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구

한때 한국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두고, 한국어의 특수성이 거론되었다. 한국어가 너무 섬세해서 영어로 번역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이러한 주장은 2016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영국 부커상을 수상하는 ‘반례’가 나타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영어로 번역·출판된 한국어 소설이 전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자 이제는 K문학의 경쟁력이 입증되었다는 찬사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번역가는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 부커상은 작가뿐만 아니라 번역가에게 공동으로 수여된다. 번역가 없이 문학적 성과를 논할 수 없다는 의미다. 지난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작 13편에 한국 작품 두 편이 나란히 올랐다.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와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 장르도 작가도 다른 두 작품의 해외 출간은 한 번역가의 손을 거쳤다. 안톤 허 번역가는 2018년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우연히 〈저주토끼〉를 접하고 일면식도 없던 작가와 출판사를 찾아가 번역 제안을 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국내 출간 전부터 해외 출판사 계약을 따냈다. ‘이건 나만 읽기엔 너무 아깝다’는 마음이었다.

“부커상 역사상 같은 번역가가 한 해에 두 권의 책을 올린 적은 딱 세 번밖에 없다. 그중 유색인종은 저밖에 없다.” 번역가가 부커상에 두 작품을 ‘올렸다’고 말하는 그의 답변마다 자부심이 엿보였다. 한국 이름은 허정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국내외를 오가며 자랐다. 어린 시절 이육사와 기형도 시인을 좋아했던 그는 한영 동시통역사로 일하다 2017년 문학 번역에 뛰어든다. 신경숙 작가의 〈리진〉, 강경애 작가의 〈지하촌〉이 첫해 작업한 책이었다. 부커상 후보 지명은 “맨땅에 헤딩하듯” 버틴 결과였다고 그는 말한다.

K콘텐츠가 어디까지 왔는지 알고 싶다면 안톤 허 번역가는 꼭 만나야 할 인물이다. 1월9일 서울 구로구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어가 섬세해서 번역하기 어렵다’는 말에 대해 “한국어가 대단하다면 다른 나라 언어도 대단하다”라고 맞받는가 하면, ‘시 번역은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엔 “모든 번역은 원래 어렵다”라고 답한다. 한국 문학 번역계 안의 국수주의를 격파하면서도, 젊고 새로운 한국 작가를 영미권에 소개해오고 있다. “K콘텐츠 시장이 넓어져서 번역가들이 바빠진 게 아니라, 번역가들이 계속 문을 두드려왔기 때문에 시장이 넓어진 거다.” 번역 없이는 K콘텐츠도 없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부커상 후보에 오른 뒤 많이 바빠졌을 것 같다.

해외에서 인터뷰 요청이 많이 들어왔다. 부커상 이후부터 사람들의 시선도 바뀌었다. 어디 가서 책을 달라고 할 필요 없이 출판사들이 알아서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에선 이렇게 언론 인터뷰를 하면 “번역가가 나선다”는 반응이 여전히 크다. 부커상은 번역가에게도 공동으로 주어지는 상이다. 하지만 국내 보도에선 번역가의 이름이 대부분 빠져 있다. 내가 SNS에 ‘번역가의 이름을 빼면 안 된다’고 지적했더니 ‘번역비 받았으면 되지 않았나’ 하는 댓글이 달리더라. 번역가를 교체 가능한 부속품 정도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해외 언론은 〈저주토끼〉의 번역가가 아니라, 부커상에 작품 두 편을 올린 번역가로 조명한 건가.

〈저주토끼〉와 〈대도시의 사랑법〉은 작가도 장르도 스타일도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두 작품이 유일하게 만나는 지점이 번역가였다. 이게 저널리스트들이 말하는 ‘야마’ 아닌가. 그런데 이 ‘야마’가 ‘한국 문학이 대단하다’는 찬사로 빠져버린다. 번역가를 완전히 무시한 스토리가 나오는 거다. 특히 부커상 인터내셔널 1차 후보에 두 작품이 올랐을 때 그런 보도가 많이 나갔다.

‘K문학의 열풍’으로 조명되곤 했는데.

K문학의 열풍 따위는 없다. 영미권에서는 적어도 없다. 1년에 영미권에서는 한국의 번역서가 10권 나올까 말까 한다. 전업 한영 번역가는 한 손으로 꼽을 만큼 극히 드물다. 겸업은 조금 더 많다. 나조차도 내년에 풀타임으로 하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왜 영미권에서 번역서가 1년에 10권밖에 나오지 못하나?

한국은 번역서를 굉장히 많이 읽는 나라다. 하지만 미국에서 1년간 출간되는 번역서는 전체의 3~5% 정도다. 거기에다 영미권 편집자 중에서 한국어를 읽을 수 있는 편집자가 많지 않다. 이 책이 출판할 만한 번역서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원서를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지 않은 거다. 그러다 보니 한영 번역가는 ‘에이전트’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의 20~30%가 번역이고 70~80%가 이메일 쓰는 거다. 책을 발굴하고 해외 출판사에 프로포절(제안서)을 써내는 게 대부분의 일이다. 완전히 마케팅이고 세일즈다.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번역가와 에이전트가 국내에 점점 생기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번역가가 그렇게 많은 역할을 하는 줄 몰랐다.

내가 자주 쓰는 비유가 있다. 당신이 차를 사는데 시범운전이 되는 차를 사겠나, 안 되는 차를 사겠나. 나는 시범운전을 할 수 없는 차를 열심히 팔려는 카 세일즈맨이다(웃음). 한영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분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번역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범운전을 못하는 차를 팔 수 있는 자질이 더 중요하다.

