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 베레야 씨는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와 여러 웹툰을 스페인어로 번역했다.ⓒ시사IN 조남진

“처음부터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봤다. ‘바비’ 캐릭터가 이렇게 성장하다니 대단하다”라고 쓰인 스페인어 댓글에 1만2258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네이버웹툰 스페인어판에 연재되는 〈Secretos de Belleza〉(직역하면 ‘미인의 비밀’) 마지막 화에 달린 댓글이다. 한국어 원제는 〈여신강림〉. 외모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여고생이 메이크업으로 자신감을 얻으면서 사건이 펼쳐진다. “내 밤잠을 다 가져간 유일한 웹툰” “추가 회차가 나오면 좋겠다”라는 스페인어권 독자들의 아쉬움이 스크롤 아래로 이어진다. 글로벌 누적 조회수 51억 뷰를 돌파했다.

‘바비’는 〈여신강림〉 주인공 ‘임주경’의 영미 유럽권 이름이다. 한국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해외 독자를 위해 맞춤 번역되었다. 지난해 네이버웹툰의 글로벌 이용자가 1억8000만명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원작 이름보다 ‘바비’를 알고 있는 독자가 더 많은 셈이다. 이들은 어떻게 문화적 장벽을 허물고 K웹툰에 빠졌을까. 첫 화부터 인터넷에 유행하는 ‘밈’과 신조어의 향연이다. ‘안녕? 난 주경쓰. 21살이지.’ ‘시력을 포기한다.’ ‘컴싸아라(컴퓨터 싸인펜 아이라이너) 지리구요.’

K콘텐츠는 번역가의 고뇌와 함께 시작된다. 스페인 갈리시아 출신 알바 베레야 씨(30)는 한국 웹툰을 스페인어로 번역한다. 웹툰 번역은 난관의 연속이다. 얼마 전엔 ‘활어회’라는 단어 앞에서 한참 머리를 싸맸다. ‘Sashimi’가 맞을지 ‘Hwal-eo hoe’가 나을지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이 웹툰을 보다가 구글 검색을 하진 않잖아요. 몰입이 깨지지 않으면서도 말맛을 살려야 해요.” ‘몽고반점’도 곤란했던 단어 중 하나다. 스페인어로 비슷하게 옮길 방법이 없어서 결국 각주를 달았다. 50~60컷 분량 한 회차를 번역하는 데 길게는 세 시간씩 걸리기도 한다.

10년 전만 해도 스페인 갈리시아 지역에선 한국어 책 한 권 구하기 어려웠다. 소녀시대와 2NE1 노래를 즐겨 듣던 베레야 씨는 4년 전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왔다. 그러다가 한국 문학 번역에까지 관심이 생겼다. 그 전과는 달라진 K콘텐츠 시장을 체감하면서다. 스페인 대형 서점 어디에서든 정세랑, 최진영 등 동시대 작가들의 번역서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일본 만화책이 전부였던 만화책 코너엔 한국 만화책이 여러 권 채워졌다. “요즘 스페인에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의 삶을 다룬 만화책 〈풀〉이 인기예요. 〈퍼블리코〉라는 스페인 신문사에선 이 책을 ‘2022년 올해의 만화책’으로 선정하기도 했어요.” 스페인에 페미니즘 운동이 확산되면서 국경을 넘어선 여성 문제에 독자들의 관심이 커졌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 문학 번역가가 되기 위해 비교문학 전공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번역료 인상이 필요하다”

K콘텐츠의 인기는 새로운 인력 시장을 열어젖혔다. 그간 외국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데 익숙했다면 이제 한국어를 외국어로 바꿔야 할 일이 늘어난 것이다. 네이버웹툰의 경우 타이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 10개 국어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2021년 네이버웹툰의 연간 거래액이 1조500억원을 돌파하게 된 주요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번역된 한국 웹툰은 5500여 개, 그 뒤엔 인공지능(AI)이 아니라 사람이 있다. 인력시장을 채우는 번역가들은 베레야 씨처럼 현지 사정을 잘 알면서도 한국 문화에 관심 많은 원어민들이다.

