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

한국 시민이 대통령제를 겪은 지 75년째로 접어든다. 민주화 이후만 셈해도 36년이다. 그동안 우리는 대통령 13명(이승만·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을 만났다. 헌법은 대통령을 국가원수이자 행정수반으로 명명한다. 굳이 헌법을 언급하지 않아도 대통령의 영향력은 쉽게 느낄 수 있다. 대통령은 연일 메인 뉴스를 도배하다시피 한다. 실제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숱하게 내리는 사람이다.

그 영향력에 비해 대통령직 자체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적은 편이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 펴낸 〈대통령의 자격〉은 그래서 눈길을 끌었다. 박근혜·문재인 후보가 맞붙었던 2012년 대선을 한 해 앞두고 나온 이 책은 당시 대중과 학계의 인정을 받았다. 저자가 기자 생활을 거쳐 청와대·내각·입법부를 두루 경험한 덕이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의 청와대 수석 등 참모, 환경부 장관(김영삼 정부), 국회의원(16대 한나라당 비례대표)을 지내며 가까이에서 관찰한 ‘대통령이라는 자리의 자격’에 대해 썼다. 2000·2004년 총선에서는 보수정당(한나라당) 선거 전략을 진두지휘했지만, 2012년 대선에서는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

‘보수의 책사’로 불리지만 스스로를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일컫는 그의 저서는 2023년 현재 읽어도 생명력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필요한 능력’이 아닌 ‘선출 이후 대통령으로서 일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이 진정 대통령의 자격이다.” “국가 운영의 전문성은 특정 분야의 기술자적 전문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분야에 정통해지는 과정에서 획득한 국가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와 운영능력을 의미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책임진다는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매사에 두려워하고 삼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선거에 임박해 신선함을 무기로 혜성처럼 등장하는 후보를 일종의 ‘충동구매’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실체가 드러나자 후회하는 식의 행태가 되풀이되어서는 곤란하다.” “구체적 사안에 대한 비판과 정책 제시보다는, 추상적 관념과 일반론적 거시담론을 앞세우면서 자신을 선으로 자처하고 상대방을 악으로 매도하는 후보나 세력은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과거 〈시사IN〉 인터뷰에 담긴 윤여준 전 장관의 정치 전망은 곧잘 들어맞았다. 2013년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가장 큰 문제로 ‘검찰 등 국가기구의 사유화로 인한 공공성 훼손’을 꼽았다. 시민들이 이때부터 특정 국가기구를 누군가의 편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우리 정치를 더 나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비선’ 중심으로 청와대를 운영한다면 큰일이 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박근혜 탄핵 직후 2017년 3월 그는 누가 당선되든 차기 대통령이 받아든 환경이 어려울 것이라며 “국민의 기대치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의 격차가 너무 크다”라고 했다.

0.73%포인트(24만여 표)라는 역대급 1·2위 격차를 낳은 20대 대선의 여파가 한 해 내내 이어졌던 2022년을 뒤로하고 2023년을 맞이하며 그를 만난 이유다. 윤여준 전 장관이 보는 현 정치 정국에 대해 물었다. 각각의 이유로 정치적 무관심이나 혐오에 빠지는 시민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들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현 상황을 가장 책임감 있게 이끌어야 하는 윤석열 대통령으로 집중됐다. 사회 원로이자 합리적 보수로 평가받는 그가 윤 대통령에게 건네는 충고는 하나같이 꼿꼿했다. 2022년 12월28일 세밑에 그를 〈시사IN〉 편집국에서 만났다.

‘보수의 책사’로 불리는데, 당선 전후로 윤석열 대통령이 조언을 구한 적이 있나.

윤석열 대통령은 집안 아저씨뻘이다. 나이는 아래지만, 항렬로 위다. 그래서 선친(그의 아버지 윤석오는 이승만 정부에서 고위공직을 지냈다)이 생존해 계실 때 집안끼리 교류가 있었다. 몇 년 전에 윤석열 대통령의 아버지 윤기중 교수(연세대 명예교수)를 몇 번 뵈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윤 대통령이 검찰에 있다 정치에 뛰어든 것에 대해, 내가 공개 발언한 적은 있다. ‘일생을 검찰이라는 장벽 속에서 국가가 준 권력을 일방적으로 행사하며 평생을 보낸 사람이 어떻게 민주공화국을 통치하겠냐’라고. 그 얘기에 윤 대통령이 엄청 화를 냈다더라. 미운털이 박혔다(웃음).

윤석열 대통령이 유념해야 할 말 아닌가.

검찰은 ‘검사동일체(檢事同一體) 원칙’이 있지 않나(검찰총장을 정점으로 하는 검찰 조직 내 상명하복의 내용을 담은 검찰청법은 노무현 정부에서 폐지되었지만 문화로서 여전히 검찰 내부에 남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검사들이 충고나 남의 얘기를 잘 듣나? 다 거짓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다(웃음).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고, 평생을 그런 문화 속에서 살았다.

