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3일 SVB 본사 앞에 고객들이 줄을 서서 예금 인출을 기다리고 있다. ⓒREUTERS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서 테크·바이오 분야 등에서 스타트업 회사들의 자금줄 역할을 해온 실리콘밸리은행(SVB)과 뉴욕의 시그니처은행이 최근 잇따라 파산했다. 그러자 미국 연방정부와 규제 당국이 사태의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등 부산한 모습이다. SVB 파산에서 비롯된 금융 불안을 조기에 해소하지 못하면 자칫 2008년 최악의 금융위기가 되살아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미국 법무부와 증권거래위원회가 SVB 사태 조사에 착수한 가운데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5월1일까지 이번 사태의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책을 내놓기로 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부실 은행 책임자들의 부당 이익을 환수하고 금융권 재취업을 금지하는 입법을 강화하라고 촉구했다. 의회에선 민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제2의 SVB 사태를 막기 위한 규제 강화를 모색하는 한편 현재 25만 달러(약 3억2600만원)인 예금보장 범위를 대폭 상향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2000억 달러가 넘는 자본 규모를 자랑해온 SVB가 고객들의 갑작스러운 뱅크런을 이기지 못해 이렇게 허무하게 도산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1983년 창업한 이 회사는 특히 팬데믹 기간 중 급성장했다. 지난해 말 총자산이 2090억 달러에 달했으며, 창업 초기 1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던 주가는 2021년 10월 역대 최고치인 753달러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지난해 연준의 잇따른 금리인상으로 저금리 시절 대량 매입한 국채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미실현 손실 규모가 약 160억 달러에 달하게 되었다. 주가도 폭락했다. 결국 불안 심리가 극에 달한 고객들이 하루 만에 420억 달러(약 54조8000억원)를 인출하자 SVB는 파산을 면치 못했다.

2001년 창업해 뉴욕을 주무대 삼아 미국 전역 40곳에 지점을 두고 승승장구하던 시그니처은행도 지난해 말 총자산 1100억 달러, 고객예치금 826억 달러에 달할 정도로 견실한 은행이었다. 하지만 SVB 사태에 화들짝 놀란 고객들이 대거 예금 인출에 나서면서 결국 파산을 면치 못했다. 은행이 파산하면 미국에선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개인당 최대 25만 달러까지 보장한다. 하지만 SVB는 예치금의 약 97%, 시그니처은행은 약 94%가 이런 보장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불안감을 느낀 고객들이 너도나도 인출에 나섰다. 결국 FDIC가 제2의 SVB 사태를 우려해 시그니처은행을 전격 폐쇄했다. FDIC는 시그니처은행을 뉴욕커뮤니티은행에 넘겼다. 그리고 인수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SVB는 분할 매각을 추진 중이다.

연방정부와 규제 당국의 신속한 개입으로 SVB 사태가 촉발한 금융위기는 일단 넘겼다. 하지만 뱅크런 위기가 완전히 가신 건 아니다. 미국 내 상업은행은 지난해 9월 기준 4157개. 이 가운데 JP모건체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 시티은행을 포함해 15개 은행이 총자산 규모 2000억 달러 이상인 초대형 은행에 속한다. 나머지는 대부분 중소형 은행이다. 문제는 이들 은행에 돈을 맡긴 고객들의 인출 행렬이 이어지면 2008년 금융위기보다 더 중대한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금융권과 연방 당국은 이를 경계하고 있다. JP모건체이스를 포함한 11개 대형 은행이 규제 당국과 손잡고 뱅크런 위기에 빠진 캘리포니아 지역 은행인 퍼스트리퍼블릭은행에 300억 달러를 긴급 조달하기로 한 것도 이런 위기감을 반영한 것이다.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의 경우, FDIC의 보장을 받지 못하는 예금 규모가 68%에 달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퍼스트리퍼블릭은행 고객들은 SVB 사태 이후 며칠 새 무려 700억 달러를 인출했다.

SVB 파산으로 시작된 금융 불안이 가중되면서 이번 사태의 원인을 연준의 잇따른 금리인상에서 찾는 분석이 많다. 연준은 1년에 여덟 차례 금리를 정하는데 지난해 인플레를 잡기 위해 무려 일곱 차례나 금리를 올렸다. 그 때문에 2022년 1월에 불과 0.25%였던 금리가 연말엔 4.50%까지 치솟았다. 문제는 은행들이 저금리 시절에 고객예치금으로 국채 및 주택저당채권을 대거 매입해놓은 점이다. 금리가 오르면서 채권 가격이 폭락하는 바람에 대규모 손실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실제 미국 금융업체들이 투자한 국채와 주택저당채권의 미실현 손실액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62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SVB 회장이 감독기관 이사로 활동

SVB를 감독해야 할 규제 당국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SVB는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연은)의 관할이다. SVB는 지난해 말 자금 사정이 악화되자 연준의 재할인 창구를 통해 무려 200억 달러를 차입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연은은 이상 신호를 감지하지 못했다. 애런 클라인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워싱턴포스트〉에서 “샌프란시스코 연은이 SVB의 폭발적인 성장과 FDIC 보장을 받지 못하는 예금의 높은 비율, 재할인 창구를 이용한 대출 등 다양한 위험 신호를 포착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라고 지적했다. 충격적인 사실은 SVB의 그레그 베커 회장이 회사 도산 직전까지 샌프란시스코 연은의 이사회 멤버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버니 샌더스 민주당 상원의원은 “이 사태의 가장 한심한 일 가운데 하나가 SVB를 감독해야 할 바로 그 기관에 SVB 회장이 이사로 있었다는 점”이라고 비판했다.

이번 사태의 본질적 원인으로 전임 트럼프 행정부 시절 금융 규제를 대폭 완화한 법을 지목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인 2010년 의회는 민주당 크리스토퍼 도드, 바니 프랭크 두 의원의 주도로 ‘월가 개혁 및 소비자보호법’을 통과시켜 자산 규모 500억 달러 이상의 모든 금융기관이 주기적으로 은행의 재정 상태를 점검하는 ‘스트레스 테스트’를 받도록 의무화했다. 하지만 이 법이 2010년 7월 오바마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효된 직후 금융계 인사들이 총동원돼 법 조항 완화를 위해 로비에 매진했다. 그 인사들 가운데 베커 SVB 회장도 포함됐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 시절인 2018년 규제가 완화되었다. 스트레스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 금융기관의 자산 규모가 500억 달러가 아닌 2500억 달러로 상향 조정된 것이다. 2017년 약 510억 달러였던 SVB의 자산이 지난해 말 2090억 달러로, 470억 달러에 불과하던 시그니처은행의 자산이 지난해 말 1100억 달러로 몸집을 불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완화된 법 조항 덕분이다. 파산한 시그니처은행 이사진에는 이 법을 주도한 프랭크 전 의원도 포함돼 있어서 논란이 인다. 그는 2012년 정계를 은퇴한 뒤 이듬해 시그니처은행에 들어가 이사로 근무했다. 최근 은행 파산으로 물러날 때까지 지난 10년간 240만 달러의 보수와 주식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 규제 완화법이 통과될 당시 반대의 선봉에 섰던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 등은 이번 사태의 원인을 스트레스 테스트 조건이 500억 달러에서 2500억 달러로 상향된 것이라 지목하고, 이 조항 폐기를 담은 개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규제에 반대하는 공화당이 하원을 장악한 상황이라 법안 통과가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법 통과 당시 이에 동조한 민주당 상·하원 의원이 49명에 달했다. 그 때문에 의회보다는 연준이 재발 방지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유력하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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