‘초월 번역’이라는 신조어는 달라진 번역가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다. 영화 〈기생충〉에서 ‘짜파구리’를 ‘람동(Ram-don, 라면+우동)’으로 번역하거나 ‘서울대 문서위조학과’를 ‘옥스퍼드 대학 문서위조학과’로 현지화한 게 대표적이다. 〈기생충〉을 번역한 베테랑 영화 번역가인 달시 파켓은 칸 황금종려상 수상의 숨은 공신으로 주목받았다.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선 원문 그대로 직역하기보다 뉘앙스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번역가의 역량이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기생충〉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 〈묵향 다크레이디〉 등 국내 웹툰을 중국어로 번역한 이설매 번역가. ⓒ시사IN 이명익

4년 차 한·중 통·번역가인 이설매씨(38)는 이를 ‘현지화’라고 설명한다.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 〈묵향 다크레이디〉 등 국내 웹툰 몇 편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배경에 그려진 간판, 낙서 하나하나를 바꿔야 한다. 중국의 경우 금기 사항이 많은 편이다. ‘한국’이나 ‘서울’ 같은 특정 지명은 ‘K국’ ‘수도’로 바꾸거나, 국기나 마약 그림은 모자이크 처리한다. 욕설과 비속어도 순화해서 표현해야 한다. “한국 웹툰이 인기 있는 이유는 장르적 다양성 때문인데, 그 ‘느낌적인 느낌’을 최대한 못 살리는 게 안타까워요.” 중국 현지 웹툰 플랫폼의 가이드라인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의성어와 의태어가 최고 난도다. 한국 웹툰에 자주 등장하는 ‘슥’ 혹은 ‘스윽’ 같은 의태어는 맥락에 따라 중국어 번역이 달라졌다. 딱 들어맞는 단어가 없어서 몸을 돌리다(转身), 손을 뻗다(伸手), 들어 올리다(抬起) 같은 동사 형태로 표기한다. 다소 어색한 방식이지만 한국 웹툰이 주류가 되면서 중국 웹툰에서도 하나의 문법이 되었다고 이설매 번역가는 말했다. “중국에선 한국 콘텐츠가 주로 ‘어둠의 경로’로 유통되는데 그러다 보니 번역 퀄리티가 좋지 않았어요. 정식 수입이 시작되면서 번역도 훨씬 매끄러워졌어요. 결과적으로 웹툰 수용도도 높아졌고요.” 대형 웹툰 플랫폼들은 이런 이유로 내부에 현지화 전략을 수립하는 팀을 따로 두고 있다.

노동강도에 비해 단가는 낮은 편이다. 언어권마다 차이는 있지만 회차당 번역료는 2만~4만원 수준. 이설매씨는 “들어가는 품에 비해서 소득이 너무 낮다. 2년 이상 버티기가 힘들다”라고 말했다. 국내 웹툰 산업은 1조원대 규모라는데 왜 번역은 저렴한 구조가 유지될까. ‘와이커뮤니케이션’은 웹툰 현지화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다. 네이버웹툰과 카카오페이지 같은 국내 플랫폼이 주요 고객사다. 윤동섭 대표는 웹툰 번역료가 오르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창작자와 플랫폼에 돌아가는 몫이 크다 보니 그 부분을 떼고 나면 현지화와 번역에 돌아가는 금액이 크지 않아요. 번역 업체가 늘어 경쟁도 치열해졌고요. 웹툰 제작사나 플랫폼도 현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막상 비용은 줄이고 싶어 하는 이중적 심리가 있는 것 같아요.”

현지화는 왜 중요할까. 특히, 영어를 거치지 않고 한국어를 바로 아랍어나 인도네시아어로 직역할 수 있는 번역가들의 존재는 K콘텐츠 업계에서 소중하다. 스페인어 번역가 베레야 씨는 오역 문제를 지적한다.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을 스페인어 자막으로 보면서 어색함을 느낀 적이 있었다. ‘동네’라는 단어가 영어 ‘village’로 번역된 부분이었다. “스페인에서 ‘village’는 한적한 시골 마을의 느낌을 줘요. 〈오징어게임〉 배경인 쌍문동의 모습과 맞지 않아요. 한국어로 ‘동네’ ‘이웃’과 비슷한 스페인어 ‘barrio’가 있는데 영어를 거치면서 원작의 의도와 멀어졌어요.” 〈오징어게임〉은 그 외에도 ‘꺼져’라는 대사가 ‘저리 가(go away)’로, ‘오빠’가 ‘올드맨(old man)’으로 오역되면서 논란을 낳았다.