2020년 1월10일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맨 왼쪽)과 대검 참모진이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연합뉴스

더 이상 검사가 아니라, 대통령인데.

그렇다. 대통령이 됐고 상황이 어려우니까, 잘해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비판도 하고 충고도 하는 거다. 민주국가의 대통령은 수직적 위계질서의 꼭대기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동료 중 1인자라고 인식해야 한다. 좀 복잡하게 말하면, 국민의 집단의사를 결정하는 과정을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다. 물론 누구나 한계는 있다. 윤 대통령이 뻔히 그런 줄 알면서도 국민이 선택한 거다.

왜 그랬을까.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가 되는 과정만 봐도 상식적으로 이뤄질 수 있나 싶었다. 손바닥에 ‘왕(王)’ 자를 쓰고 토론회에 나가야 좋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쳐도, 그걸 감출 생각을 안 하는 멘탈리티가 뭔가 싶어서 정말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도 당시 국민들은 개의치 않고, 그저 문재인 대통령이 미우니깐, 이길 사람이 윤석열 후보뿐이라는 마음으로 뽑은 것 같다.

정당의 실패이기도 하다.

정당에서 사람을 기르지 못한다. 오히려 정치에 뜻이 있고 괜찮은 젊은이는 견제 대상이 된다. 라이벌이 될지 모르니 밟아서 클 수 없게 만든다. 그렇게 되니 대선 시즌이 되면 인물이 없어서 항상 밖에서 꿔온다. 국민도 정당정치에 대한 혐오감이 극도로 달해 있다. 정치권에서 멀리 있고 인기 있는 사람을 그때그때 불러온다.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나중에는 또 ‘손가락 자른다’고 한다. 번번이 그렇다.

선택받지 못한 야당이 복기해야 할 부분은?

국가의 통치자를 뽑는 데는 도덕성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이재명 후보가 지방자치단체장을 할 때, 어떤 도덕적·개인적 비리 혐의가 나왔다. 드러난 건 아직 없지만 혐의 자체가 있는 건데, 그런 후보를 낸 것은 좀 납득하기 어렵다.

저서에서 지적한 대통령의 자격을 두고 윤석열 대통령을 평가하자면.

윤 대통령은 그걸로 평가한다는 게 어렵다(윤여준 전 장관은 대통령으로서 갖춰야 할 능력을 비전 제시, 정책 수립 및 실천, 제도 운영, 인사, 외교 및 한반도 평화 관리 등으로 꼽은 바 있다). 평생을 검찰에서 생활했다. 딴 세계다. 검사나 판사는 미래를 고민하는 직업이 아니다. 항상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현재에 재구성해서 유죄냐 무죄냐를 따진다. 유죄면 몇 년 형이냐 이것만 고민하면 되는 직업이다. 평생을 그 직업에 종사한 사람이 어떻게 별안간 국가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자질을 기를 수 있나. 못한다.

판사 출신 정치인과 함께 정치를 하지 않았나.

내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모실 때 바로 그 이야기를 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이라 ‘민족 문제를 어떻게 접근할 생각이십니까?’라고 물어보니 묵묵부답이더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왜 대통령이 되려고 합니까’라고 다시 질문하니, 법치 확립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제가 ‘법치 확립은 방법(론)이고, 법치 확립을 통해 어떤 국가 어떤 사회를 만들겠다는 이상이 있을 거 아닙니까’라고 또 물으니, 묵묵부답. 그때 생각했다. 그렇게 머리 좋고 수재라는 양반이 지도자 위치에서 평생 보냈는데 왜 저걸 대답 못할까. 그러고는 깨달았다. ‘아, 이 양반들은 과거에만 매달려 살았잖아.’ 윤석열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런 지도자를 선택하게 된 우리의 상황이 불행한 거다. 본인은 본인대로 굉장히 힘들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선택에 대한 비용이다. 국민이 대가를 5년간 지불하게 될 거다. 뭐 어쩔 수 없다. 그 대가가 헛된 대가가 아니고,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가기 위한 과정에서 치르는, 어쩔 수 없는 대가라고 생각을 해야 한다. 가능하면 대가를 적게 지불하고, 짧게 지불하려는 노력을 하자는 쪽으로 가야 한다. 서구 민주주의는 300년 가까이 걸렸다. 우리는 민주화(1987년)부터 보면 몇십 년밖에 안 됐다. 경제는 압축성장이 가능할지 몰라도, 물론 거기도 엄청난 부작용이 있지만, 정치는 죽었다 깨어나도 압축성장이 안 된다. 속도와 시기를 단축할 순 있어도, 과정을 다 거쳐야 한다. 그 자체를 비관할 필요는 없다.

