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바람이 쌀쌀해지면 노르웨이 시인 울라브 하우게의 시가 생각난다. 울라브 하우게는 오랫동안 정신질환을 앓았고 병원에서 수많은 책을 읽다가 시를 만났다. 이후 그는 정원사로 일하며 숲에서 시를 썼다. 이를테면 이런 시. “우리 만남을 위해 오실 때/ 경비견을 데려오지 마세요/ 굳은 주먹도 가져오지 마세요/ 그리고 나의 호밀들을 밟지 말아주세요/ 다만 대낮에/ 당신의 정원을 보여주세요(‘당신의 정원을 보여주세요’,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봄날의책).”

내겐 보여줄 정원이 없고, 있는 것이라곤 죽은 식물의 흔적을 간직한 빈 화분들과 근근이 생명을 이어가는 화분 몇 개가 전부다. 그래서 이 시에 움찔하며 공감했다. 싱싱한 초록으로 우리 집에 왔다가 누렇게 떠 죽어가는 나무와 꽃들, 그들의 빈 화분처럼 나란 사람을 잘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살림을 말하지만 실제론 아무것도 살리지 못하는 나… 자기 비하는 그만두고 다시 하우게로 돌아가자.

하우게는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을 좋아한 것 같다. 날마다 틈틈이 –티백 종이에까지- 시를 썼던, 그렇게 1700편이 넘는 시를 써서 아무도 모르게 트렁크에 넣어두었던 에밀리 디킨슨을 생각하며, ‘나는 시를 세 편 갖고 있네’라는 시를 지었다. “그게 옳아 좋은 시는/ 차향이 나야 해/ 아니면 숲의 땅이나/ 갓 자른 나무 냄새가”로 끝나는 시다. 눈 밝은 하우게는 디킨슨의 시만 보고도 그가 자기처럼 정원에 진심이었음을 알았나 보다. 그의 시에서 숲과 나무 냄새를 읽은 걸 보면.

에밀리 디킨슨의 시라면 나도 꽤 읽었다. 오래전부터 좋아해서 새로운 번역이 나올 때마다 사 모은 시집이 네 권이나 된다. 하지만 그가 정원사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의 삶과 작품을 언급한 비평서들을 봐도, 그가 보낸 연서의 주인공이 누구이며 그가 사랑한 사람이 여성인지 남성인지에 대한 추리는 많지만 정원에 대한 얘기는 없다.

한데 조경 전문가 마타 맥다월이 쓴 〈에밀리 디킨슨, 시인의 정원〉은 그가 정원 일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그게 그의 시 세계의 중요한 한 부분을 이룬다고 일깨운다. 뜻밖이다. 그가 옷에 흙을 묻혀가며 정원 일을 했다니. 에밀리 디킨슨 하면 세상과 어울리지 못한 괴짜, 어둡고 고독한 은둔의 시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평생 고향 집에서 독신으로 살았고, 서른이 넘은 어느 해부터는 아예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며, 거의 2000편 가까운 시를 썼지만 일곱 편인가만 세상에 발표했고 언제나 흰옷만 입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은둔 여왕” “백의의 처녀” 심지어 “마귀 들린 여자”로 불렸을 정도다.

이해하기 힘든 건 그의 삶만이 아니다. 시 역시 수수께끼 같은 비밀로 가득하다. 거의 경구와도 같은 압축적인 문장들, 난데없이 대문자를 쓰고 구두점 대신 대시(-)를 사용하는 이상한 습관 때문에 그의 시는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시가 좋았으니, 어쩌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인지 모른다. 나뿐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오래전에 죽은 시인의 애매하고 난해한 시를 좋아해서 그를 영원히 살아 있게 한 것은 왜일까?

늘 진흙을 묻히고 다닌 여자아이

〈에밀리 디킨슨, 시인의 정원〉마타 맥다월 지음박혜란 옮김시금치 펴냄

아마도 그건 그가 두려움 없이 삶을 직면하고 정직하게 생의 진실을 드러냈기 때문이리라. 〈에밀리 디킨슨, 시인의 정원〉이 보여주듯, 그는 정원에서 자라 “늘 진흙을 묻히고” 다닌 아이였다. 그 아이는 뱀에 물린다는 둥 도깨비한테 잡혀갈 거라는 둥 여자아이를 겁주는 말을 들으면서도 혼자 숲에 가길 좋아했고 거기서 “천사들을 만났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하듯 사기 칠 자신이 없었다”. 정원의 사계절을 온몸으로 겪으며 그는 인간적 해석을 허락지 않는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였다.

“새 한 마리가 산책로에 내려오더니-/ 내가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지렁이를 물어뜯어 반으로 나누더니/ 그 친구를, 날것으로 먹어치웠네// (…) 그러더니 딱정벌레가 지나가도록/ 옆으로 뛰어 벽 쪽으로 비켜주었네-// (…) 나는 그에게 빵 부스러기를 던졌네/ 그러자 그가 날개를 펼치더니/ 노를 저어 집으로 가버렸다네-(〈디킨슨 시선〉, 윤명옥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그는 삶이 휴머니즘이란 이름의 동정과 무관하게 어엿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의 냉엄함은 그 앎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죽음에 관한 많은 언설이 있지만 에밀리 디킨슨의 시만큼 자명한 문장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죽음에 관한 한 점의 허영도 없는 그의 깊은 시편들 때문이다. “내 죽음 때문에 멈출 수 없기에-/ 친절하게도 죽음이 날 위해 멈추었네-/ 수레는 실었네, 우리들 자신은 물론-/ 또 영원을”로 시작하는 시에서 그는 자신의 영구차의 행로를 그린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 “그때부터 –수세기는- 시작되었네/ 하루보다 짧게 느껴지며/ 난 첨엔 생각했지, 말(馬)머리는/ 영원을 향하고 있다고-(〈고독은 잴 수 없는 것〉, 강은교 옮김, 민음사).” 사람은 죽음도 영원이라 상상하지만 디킨슨은 그조차 상상일 뿐임을 직시한다. 이런 시선을 가진 이가 삶의 쓸쓸함을 모를 수는 없다. 하여 모든 쓸쓸한 삶을 위해 그는 시를 썼으니, 쓸쓸한 당신에게 이 시를 보낸다.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내 삶은 헛된 것이 아니리
내가 한 생명의 아픔을 달랠 수 있다면,
혹은 하나의 괴로움을 위로할 수 있다면,
혹은 쓰러져가는 한 마리 울새를 도와
둥지에 다시 넣어줄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리 (〈디킨슨 시선〉, 윤명옥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기자명 김이경(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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