라면 결국 법도 사람이 중심이다. 간단한 원리다.

교도소 담벼락 위를 걷는 사람이 형사라고 했다. 실수하면 누군가의 인생이 망가질 수도 있고 반대로 스스로 교도소 안에 떨어질 수 있다.

대형 빌딩 여직원 전용 라커룸에서 절도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내부 여직원이 유력 용의자였다. 카드 사용처에서 참고인 6명이 용의자로 한 사람을 지목했다(당사자가 강하게 부인하는 사건이었는데 결국 잡힌 범인이 그와 닮은 사람이었다). 동료 형사들이 유력 용의자를 범인으로 믿고 있었다. 근데 원칙이 그거잖나. 억울한 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고. 그때 용의자를 구속했다면 파직되었을 것이다. 순간 멈춰서 생각할 줄 아는 힘이 필요한 것 같다. 내 생각이 어디로 가는지 살펴야 한다. 피해자 마음에 너무 동의하는 건 아닌지, 가해자 말에 현혹되는 건 아닌지. 말을 통해 사람을 믿지 않는다. 살아온 역사, 걸어온 길을 본다.

2005년 1월 서울 양천경찰서 마약범죄수사팀장 시절의 박미옥 작가(오른쪽). ⓒ시사IN 포토
2005년 1월 서울 양천경찰서 마약범죄수사팀장 시절의 박미옥 작가(오른쪽). ⓒ시사IN 포토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단번에 어떤 사람인지 아는 내공이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편견을 경계하는 것 같다.

직업에 대한 편견만 해도 얼마나 많나. 당해본 걸 타인에게는 안 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롤모델이 없었다. 스승이 있을 뿐이다. 각각 조폭 수사, 경제 수사, 절도 수사를 잘하는 사람에게 백지를 들고 가 필요할 때마다 배웠다. 편견이 없어야 장점이 보이는 게 아니라 편견을 극복해야 장점이 보이더라. 여자라서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그게 30년 형사한테 할 질문일까. 그 시절은 편견보다 더 겁나는 게 비리였다. 사법체계조차 잘 잡혀 있지 않던 시절에 형사를 시작했다. 체포영장 제도가 생기기 전에는 현장에서 원칙을 지키고 인권을 보호하는 게 더 큰 숙제로 보였다.

방송 출연은 거절했지만 조언은 많이 했다.

여형사가 드물던 시절에 소매치기를 잡으니까 난리가 났고 〈경찰청 사람들〉에 출연해 인터뷰를 했다. 얼굴이 노출되면 잠복도 어렵다며 방송을 줄여주다가 신창원 사건 때 또 내보냈다. 어느 시점에 용기가 많이 생겼고 그때 방송 출연은 안 하는 대신 이면의 일을 충분히 하겠다고 말했다. 고현정씨가 출연한 〈히트〉는 내가 수사본부에 특별팀을 데리고 들어간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 그게 아니어도 드라마 속에 잘못된 내용이 많았다. 폭력 사건만 나면 유치장에 들어간다거나 검사가 총을 차고 있다거나. 영화판이나 드라마판에는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서 딴 세상을 보는 맛도 신선했다.

여경 무용론에 대해 현장은 성별에 좌지우지될 정도로 만만하지 않다고 했는데 평소 경찰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아쉽지는 않나.

의식주 다음의 욕구가 안전이다. 거기서 경찰 업무는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기대치만큼 비난받는다고 생각한다. 그 비난이 결국 우리를 반성하게 하고 시스템을 고치게 한다. 자신 있어 하는 경찰관을 가장 경계한다.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물 같은 현장의 유동성을 고려하면 끝까지 고민하는 자가 많은 변수를 최소화시킨다. 그래서 스스로를 경계하라고 말한다. 평상시 직원들과 술을 자주 먹은 이유도 내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말이든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현장의 실수가 최소화되는 것 같다. 경험한 것을 경계하고 겪지 않은 일을 두려워해야 한다.

정년을 한참 남기고 퇴직을 결정했다.

(직급이 높아지면서) 필드에서 멀어지더라. 앉아서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형사들은 스스로 겪은 일이 자산인데 자꾸 말을 보태는 사람이 되어갔다. 또 직업이 삶의 목표일 수는 없는데 긴 인생, 범인 잡는 얘기만 하다 마무리할 수 없었다. 철저하게 계획을 했다. 33년이면 연금 붓는 기간이 끝나는 시점이기도 했다. 52세, 얼마나 좋은가. 인생의 갱생기다. 체력도 남아 있고 호기심도 왕성할 때 다른 직업을 선택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박미옥씨가 후배 형사와 제주도에 마련한 서재 겸 작은 책방. ⓒ이야기장수 출판사 제공

책방은 어떤 공간인가.

살인사건이나 데이트 폭력 사건을 보면 가족이나 부부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저지른 경우가 많다. 사랑을 원하는 사이 상대 마음을 못 본 것이다. 감정이 보이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철학·인문·죽음·정신분석 등에 대한 책이 많다. 자기 감정을 먼저 봤으면 했다. 〈파리의 심리학 카페〉라는 책이 있는데 상처받은 사람들이 언제든 와서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심리상담가의 카페에 대한 얘기다. 자신과 대화하고 나면 타인이 더 잘 보이고 타인 앞에 잠시 멈춰 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 들른 손님의 친구가 최근 다른 일을 하다가 경찰대학에 갔다고 했다. 책에 사인을 해주며 또다시 이 길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어 방황이 되거든 이 책을 초대장이라 생각하고 오라고 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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