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디시)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초창기 디시에는 ‘스타크래프트 갤러리’, 일명 ‘스갤’이 유명했다.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열리는 서울 코엑스까지 경기를 보러 다니던 나는 한동안 ‘스갤’에서 눈팅을 하며 놀았다. 서로를 ‘흉’라고 부르는 낯선 문화부터, 1초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글들이 올라오는 게시판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수백 명(혹은 수천 명)이 모여 있는 단체 오픈 채팅방 같았달까. 게다가 압도적인 위트와 짤방 제작 실력으로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 ‘난 인물’들이 지루할 틈 없이 분위기를 띄웠다. 그중 한 사람이 겪은 일이다.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디시인사이드 본사. ⓒ시사IN 박미소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디시인사이드 본사. ⓒ시사IN 박미소

어느 날 스갤 정모가 열렸고 유명한 유저 한 명이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멋진 흉’이었던 그가 여성 이용자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이후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의 닉네임은 여성 성기를 뜻하는 조어로 바뀌어 불리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몇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조롱이 점차 모두의 놀이로 번져갔고, 그는 사라졌다.

나는 그의 소멸이 가상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공개된 인터넷 게시판에서 여성 이용자에게 가해진 성적 조롱은 그 게시판을 즐겨 찾던 다른 여성들에게도 모욕감을 남겼다. 내 아이디가 언제든 ‘성기’로 대체될 수 있다는 서늘한 감각. 익명성 뒤에서 행해지는 ‘능욕 놀이’는 그 누구의 비판도 받지 않았고 이후 나 역시 '스갤'을 떠났다. 하지만 이 일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얼마 전,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디시 우울증갤러리에 대한 기사를 썼다. 갤러리 내 일부 성인 남성들은 ‘꼬심·설득·조르기·칭찬·협박’ 같은, 마치 매뉴얼처럼 전승되는 그루밍 전략들로 여성 청소년들을 착취했다. 10대 여성들은 관계 안에서 쉽게 신상이 노출되고 사진이 유포됐으며, 그 일에 휘말린 자신을 자책하며 극단적 상황에 내몰렸다. 한 취재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울증갤러리 오프라인 모임에서 본 모든 10대 여학생들의 팔에는 자해 흔적이 있었다.”

기사를 마감한 이후, 개인 SNS로 낯선 계정의 이용자들이 말을 걸어왔다. 제보를 빙자한 떠보기, 우울증갤러리 유저들이 모인 디스코드 방에 내 이름이 거론된 걸 캡처해 약 올리기, 욕 좀 해보라며 도발하기. 이런 메시지들을 차단하며 문득 과거 ‘스갤’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익명성이란 얼마나 큰 비겁함이고 치졸함인가.

하루 평균 방문자 290만명, 평균 페이지뷰 1억7000만 회. 익명성을 기반으로 디시는 20년간 국내 인터넷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이제라도 변화는 필요하다. 텔레그램·구글 같은 플랫폼도 이용자의 휴대전화 번호나 이메일 주소 같은 정보를 확보한다. 범죄 피해가 발생했을 때 가해자를 특정하기 위해 꼭 필요한 최소한의 장치다. 하지만 디시는 이마저도 확보하지 않는다. 디시에서 불법 정보를 유통하거나, 악의적으로 사이버불링을 하는 유저들이 해외 서버를 경유하는 방법을 공유하며 ‘경찰은 어차피 못 잡는다’고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다.

김유식 디시인사이드 대표. ⓒ시사IN 포토
김유식 디시인사이드 대표. ⓒ시사IN 포토

디시의 김유식 대표는 2011년 〈스마트PC사랑〉과의 인터뷰에서 “유튜브는 건들지도 못하면서 국내 사이트만 못살게 군다”라며 인터넷 실명제를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디시의 주 이용자 중 미성년자는 거의 없다고 말하며 “디시가 성인 전용 사이트는 아니지만 청소년 권장 사이트가 될 생각도 없다. 뉴욕의 할렘가 수준이라 학생들은 와도 적응을 못한다”라고 선을 그었다.

아직도 같은 생각일까? 수많은 청소년들이 사이트를 방문하고 심지어 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있는 지금, 영향력이 큰 사이트에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 ‘못살게 구는 일’일까? 우울증갤러리 폐쇄는 유일한 정답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최소 규제 원칙’을 유지하더라도, 온라인 성범죄 등의 피해를 구제하고 적극적으로 심의할 수 있는 과감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이 필요하다. 디지털 시민을 보호할 장치를 정치권이 마련해야 한다. 예고된 재난을 방치하는 동안 공범자만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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