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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내가 중학교 때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동두천을 떠나 인천으로 왔다. 그러나 인천 송림동 목재단지 안의 사택은 더 나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오죽하면 술 취한 미군과 클럽 언니들의 악다구니로 가득 찼던 보산리가 그리웠을까. 공장이 쉬는 날이면 원목 더미에 올라갔다. 서쪽으로는 제철, 제강, 전기, 제분, 자동차 회사의 굴뚝이 보였고, 동쪽으로는 전자, 봉제 공장의 낮은 지붕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남쪽 판자촌 너머로는 다 쓰러져가는 시립아파트가 보였다. 나의 미래는 그 풍경처럼 잿빛이었다. 엄마가 뺑뺑이를 돌려 선택된 중학교는 선인재단에 있었다. 상고에 진학하겠다는 내게 담임은 재단에 있는 여상을 강요했다. 전교 1등이 가고, 2등도 가고, 3등도 가야만 하는 그 학교를 거부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고 했다. 7년 전 꿈 분석을 받기 전까지 꿈에서 수십 년을 그 건물에 갇혀 있었다. 그 시절 나를 숨 쉬게 한 것은 직원들이 퇴근한 뒤, 사무실 톱밥 난로 앞에서 책을 읽는 순간이었다. 그때 읽은 책 중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이 있었다. 아마 고2 때였을 거다. ‘난쏘공’을 읽으며 소설 속 ‘기계도시’가 인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난장이(난쟁이)’ 가족의 가난에 비하면 나의 가난은 엄살이라고 생각했는데 고3 때 공장이 망했다. 선인재단 아래 산동네로 이사 가서야 우리의 가난 역시 난장이 가족의 그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방도로가 나며 반이 잘려 나간 외주물집 안방 창으로 멀리 답동성당의 종탑이 보였다. 창문 아래로는 아랫집의 지붕이, 그 아랫집의 옥상이, 또 다른 지붕과 지붕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그곳이 오래전 중국인 묘지가 있던 곳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1년 동안 창문 아래 매달려 그 풍경을 연습장에 그렸다. 그러면서 가난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기보다 난장이 마을 ‘릴리푸트읍’을 꿈꾸기로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대학병원 원무과에서 일하며 또 다른 난장이 가족들을 만났다. 그들이 병원비를 감당 못해 야반도주하면 병원비를 받으러 서울 가리봉동 기찻집, 난곡동 산동네, 시흥 뚝방 동네를 헤맸다. 돈을 받기는커녕 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어 쌀이나 라면을 들여주고는 받지 못한 병원비보다 그들의 내일을 걱정했다. 시흥 뚝방 동네에서 포장마차를 하던 부부는 병원비를 받으러 간 내 앞에서 말없이 생선을 구웠다. 연탄불 앞에 쭈그리고 앉아 연기 때문에 눈물을 찔끔거린 지 2시간 만에 아내가 입을 열었다. 병원비 대신 그들의 이야기를 주머니에 넣고 나와 흐려진 눈으로 시흥천을 바라보았다. 스모그가 분명할 안개가 뚝방을 덮고 있었다. 그 뚝방을 걸으며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했다. 애초에 나만을 위한 미래는 없었다. 영수, 영호, 영희. 난장이, 꼽추, 앉은뱅이는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살고 있었다.

5년을 다닌 직장에 사표를 낸 1986년 2월, 〈침묵의 뿌리〉를 들고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탔다.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은 탄광마을 사택 촌을 돌아다니다가 사북역으로 가는 길에 녹지 않은 얼음 밑으로 흐르는 검은 시냇물을 만났다. 그 검은 물이 내 안으로 흘러 들어와 물었다.

“너는 어디로 갈 거니?”

1987년 봄, 인천의 빈민 지역을 답사하다가 만석동까지 갔다. 동인천역에서 화평철교를 넘어서는 순간 ‘난쏘공’의 기계도시가 떠올랐다. 제분 공장과 제재소를 지나 산동네를 헤매다 나와보니 철길이 있었다. 기름때가 낀 갯벌 위로 난 철길을 걷다가 전봇대마다 붙어 있는 ‘광부 모집’ 광고지를 보았다. 동두천과 사북, 그리고 만석동이 이어져 있었다. 그 철길 어디쯤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그날로 철길 가 판잣집을 얻었다. 우리 공부방이 기찻길 옆이 된 이유다. 이듬해 문을 연 공부방에서 전현직 동일방직 노동자인 엄마들을 만났다. 그곳이 〈인간문제〉 속 선비와 간난이, ‘난쏘공’의 영희가 다닌 방직공장과 영호·영수가 다닌 전기 회사, 자동차 회사가 있는 은강이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의 무대이자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공간이기도 한 인천 만석동 일대.ⓒ시사IN 이명익

가난한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일

조세희 선생님을 만난 건 1997년 잔뜩 흐린 여름날이었다. 공부방 초등부를 돌보다 2층으로 올라와 저녁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허옇게 머리가 센 사람이 불쑥 들어왔다. 그 사람이 조세희 선생님이라는 것을 안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조세희 선생님?”

“나를 아세요?”

“그럼요. 제가 고등학교 때 ‘난쏘공’을 읽고 이렇게 살고 있는걸요.”

선생님이 허름한 우리 집을 둘러보며 말씀하셨다. “제가 몹쓸 짓을 했군요.”

그날 선생님께서 만석동이 기계도시 은강의 무대라는 것을 확인해주셨다. 길지 않은 대화를 나눈 그날 이후 집회 현장에서 카메라를 든 선생님을 만나면 반가웠다. 너무 멀리 계셔서, 혹은 용기가 없어서 다가가 인사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의 시선은 항상 카메라 뒤 선생님의 시선을 좇았다.

나는 문학을 제대로 공부한 적도, 습작기를 보낸 적도 없다. 그러니 따로 글쓰기 스승도 없다. 그런 내가 얼토당토않게 선생님을 좇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나를 이 자리로 이끈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만은 잊지 않고 살고 싶었다.

1999년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쓰는 동안 절실하게 원한 것은 작가가 되는 게 아니라 가난한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었다. 첫 책이 나오고 10년이 넘도록 스스로 작가라고 고백하지 못하면서도 말하고 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작가로서의 자의식보다 목소리를 내는 난장이라는 자의식이 컸기 때문이다.

2021년에 낸 소설 〈곁에 있다는 것〉을 쓰면서 기계도시 은강을 불러왔다. 그렇게라도 선생님께 닿고 싶었고, 기억하고 싶었다. 선생님과 은강으로 이어진 인연이 내게는 운명이었고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이승을 떠나는 선생님께서 난장이들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실까 걱정된다. 그래서 선생님께 약속드린다. 1997년 은강의 판잣집 2층에서 만난 한 난장이가 그 이웃들 곁에서 냉소하지 않고, 말과 글을 포기하지 않고 살겠다고. 그러니 이제 편히 쉬시라고.

기자명 김중미 (작가·기찻길옆작은학교 상근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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