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끝까지 읽어야만 본색이 드러나는 책이 있다. 엄청난 반전을 숨긴 미스터리만이 아니다. 〈에코페미니즘〉이 그렇다. 처음엔 실현 가능성 없는 당위를 얘기한다고 여겼는데 자본주의 경제, 역사, 정치, 과학, 의학, 여성혐오와 폭력, 유전자조작과 재생산 기술, 식민주의와 극단적 민족주의에 이르는 전방위적 논의를 좇다 보니 사고방식이 바뀌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개벽이란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책에서 말하는 변화는 크고 깊고 근원적이다.

두꺼운 책을 완독한 뒤 앞으로 돌아가 다시 서론을 읽었다. 처음엔 선언적이라 여겼던, 이를테면 “지구에 대한 강간과 여성에 대한 강간은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는 문장 같은 것이 생생한 현실감을 띠고 다가온다. 이런 독서 경험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를 읽었을 때 이후 거의 처음인 것 같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이 그렇듯, 에코페미니즘 역시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역사적 필연으로 여기는 기존의 역사관을 통째로 문제시하며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구한다.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가는 디딤돌로 여기는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 또한 똑같은 비판의 대상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를 인류사 발전의 동력으로 추앙하는 근대과학에 대해, 에코페미니즘은 “과학의 전체적인 패러다임 자체가 가부장적·반자연적·식민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이 때문에 혹자는 에코페미니즘을 시대착오적 복고주의라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인류가 당면한 위기를 생각하면 이런 비판은 한가하다 못해 피상적이다. 지난 8000여 년간의 인류세가 종말을 눈앞에 둔 지금, 세계관의 전면적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 왜 복고적인가? 급진적이라면 몰라도. 내 생각엔 〈에코페미니즘〉이야말로 지금까지의 인류사를 완전히 다시 쓰는, 가장 대담하고 혁명적인 책이다.

〈에코페미니즘〉의 저자는 둘이다. 자본주의 근대화의 주체이자 수혜자인 독일 출신의 사회학자이며 페미니즘 활동가 마리아 미스와, 구식민지 인도 출신의 핵물리학자로 서구 과학·기술의 문제점을 깨닫고 환경운동가로 나선 반다나 시바가 그들이다. 두 지식인은 이 책에서 존망의 기로에 놓인 인류를 위한 공존의 길을 제시한다.

역사적 위치가 전혀 다른 둘을 한자리에 세운 것은 식민주의에 대한 인식이다. 식민지배의 피해자인 반다나 시바는 물론이요, 가해자이며 수혜자인 마리아 미스 또한 식민주의가 세계를 공멸로 이끈 자본주의의 핵심 동인임을 분명히 한다. 두 사람에 따르면, 남반부를 착취함으로써 번영을 구가한 북의 식민주의는 남의 자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자연과 여성을 식민화한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산물이며, 그로 인한 폐해는 소수의 서구 백인 남성을 제외한 전 인류와 자연의 노예화, 지구 생태계의 붕괴를 낳았다. 그리하여 생물종의 멸종, 기후 위기로 인한 파국은 이제 눈앞의 현실이 되었다.

두 저자는 그 배후에 이성(과학·기술)을 통한 자연으로부터의 해방이 인간의 자유요 역사 발전이라는 계몽주의적 자유 개념이 있다고 지적한다. 남성과 여성, 문명과 자연, 북과 남, 백인과 유색인을 나누고 전자에 의한 후자 지배를 당연시하는 위계적 이분법은 그 반영이다. 저자들은 위계제에 반대하는 사회주의나 페미니즘도 그 자장 안에 있다면서, ‘여성이 남성보다 낫고 자연이 문명보다 우월하다’는 주장 역시 다른 듯 보이지만 그 세계관을 답습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시몬 드 보부아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관건은 기술이 아니라 관계의 혁명

〈에코페미니즘〉
마리아 미스·반다나 시바 지음
손덕수·이난아 옮김
창비 펴냄

미스에 따르면, 보부아르는 남성이 여성을 타자화함으로써 자유로운 주체가 됐음을 비판적으로 인식했으나, 그 사고 틀을 넘어서기보다 오히려 여성을 정신(이성)과 몸으로 나누고 몸을 대상화함으로써 주체가 되는 (남성과 같은) 길을 택한다. 이는 임신하는 여성의 몸을 동물적 신체, 자연의 질곡으로 여기고, 과학적 재생산 기술에 의해 몸에서 해방되려는 기획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에코페미니즘〉은 의학으로 여성의 자기결정을 이루는 것은, “살아 있는 공생관계들을 더 이상 해부하지 못하게” 하는 ‘기술적 가부장제’라고 비판한다. 문제는 출산하는 여성의 몸이 아니라 “살아 있는 관계의 파괴와 가부장적 지배”이며, 중요한 것은 남성도 “이 살아 있는 관계, 이 일상성, 이 부담과 연결되는 새로운 양성 관계”를 창출하는 것이다. 즉 관건은 기술이 아니라 관계의 혁명이다.

〈에코페미니즘〉은 저개발국가도 경제개발을 통해 서구가 누린 풍요를 따라잡을 수 있다거나, 여성도 남성을 따라잡아 똑같은 지위와 권력을 누려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서구 여성이 남성과 같은 삶을 누리는 데 비서구 여성의 저임노동이 필수적이듯이, 따라잡기 전략은 사회적 비용의 외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도를 영국처럼 살게 하고 싶으냐는 어느 영국 기자의 질문에 마하트마 간디는 “영국처럼 작은 나라를 그 수준으로 살게 하는 데도 지구의 절반이 착취당해야 했습니다. 인도를 그렇게 살게 하려면 착취할 지구가 몇 개나 더 있어야 합니까?” 하고 반문했다. 〈에코페미니즘〉은 이 말을 인용하면서, 전 지구적 하청, 여성의 무보수 노동, 외주와 하청이란 노동분할, 대도시 집중이란 지역분할 없이는 따라잡기식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확언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에코페미니즘〉은 모든 것을 쪼개고 갈라서 다투게 하는 권력의 분할 지배에 맞서 ‘연대와 자급적 관점’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자연과 인간을 가를 수 없듯 여성, 남성, 북, 남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연대하라, 착취 없는 자급으로 함께 살라. 지구가 보내는 최후의 명령에 응답하라! 

기자명 김이경(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