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폭군과 명군 사이

김순남 지음, 푸른역사 펴냄

“바로 그 순간 수양이 어을운에게 눈짓했다. 어을운은 철퇴로 김종서를 내리쳤다.” 


조선 7대 왕 세조라고 하면,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살해한 폭군’이란 인상을 가장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사병을 동원해 공적 시스템을 무너뜨린 계유정난을 일으킨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 전기 정치사를 전공한 저자는 실록에 기반한 서술로 세조를 ‘초월적 절대군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친 정치가’로 해석해낸다. 그동안 드라마·영화 등에서 사욕 없는 ‘단종의 충신’으로만 묘사되던 김종서 등을 ‘권신’으로 보는 시각도 특이하다. 왕의 치적과 제도 개혁에 대한 서술은 지루하기 쉬운데, 이 책의 해당 부분은 저자의 필력 때문인지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혀 신기할 정도였다.

 

 

 

 

 

 

차별 없는 병원

이승현 외 지음,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 기획, 휴머니스트 펴냄


“국내에는 성소수자 의료와 관련하여 부족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인간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성소수자는 인간이다. 성소수자는 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이 빈틈없어 보이는 삼단논법에는 맹점이 있다. 의료기관이 성소수자를 위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능력이 있느냐는 것이다. 국내에는 여전히 성소수자 의료에 대한 기본 교재조차 없다. 이 좁고도 깊은 틈을 메우고자 몇몇 의료인이 모여서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를 만들었고 첫 번째 결실을 책으로 맺었다. 의료인이 성소수자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부터 각 의료 행위 유형별 구체적인 설명까지 폭넓게 담았다. 성소수자를 잘 모르는 의료인과 의료를 잘 모르는 성소수자 모두에게 길잡이가 되어줄 책이다.

 

 

 

 

 

 

라이어 라이어 라이어

마이클 레비턴 지음, 김마림 옮김, 문학수첩 펴냄


“오히려 나의 가장 이기적인 거짓말조차도 모두에게 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 평생 딱 세 번 거짓말을 한 사람이 있다. 다섯 살 때, 열여덟 살 때, 스물여섯 살 때. 과연 그는 행복했을까? 이 책은 저자의 슬픈 자기 고백으로 시작한다.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내 진정성이 매력으로 작용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의 지나치게 솔직한 본성은 다른 모든 것에서 그랬듯이 결국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도 독이 되고 말았다.” 직장도, 애인도 모두 잃게 된 그는 뒤늦게 몇 가지 규칙을 세운다. 감정을 숨길 것, 내 진짜 모습을 좋아해줄 사람을 찾는 대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원하는 종류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것. 그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동물들의 위대한 법정

장 뤽 포르케 지음, 야체크 워즈니악 그림, 장한라 옮김, 서해문집 펴냄


“자신의 종이 왜 보호받아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수리부엉이, 담비 등 멸종위기 동물들이 법정에 들어선다. ‘인간이 보호해줄 종을 선택하겠다’는 재판이 열렸다. 생존을 건 세기의 재판. 동물 여덟 종 가운데 한 종만 선택받아 보존할 수 있다. 프랑스 시사 풍자 주간지 〈카나르 앙셰네〉에 25년간 글을 써온 저자가 환경문제를 법정 우화로 알기 쉽게 풀어냈다. 동물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유럽칼새 등이 법정에서 우 변호사처럼 딴딴한 주장을 펼친다. 우화인데 참고문헌에 전문서가 빼곡하다. ‘어려운 건 쉽게 쓰라’는 주간지 기자의 필력에 감탄하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 판결 대목에서 이 모든 상황을 뒤집는 반전. 당신이 배심원이라면?

 

 

 

 

 

 

얼굴 없는 검사들

최정규 지음, 블랙피쉬 펴냄

“검찰, 더 나아가 수사기관의 주인은 누구인가?”


상관한테 괴롭힘을 당한 끝에 생을 마감한 김홍영 검사. 일면식도 없었지만 법률사무소 동료가 고인의 연수원 동기였다. 김 검사 부모를 대리해 국가배상 소송을 무료 변론했다. 대검찰청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목격했다. 상관인 부장검사를 징계만 하고 덮은 것이다. 대검찰청의 암장(暗葬)을 바꿀 묘안을, 저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건에서 찾았다. 힘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었던 검찰수사심의위원회 소집 요청. 이 위원회 결정으로 부장검사는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심 진행 중이다. 이주민, 장애인 등을 변론했던 저자가 직접 경험한, ‘제멋대로 검찰 권력’을 폭로했다. 검사들에게 강추한다.

 

 

 

 

 

비 온 뒤 맑음

무지개평등권빅플랫폼 지음, 강영희 옮김, 사계절 펴냄


“단 하나의 마법 같은 레시피는 없었다.”


무지개를 닮은 책이다. 낱장마다 색이 입혀져 있어 책을 세우면 활짝 펼친 무지개 깃발이 된다. 2019년 5월, 타이완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동성결혼을 법제화했다. ‘마법’처럼 한순간에 이루어진 일은 아니다. 2016년 혼인에 관한 민법 개정안이 발의된 이후 3년간 ‘동성혼’은 타이완의 뜨거운 감자였다. 국민투표로까지 이어지며 사회를 뒤흔들기도 했다.
법안이 통과되던 날, 카메라에 찍힌 성소수자들의 얼굴엔 울음과 웃음이 공존한다. 그 표정을 한국에서도 볼 수 있을까? 어쩌면 ‘다가올 미래’일지 모르는 타이완의 시간에 자꾸 오늘의 우리가 겹쳐 보인다. 이 책은 혐오보다 강한, 끈기와 사랑의 기록이다.

기자명 시사IN 편집국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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