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WBC 중국전에서 9회 초 역전 홈런을 친 후 환호하는 체코 야구 국가대표팀의 모습.ⓒAP Photo
2023 WBC 중국전에서 9회 초 역전 홈런을 친 후 환호하는 체코 야구 국가대표팀의 모습.ⓒAP Photo

202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최대 스타는 단연 오타니 쇼헤이다. 일본 대표팀 소속 오타니는 결승 라운드 경기를 위해 전세기편으로 3월17일(한국 시각) 미국 마이애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장에서 오타니는 체코 야구 국가대표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체코는 세계 최고 야구선수로부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팀이었다.

프로리그가 활성화된 동아시아 팀과 야구가 국기인 쿠바 정도를 제외한 WBC 출전국은 선수단을 거의 메이저리그나 마이너리그 선수로 채운다. 하지만 체코에는 현역 마이너리그 선수도 한 명 없었다. 그럼에도 1라운드 첫 경기에서 중국을 8-5로 이겼다. 개최국 일본에 2-10으로 패했지만 시속 164㎞ 강속구를 던지는 일본 선발투수 사사키 로키에게 2안타로 한 점을 뽑아냈다. 선발투수 온드레이 사토리아는 1회 일본 강타선을 삼자범퇴로 처리했다. 아웃카운트 두 개는 삼진이었다. 2회엔 지난해 일본 프로야구에서 56홈런을 때린 무라카미 무네타카를 선두타자 삼진으로 잡았다. 역시 무실점. 3회 1사 2루에선 오타니마저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이후 전력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8점 차로 패했지만 기대 이상의 선전이었다.

다음 날 한국전에서 2회까지 0-6으로 뒤졌다. 하지만 다음 7이닝 동안 3득점 1실점으로 좋은 경기력을 보였다. 최종 호주(오스트레일리아)전에선 6회까지 1-1 스코어로 팽팽했다. KBSn에서 체코 경기를 중계한 프로야구 강타자 출신 장성호 해설위원은 “과거 국제 대회에서 만난 유럽 팀들과는 달랐다. 10년이 지나면 한국 팀이 질 수도 있다는 느낌이었다”라고 말했다.

첫 출전인 체코는 이번 대회 최대 목표를 중국전 1승으로 삼았다. 그래서 중국전에 가장 좋은 투수들을 투입했다. 그럼에도 야구 역사와 산업 규모에서 비교할 수 없는 강팀들을 상대로 선전했다. 심지어 베스트 전력도 아니었다. 한국야구학회 회원 서영원씨는 지난해 연말부터 체코 대표팀을 자원봉사로 도왔다. 그는 “자국 리그인 엑스트라리가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타자 대다수가 불참했다. 직장에서 휴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스포츠에서 약한 팀이 강한 팀을 잡는 이변은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하지만 체코의 이번 선전은 이변이 아니다. 준비된 결과였다.

체코 야구의 역사는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야 유의미한 야구 활동이 시작됐다. 자국 내 최고 인기 스포츠는 아이스하키이고, 그다음이 축구다. 야구는 순위가 한참 아래다. 비유하자면 개발도상국이다. 하지만 성장 속도가 가파르다.

한국 대표팀이 WBC 1라운드에서 또다시 탈락하자 일부 언론과 야구인은 “더 열심히 훈련해야 한다”라는 답을 제시했다. 학생 선수 학습권을 강화해온 정부 정책을 수정하자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체코는 강훈련으로 강한 팀이 되지 않았다. 체코 대표팀은 1월1~11일 자국에서 단체 훈련을 실시했다. 일과는 오전 9시30분 시작해 오후 4시30분에 끝났다. 토마시 오베스니 체코 야구협회 경쟁관리 부회장은 “최고의 선수를 뽑았다. 코칭스태프와 협회는 적절한 가이드를 할 뿐이다. 일정이 끝난 뒤 개인 훈련은 자유이지만 팀 차원에서 선수를 붙잡고 훈련시키는 건 맞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스페인 발렌시아 전지훈련에선 연습 경기 위주로 스케줄을 짰다. 엑스트라리가 소속 선수는 대개 직장인과 학생이다. 그래서 휴일인 주말에 주로 경기가 열린다. ‘지옥 훈련’을 할 시간 자체가 없다.

체코 대표팀 훈련 스케줄에서는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소집 4일째부터 나흘에 걸쳐 네 차례 강의를 했다. 심리학, 훈련법, 영양 섭취, 피트니스 등이 주제다. 코칭스태프는 별도로 세미나를 했다. 단기전에서 선수 컨디션을 유지하는 방법 등에 대해 논문을 읽고 토론했다.

