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연합뉴스

부동산 개발에는 엄청난 돈이 든다. 건설사업의 추진 주체(시행사)인 재건축조합이나 개발업자들은 돈이 없다. 빌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행사들은 영세해서 신용도가 낮다. 또한 건설사업에서는 수익(분양대금)이 발생해서 돈을 갚기까지 빨라도 3~5년 걸린다. 이런 사업에 누가 돈을 빌려주려 할까. 저신용도의 차입자에게 거액을 수년 동안 빌려줘 묶어놓아야 겨우 원리금을 받을 수 있다. 더욱이 해당 사업이 망해서 본전도 찾지 못할 리스크까지 있다.

돈을 빌리려면 이런 악조건들을 극복해야 한다. 우선, 수년이 아니라 수개월 정도의 단기에 원리금을 모두 돌려주겠다고 투자자들을 설득해야 한다. 돈을 떼일 위험이 없다는 확신을 투자자들에게 심어줘야 한다. 그런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5년 동안 써야 할 돈을 ‘3개월째 갚는다’라는 조건으로 빌려도 괜찮은가. 또한 영세한 시행사가 아무리 ‘나를 믿어줘’라고 빌어도 냉정한 투자자들이 넘어갈까?

■ 가정을 현실로 바꾼 금융기법

그러나 이런 ‘안 되는 일’을 ‘되게 만드는’ 비결이 있다.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부동산 PF)’이란 금융기법이다. 부동산 PF 가운데 최근 수년 동안 널리 사용된 방식은 대충 다음과 같다.

먼저 법인(법적인 인간)을 하나 만든다. 이 법인은 법적으로만 존재하는 페이퍼컴퍼니. 그러나 법인(권리와 의무의 주체)인 만큼 돈을 빌려주고 빌릴 수 있다. 고양이나 강아지는 차입·대출의 법적 주체로 인정되지 않지만, 법인은 가능하다. 법인 설립 목적은 ‘유동화’다(‘유동화 법인’).

다음 단계에서는, 유동화 법인이 시행사에 1000억원을 빌려줬다고 ‘가정’한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면 이와 동시에 당신에겐 ‘원금과 이자를 돌려받을 권리(대출채권)’가 발생한다. 은행에 1000만원을 예금한다(=빌려준다)는 것은 1000만원에 대한 대출채권을 보유한다는 말과 같다. 유동화 법인 역시 앞의 가정 덕분에 1000억원짜리 대출채권을 보유한 것으로 간주된다.

유동화 법인이 1000억원과 이자를 받게 되어 있다면, 이 사실을 기반(‘기초자산’)으로 돈을 빌릴 수도 있지 않을까? 미래의 변제능력이 충분하니 말이다. 그래서 이 법인은 예컨대 만기 3개월인 1억원짜리 채권(유동화증권) 1000장을 발행·매각하는 방법으로 돈을 빌릴 수 있다. 투자자 입장에서도 (5년이 아니라) 3개월 뒤에 원리금을 돌려주겠다고 하니 끌릴 만하다. 더욱이 1000억원의 뭉칫돈이 아니라 10억원(1억원짜리 유동화증권 10장)이나 100억원만 빌려줄 수도 있다.

유동화 법인이 이 증권을 팔아 조달한 1000억원을 시행사에 넘기는 것으로, 당초의 ‘가정(유동화 법인이 시행사에 대출)’은 현실에서 실현된다. 시행사가 이 돈으로 5년 동안 번듯한 아파트 단지를 완공해 분양하면 그 대금으로 빚을 최종 청산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런데 유동화 법인은 불과 3개월 뒤에 투자자들에게 원리금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 약속은 어떻게 지키지? 답은 차환이다. 유동화증권을 다시 발행해서 새로운 투자자(혹은 더 빌려주겠다는 기존 투자자)에게 팔면 그 돈으로 이전의 빚을 갚을 수 있다. 이 과정을 (분양대금으로 최종 청산이 이뤄질 때까지) 되풀이한다. 차환은 ‘카드 돌려막기’와 비슷하다.