그 시기를 지날 방법을 대개가 아직 잘 못 찾은 것 같다. 정치 혐오·무관심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 정치가 안 바뀐다. 외면할수록 정치는 나빠진다. 후손을 위해서라도 후배를 위해서라도, 이걸 자기가 좀 해줘야 단축이 된다는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정치인이 해주길 바란다? 안 된다. 민주시민들이 해야 한다. 우리는 정치를 떠나서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혐오해서 그냥 놔버리면, 득 보는 건 혐오세력이다. 그걸 반복해서는 안 된다. 살아보니 암흑이고 절망이래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면 구멍을 찾게 되더라.

2022년 12월27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회의 역할도 잘 안 보인다.

몇 년 전 미국의 어느 상원의원(에번 바이)이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이제 미국에는 의회는 없고 당파만 있다’라고 했다. 짧지만 얼마나 강렬한가. 문제의 핵심을 잘 짚었다. 정당은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형성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 그러한 정당끼리 갈등을 일으키는 건 좋은 갈등이다. 대화와 타협으로 그걸 조절하고, 안 될 때는 표결을 한다. 본회의를 통과하면 그게 국민 총의가 된다. 그것이 곧 국민 통합 과정이다. 의회민주주의 원리를 지키면 저절로 국민 통합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여러 차례 그걸 지적했다. 항상 국민 통합을 따로 얘기하는데, 의회의 기능을 살릴 생각을 안 하면서 마치 국민 통합이 따로 있는 것인 양 말하지 말라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직접 말했나.

앞에서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고, 오찬 행사를 갔을 때 이 말만 했다. 그때도 여야가 싸울 때였다. ‘한국의 야당은 항상 (대통령 임기) 초기에는 극한투쟁을 한다. 어느 당이나 다 그랬다. 민주당은 안 그런 줄 아느냐. 그러니까 이해하고, 대화를 통해 해결할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랬더니 문재인 대통령이 웃고 말더라. 자기도 당대표를 해봤으니까.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껏 야당 지도부를 안 만났다.

이재명 대표가 개인적으로는 비리 혐의를 받고 있더라도 어쨌든 국민이 선택한 국회의원이 됐다. 그런 다음 그 당이 대표로 만들었다. 현역 의원이고 제1야당이자 원내 다수당의 대표가 됐으면, 윤 대통령이 반드시 바로 만났어야 했다. 앞으로 국정을 원만하게 끌어가려면 협조하자고 했어야 한다. 그런다고 검찰이 수사를 못하나? 윤 대통령은 검사 시절 그렇게 했나? 검찰은 검찰대로 수사한다. ‘피의자하고 내가 무슨 대화를 하지?’ 하는 태도로는 의회 민주주의를 못하는 거다. 그냥 검사를 해야지.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를 강조한다.

자유를 그렇게 강조하는 사람이, 자유라는 가치의 핵심인 언론 자유를 용인하지 않는다. MBC 취재진을 비행기에 안 태웠다. 그러면서 자유를 얘기할 자격이 있나. 자기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르는 거다. 헌법도 강조하는데, 헌법 제1조 1항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럼 자유를 얘기했으면 평등도 얘기해야 된다. 민주주의 핵심 가치가 자유·평등 이 두 개다. 법원은 대법원부터 지방법원 청사까지 ‘자유·평등·정의’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최근에는 지지율이 오르는 모양새인데.

주변에 의견을 물어봤더니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 최근에 있었던 몇 가지 일 때문에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좋게 보는 것 같다. 화물연대 파업 종료와 3대 개혁 이야기. 얼마나 실천할지는 두고 봐야 하는데, 3대 분야 개혁을 미룰 수가 없는 시급한 과제로 여기는 건 옳은 문제의식이다. 힘들더라도, 윤석열 대통령이 자신이 좀 손해 보더라도 개혁의 길로 가겠다고 했다. 그건 높이 평가하고 싶다.

국민의힘 전당대회 룰이 ‘당원 100%’로 바뀌었다.

방송에 나가서 ‘당원이 100만 정도가 되면 절대로 조직 동원을 못한다’고 말했다. 알아봤더니 국민의힘 당원이 TK에만 치중된 게 아니고 수도권에도 상당히 많다더라. 그 정도 균형이면 당대표를 뽑는데 왜 국민에게 물어보냐, 당원이 그걸 결정할 능력이 없다는 얘기냐고 했다. 그랬더니 또 그걸 국민의힘에서 윤 아무개가 이랬다고 막 (전파)해서, 내가 웃으며 말이나 하겠냐고 했다. 또 누가 전화 걸어서 뭐라고도 하더라.

문제 제기를 하는 쪽은 대통령의 발언 이후 일사불란하게 이뤄진 개정 과정과 당원투표나 의총이 없었다는 등 ‘숙의 부재’를 지적한다.

민주 정당의 모습이 아니다. 그걸 지적하는 것이면 백번 좋다. 대통령은 정당이라는 조직을 자기 하부구조로 생각하면 안 된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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