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이스(아나이스 드무스티에)가 뛰고 있다. 빨간 원피스에 카키색 백팩을 메고 한 손엔 꽃다발을 들고 뛰어간다. 바쁘게 계단을 올라 바쁘게 문을 열고 역시 바쁘게 집주인을 맞는다. 맛있는 주스를 준다더니 냉장고를 열어보고는 “이런, 지금은 없네요” 한다. 밀린 월세 달라는 집주인 앞에서도 ‘이런, 지금은 없네요’ 하는 표정으로 서 있다.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분주히 집안을 뛰어다니다 갑자기 옷을 갈아입는다. 이성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구 사이도 아닌 집주인 옆에서 속옷 차림으로 수다를 떤다. 물어보지도 않은 연애 얘기며 섹스 얘기까지 신나게 재잘대다 말고 다른 약속에 늦었다면서 부랴부랴 뛰어나간다. “여기 계속 있으셔도 돼요. 나갈 때 문 닫으시고요. 안녕히 가세요. (볼뽀뽀)쪽, 쪽.”
5분. 영화 시작하고 딱 5분. 아나이스가 집 안으로 뛰어들어왔다가 다시 뛰어나갈 때까지 걸린 시간 5분. 그 5분 만에 난 아나이스와 사랑에 빠졌다. 스크린 이곳저곳을 탱탱볼처럼 뛰어다니는 그의 생기와 활력에 완전히 사로잡혀 어느새 이런 마음을 먹고 있었다. ‘남은 러닝타임 동안 이 언니가 무슨 짓을 하든 난 끝까지 편들어주겠어!’
그 결심이 잠시 흔들리는 순간도 있었다. 아버지뻘 되는 늙다리 ‘다니엘’과 사귈 때. 아니 왜? 대체 왜! 하지만 곧 안심했다. 아나이스는 누군가의 애인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든 자기 애인으로 ‘만드는’ 사람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출판계 일자리는 어떠니, 그 계통에 있는 재밌는 사람들도 만나고 좋지 않니, 엄마가 말했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하는 아나이스다. “재밌는 사람을 만나는 대신 내가 그런 사람이 될래요.”
다니엘의 파트너이자 작가 에밀리(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를 흠모하기 시작하면서 아나이스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된다. 남자친구의 여자친구를 사랑하는, 아주 ‘재밌는 사람’이 된다.
‘열정’을 주제로 논문을 쓰는 서른 살 여성 아나이스는 그렇게, ‘호기심’을 주제로 에세이를 쓰는 중년 여성 에밀리의 연인이 된다. 아니, 에밀리를 자신의 연인으로 만.들.어.간.다.
자유롭고 솔직하고 무모하고 충동적이고 그래서 때때로 이기적이며 조금은 무책임하게도 보이는 여성 캐릭터. 영화에서 자주 만날 수 없어 오히려 더 반가운 우리의 주인공은, ‘끝까지 편들어주겠다’는 나의 응원이 헛되지 않게 영화 내내 근사했다. 마지막 장면의 마지막 선택이 특히 멋졌다. 통쾌하고 사랑스러운 엔딩이었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함께 떠올린 작품들로 말해보자면, 〈프란시스 하〉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가 손잡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바다로 달려가는 영화. 〈아나이스 인 러브〉는 프랑스 여성 감독 샤를린 부르주아타케의 장편 데뷔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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