만약 시행사가 은행으로부터 1000억원을 빌렸다면, 이 돈은 원리금 상환이 끝나는 5년 동안 양측의 관계 속에 묶인다. 그러나 앞선 이야기에서 1000억원은 3개월을 주기로 자유롭게 금융시장을 흘러 다닌다. 그래서 유동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줄거리엔 중대한 허점이 있다. 1000억원짜리 대출채권의 발생, 이를 기초로 한 유동화증권, 되풀이되는 차환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모두 ‘유동화 법인이 시행사에 1000억원을 빌려줬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해당 시점엔 그런 일이 없었다. 투자자들이 가정을 믿고 유동화증권을 샀기에, 그 가정이 사후적으로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허약한 가정을 ‘굳건한 믿음’으로, 나아가 현실로 바꿔버린 뭔가가 있다. 바로 보증이다.

재무구조가 탄탄하고 신용등급이 높은 다른 기업이 ‘시행사가 유동화 법인에 돈을 갚지 못하면’ 혹은 ‘유동화 법인이 투자자들에게 갚지 못하면’, ‘내가 대신 갚겠다(보증)’라고 계약했던 것이다. 이른바 ‘신용보강’이다. 이런 ‘보증 기업’들은 주로 건설회사(시행사의 프로젝트에 실제 건축을 담당하는 시공사로 참여)나 증권사(유동화 등 자금 중개를 주관하고 수수료를 받는)들이다. 투자자들은 시행사나 유동화 법인이 아니라 ‘보증 기업’들을 믿는다. 이 믿음 위에서 부동산 PF라는 현란하고 신비로운 신용의 고리가 형성된다.

■ 신용이 덫으로 바뀌는 순간

지난 3~4년 동안의 부동산 호황기에 PF는 매우 효율적으로 돌아갔다. 시행사는 집값과 분양률 상승을 통해 거둔 높은 수익으로 유동화 법인에 빚을 갚았다. 유동화 법인은 그 돈으로 유동화증권 투자자들에게 채무를 상환했다. 금리가 낮게 유지되고 있어서 차환을 위해 다시 돈을 빌려도 큰 비용이 들지 않았다. 투자자들은 부동산 호황에 기대어 유동화증권을 신뢰했다. 많이 발행하고, 많이 샀다. 만기가 보통 3개월인 ‘단기 유동화증권’ 규모가 한때 급속히 증가했다. 증권정보포털(SEIBro)에 따르면, 단기 유동화증권(ABCP와 AB 단기사채)의 발행 잔액이 2021년 1월4일의 27조7000억여 원에서 같은 해 마지막 날엔 38조3000억여 원으로 10조원 이상 늘어난다. 2022년 11월29일 현재는 35조원 정도다.

그러나 단기 유동화증권은 고금리와 부동산 침체를 맞아 금융시장의 다이너마이트로 반전되었다.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분양에 차질이 발생한다면, 시행사가 유동화 법인에 돈을 제대로 갚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유동화증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 더욱이 금리가 오르면 유동화증권의 가격도 하향세를 탄다. 금리와 채권(유동화증권도 채권) 가격은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가격이 떨어지는 금융상품을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투자자들은 유동화증권을 사지 않거나, 사더라도 높은 금리를 요구한다. 차환에 큰 비용이 든다. 차환에 실패하면 유동화 법인에 부도가 발생한다. 보증을 선 건설사와 증권사가 채무를 대신 갚아야 한다. 결국 탄탄한 재무구조의 보증 기업들까지 자금난에 휘말리게 된다. 신용보강이 덫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 덫은 올해 들어 금리가 오르고 부동산 침체가 예상되면서 건설사와 증권사들을 서서히 옥죄고 있었다. 한국기업평가가 낸 ‘건설업 신용보강 A to Z’(9월21일)에 따르면, “롯데건설, 태영건설, HDC현대산업개발, 지에스건설, 대우건설의 PF 우발채무 규모가 큰 편이다.” 우발채무란 ‘지금 당장’은 빚으로 인식되지 않으나 가까운 시일 내의 상황에 따라 채무로 확정되는 돈을 의미한다. 차환이 되지 않을 때 건설사나 증권사가 시행사 대신 채무를 부담해야 하는 경우로 볼 수 있다. 이 보고서는 롯데건설의 우발채무를 4조3000억원, 태영건설의 그것을 2조3000억원으로 추정(6월 말 현재)했다.