저평가된 번역 노동은 오역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뉴욕에 거주 중인 이소영 한·영 번역가는 ‘K콘텐츠의 성장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번역료 인상”이라고 답했다. “한국 문학 번역가는 보통 ‘투잡’을 뛰어야 해요. 자신을 갈아가면서 작업하기 때문에 더 좋은 작품이 지속적으로 나오려면 더 좋은 환경이 필요해요. 가끔 한·영 번역가 지망생들이 조언을 구하는데 이 판의 현실을 알려야 하는 게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1.5세대 동포인 그는 이혜미 시집 〈뜻밖의 바닐라〉 번역가로 전미 번역상과 영국 시번역센터가 주관하는 사라맥과이어상 후보에 올랐다.

2021년 11월 미국 LA에서 열린 ‘오징어게임’ 놀이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이 극 중 대사를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번역원 아카데미 경쟁률, 5배 높아져

한국 문학의 경쟁력이 입증된 곳마다 걸출한 번역가가 있었다. 지난해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 부커상 1차 후보에 〈저주토끼〉와 〈대도시의 사랑법〉이 올랐다. 두 작품 모두 안톤 허 번역가가 번역부터 해외 출간까지 담당했다. 그는 “번역가가 보여줘야만 영미권에서도 한국에 이런 책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 번역은 기계로 결코 대체될 수 없는 노동이자, 예술이다”라고 말했다.

한국문학번역원(번역원)에서 신진 번역가를 양성하는 이유다. 한국 문학의 해외 번역과 출간을 지원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이다. 번역원에 따르면, 신진 번역가들을 위한 번역 아카데미 경쟁률이 최근 들어 6대 1에서 10대 1까지 높아졌다. 2008년 설립 초기 경쟁률이 2대 1 정도였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증가세다. 한국 문학을 번역·출간하려는 해외 출판사의 신청 건수도 2020년 142건에서 지난해 208건으로 늘었다. 번역원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번역원에서 지원한 출판사 중에는 영국 ‘푸시킨 프레스’ ‘해미시 해밀턴’, 러시아 ‘엑스모’ 같은 곳도 있다. 현지 최대 출판그룹이거나 해외 문학상 수상 실적을 보유하는 등 해외 출판계에서 영향력 있는 곳들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K팝으로 확산된 팬덤의 영향도 없지 않다.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는 방탄소년단(BTS) RM과 슈가가 추천하면서 글로벌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이소영 번역가는 “그것이 한국 문학 인기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없어도 문학적 감각으로 통하는 독자도 많아지고 있어요. 한국 문학의 고유성이 분명 존재하지만, 한국에서도 번역서로 다른 문화권과 교류하듯이 번역이란 희미한 실로 연결되어 있다고 봐요.”

이소영 번역가는 한국적 요소를 잃지 않고도 영문학처럼 읽히는 번역을 추구한다. 이소호 시인의 시 ‘지극한 효심의 노래’를 번역했던 경험을 예로 든다. ‘네’ 라는 단어를 ‘Yes’가 아니라 ‘YES MOM’으로 바꿨는데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존댓말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K장녀’의 마음을 표현했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언니’는 로마자 ‘unni’ 그대로 표현했다. “언니를 ‘older sister’로 직역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어요. 영미권에선 상대방 이름을 부르는 게 훨씬 자연스럽고, 젠더 이분법에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직역이 어울리지 않거든요.” 김치가 kimchi인 것처럼 언니도 unni다. 이처럼 K번역의 세계가 점점 숙성돼가고 있다. 어쩌면 K콘텐츠의 성공은 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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