체코는 세계 야구에서 변방이지만 미국 메이저리그와 교류가 활발하다. 수도 프라하와 제2 도시 브르노에는 야구장 여러 면을 갖춘 콤플렉스가 건설돼 있다. 독일 레겐스부르크와 함께 유럽에선 가장 좋은 시설이다. 이곳에서 세계 야구 지식 중심지인 미국에서 축적된 연구 성과를 받아들여 연령대별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메이저리그의 지원 아래 전문가를 초빙하기도 한다. 체코 야구협회 스태프나 코치, 선수가 유럽연합(EU)이나 체코 정부의 교육 스포츠 연수 프로그램을 활용해 미국 구단이나 대학에서 연수를 받는 사례도 많다. WBC를 앞두고는 경쟁국 경기 영상과 투구 및 타구 트래킹 데이터를 입수해 대응 전술을 토론했다. 체코 엑스트라리가가 한국 KBO리그 규모로 성장할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다. 하지만 ‘지성’이라는 점에서 체코 야구는 야구 강국임을 자부하는 한국에 한참 앞서 있다.

한국 야구의 위기를 보여준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연합뉴스

훈련 시간 늘리는 게 한국 야구 혁신의 해법?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기 전 동아시아 경제에 대해 “노동과 자본의 양적 투입에 의존한 성장을 해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는 지적을 했다. 크루그먼이 동아시아 경제에 결핍돼 있다고 본 요소는 기술 혁신이다. 세계 야구는 무서운 속도로 혁신이 이뤄지고 있다. 세 번 연속 WBC에서 실패를 겪었음에도 노동시간 확대, 즉 ‘더 많은 훈련’을 주장하는 한국 야구계에 여전히 유효한 지적이다.

체코의 성취는 ‘표준화된 정보와 지식’이 국제 스포츠에서 어떤 파괴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체코 대표팀이 활용한 트래킹 데이터 측정 장비는 메이저리그가 2000년에 처음 도입해 지금은 일본과 한국 프로야구 전 구단, 타이완 프로야구 일부 구단이 채택하고 있다. 장성호 위원은 “데이터와 분석 방법에서 세계 야구가 하나가 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물론 데이터는 데이터일 뿐이다. 하지만 객관적인 사실을 보여준다. 데이터가 쌓이면 분석이 가능해진다. 이를 바탕으로 생체역학 등 관련 학문과 결합해 새로운 이론과 훈련 방법이 나왔다. 2000년대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패스트볼 구속이 급상승하고 일본 프로야구(NPB)에도 시속 160㎞를 던지는 투수가 속속 등장하는 현상은 이와 무관치 않다. 이런 정보와 지식은 상당 부분 공개돼 있고 세계 차원에서 공유되고 있다. 각국 야구가 단절된 상황에선 규모가 큰 리그가 더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표준화된 정보와 지식이 혁신을 주도하는 환경에서는 체코 같은 나라도 단기간에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한국 야구 감독이나 코치는 자기 분야에서 수십 년 연마한 전문가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언어나 숫자로 풀어내기 어렵다. 이들의 성취는 ‘암묵지’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공유되기 어렵고, 발전이 없다. 오릭스 버팔로스 관계자는 최근 NPB의 변화에 대해 “코치들이 선수에 대한 자료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감독이나 코치가 바뀌더라도 이 자료는 공유된다. 미국 야구 스타일을 받아들였다”라고 말했다. 대다수 국내 구단은 코치가 선수를 어떻게 지도했는지 자료를 남기지 않는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대공장식 운영을 할 때 한국 야구는 수공업 단계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여기에 한국 바깥에선 정보와 지식에 기반한 혁신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 야구의 위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 전직 프로야구단 단장은 “열심히 하는 코치는 많다. 하지만 과거 이론이나 방법에서 발전이 없다”라고 말했다. 민경삼 SSG 랜더스 대표는 “절대적으로 ‘인풋(Input)’이 적다”라고 단언했다. 지도자들이 공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학창 시절 학습권을 박탈당했기에 학습 경험이 없는 지도자가 다수다. 한국보다 훨씬 보수적인 일본 프로야구가 미국발 혁신을 이미 받아들였음에도, KBO리그에선 그 속도가 더딘 이유다. 지금 한국 야구에서 가장 취약한 역량은 혁신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는 코칭이다. 국가적으로 ‘운동 기계’를 양성해온 과거가 만든 굴레이기도 하다.

기자명 최민규 (한국야구학회 이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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