이렇게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던 지난 9월 말,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돌연 채권시장에 폭탄을 던졌다. 레고랜드에 대한 강원도의 보증을 사실상 철회함으로써 ‘지방정부가 보증한 돈도 떼이는데 다른 채권은 더 위험하지 않을까’라는 의심을 채권시장 깊숙이 심어버린 것이다. 채권투자자들이 일제히 철수한다.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사업’으로 불리는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과 관련된 유동화증권도 만기(10월28일) 직전까지 팔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차환에 실패하면, 시공사들(현대건설·롯데건설·대우건설·HDC현산)이 대신 갚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금난으로 인한 대형 건설사 부도설들이 지라시를 타고 흉흉하게 귀에서 귀로 전해졌다. 이 소문은 그 자체로 다시 자금을 PF 시장 밖으로 유출시켰다.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재건축 현장. 둔촌주공 사업은 만기를 하루 앞두고 부도를 면했다. ⓒ연합뉴스

■ ‘보이는 손’이 해야 할 일

둔촌주공 사업은 만기를 하루 앞두고 부도를 면했다. 채권시장안정펀드(은행·증권사·보험사 등이 갹출한 돈으로 조성하는 기금으로 금융 당국이 주도)가 둔촌주공 관련 유동화증권을 매입해서 차환을 성사시킨 덕분이다. 자칫 부동산 PF는 물론 금융시장 전반을 엄청난 충격으로 몰아갈 수 있었던 불씨 하나가 겨우 꺼졌다.

그러나 유동화증권의 금리는 크게 올라 있는 상태다. 지난 9월 초 3~4% 내외이던 금리가 10월엔 7~9%, 11월 들어서는 10%대 초중반으로 진입했다. 그만큼 차환에 많은 비용이 들어 건설사와 증권사의 자금난을 악화시킬 것이다. 더욱이 3개월 만기가 많으니 한동안 쉴 새 없이 차환이 다가온다.

정부는 채권시장 붕괴를 저지하기 위해 채권시장안정펀드 등 여러 정책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주로 유동화증권 등 채권을 매입하거나 보증해서 채권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법이다. 이를 정부(국책금융기관)가 직접 수행하거나 혹은 5대 금융지주 등에 협조를 요청한다. 한국은행은 자금난에 처한 증권사들에 대출(RP 매입)을 제공하고 있다. 유동성 위기설에 시달렸던 롯데건설은 2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 그룹 내 다른 계열사로부터의 대출(1조원 정도), 수천억 원 규모의 은행 대출 등을 통해 앞으로 돌아오는 만기들을 헤쳐 나갈 심산이다.

경제적으론 이미 비상시국이다. 시장 일각에서 소망하듯이 한국은행이 앞으로의 금리인상을 조절하면 다시 채권 수요가 회복되고 차환에 대한 우려도 수그러들 것이다. 부동산시장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서 ‘건설사발’ 경기침체나 금융위기 우려를 잠재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로벌 차원의 인플레이션, 미국 연방준비제도 등 선진국 중앙은행들의 금리인상, 지정학 문제로 인한 식량·에너지 위기 등 한국이 통제할 수 없는 다양한 외부 여건들이 존재한다.

경제주체들이 서로를 믿지 못해 섣불리 돈을 빌려주지 않기 시작할 때가 금융경색 국면이다.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한 상태를 금융위기라고 부른다. 이런 시기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신을 더욱 심화시키기도 한다. 정부의 ‘보이는 손’이 강력하면서도 꼼꼼한 리더십으로 신뢰와 자신감을 확장시켜야 한다. 그래야 이후 엄습해올 다양한 리스크의 악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기자명 이종태 선임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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