한국 소설이 부커상 후보에 오른 건 이례적 성공이었나?

정말 기적이다. 두 작품 모두 그 당시엔 그다지 알려진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내 홍보자료에선 “부커상 수상자인 데보라 스미스(〈채식주의자〉 번역가)가 세운 ‘틸티드 액시스 프레스’에서 영어 판권을 사갔다”라고만 말한다. 책이 해외에 출간되고 이 정도로 팔린 것부터 부커상 후보로 나란히 올랐다는 사실이 모두 기적처럼 느껴진다. 부커상 역사상 같은 번역가가 한 해에 두 책을 올린 적은 딱 세 번밖에 없다. 그중 유색인종은 나밖에 없다. 나머지 두 분은 유럽 언어에서 번역한다. 내 입으로 이걸 얘기해야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 이 모든 성공이 나에게 다른 일이 들어오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나는 계속 이 일을 하고 싶다.

〈저주토끼〉를 보고 “책의 첫 문장이 아름답고 이야기가 너무나 재미있고 공포스러우면서도 유머러스해서” 일면식도 없었던 작가와 출판사를 찾아갔다. 실제 번역 과정은 어땠나?

번역은 실패의 과정이다. 완벽한 번역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번역은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번역가들은 대체로 번역본을 내면 다시는 안 본다. ‘내가 이걸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 하는 후회가 너무 싫기 때문에(웃음). 〈저주토끼〉는 좀 달랐다. 특히 책에 수록된 단편인 ‘몸하다’를 퇴고할 땐 텍스트가 작업실에서 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머리가 천장으로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는 문장이 있었는데, 처음 pulled(잡아당겨진)로 썼다가 yanked(홱 잡아당겨진)라는 좀 더 강한 동사로 바꿨다. 어떻게 보면 중요하지 않은 장면이었는데 ‘아 이래서 정보라 작가가 이 장면을 썼구나’ 하는 게 확 와닿았다. 앞으로 힘들 때마다 이 순간을 생각하겠다고 할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지난해 5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부커상 낭독회에 참석한 정보라 작가(왼쪽 네 번째)와 안톤 허 번역가(오른쪽 두 번째)가 청중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몸하다’는 어떻게 영어로 번역했나?

‘몸하다’라는 단어는 한국에서도 잘 안 쓰는 단어였다. 원서에도 ‘월경이 나오다, 월경을 치르다’라고 부연되어 있다. 일단 ‘body’라는 단어가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The Embodiment’라고 지었는데 ‘혼포드 스타’(영국 출판사) 편집자들도 제목이 좀 특이하다고 얘기를 하더라. 마음대로 바꿔도 된다고 했는데 그대로 나가게 됐다(웃음).

한 인터뷰에서 “번역가로서 주류에서 벗어난 문학을 선보이고 싶다”라고 말했다. 번역했던 작품도 여성 작가이거나 SF, 퀴어 문학이 많다.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만드는 기관지가 있다. 한때 표지에 항상 중년 남성 소설가나 시인이 나왔다. 우리나라에는 문학 권력이 존재하는 것 같다. 기성세대 작가들이 해외에 소개되고 여성 작가들은 저평가된다. 그런데 내가 문학 번역을 시작한 2016년에 〈채식주의자〉 부커상 수상이라는 획기적 사건이 발생한다. 한강 작가도, 데보라 스미스 번역가도 젊은 여성이다. 퀴어 문학도 비슷하다. 박상영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를 번역했을 때 “한국에도 퀴어 문학이 있느냐”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한국 문학계에 정말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작품이 많다. 나만 보기 아까운 작품들이다. 시스젠더 헤테로(이성애) 중심의 중년 남성만 한국 문학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소수자 서사를 중심으로 한국 문학 번역을 선보이고자 하는 이유다.

실제 영미권 시장의 반응은 어떤가?

사실 번역한 작품 중에서 제일 잘 팔린 건 백세희 작가의 에세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도 먹고 싶어〉다. 엄청난 베스트셀러다. 영어 제목도 ‘I Want to Die but I Want to Eat Tteokbokki’로 번역했는데 반응이 좋다. 그 외에도 김혜순 시인, 이성복 시인의 산문집도 준비하고 있다. 한영 번역가들 사이에선 한국의 에세이와 산문이 영미권에서 뜨기 시작할 거라고 본다. K콘텐츠 시장이 넓어져서 번역가들이 바빠진 게 아니라, 번역가들이 계속 문을 두드려왔기 때문에 시장이 넓어진 거다. 번역가가 보여줘야만 영미권에서도 한국에 이런 책이 존재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K콘텐츠의 성취에 대해 말할 때 번역가의 노동은 누락되는 것 같다.

번역은 예술이고, 미학적 감각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번역은 기계로 결코 대체될 수 없는 노동이다. 아무리 번역 기술이 발전해도 오역은 생길 것이다. 그럴 때 구글을 고소할 순 없지 않나(웃음). 그래서 항상 인간을 둬야 한다. 번역에 대한 책임과 미학적 감각을 지닐 수 있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소설은 AI가 쓸 수 있겠지만 그 소설 번역은 인간이 해야 한다.

한국 문학 번역 환경의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

돈이 가장 중요하다. 거기서 모든 게 해결되기 시작한다. 일례로 지난 10년간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번역가에게 주는 지원금 액수가 거의 올라가지 않았다. 10년간 얼마나 물가가 올랐는지 생각해보라. 지난 20년간 통·번역가로서 쌓아온 노하우와 전문성이 있는데 여기에 대한 존중을 왜 해주지 않는가.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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