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야채, 감자, 요크셔푸딩과 함께하는 로스트 디너. ⓒ최은주 제공

근 20년 전에 영국인임을 꽤나 자랑스러워하는 영국인 할머니에게 ‘진정한’ 영국 음식으로 뭘 꼽을 수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대답은, 일요일에 먹는 로스트, 즉 선데이 로스트였다. 일요일 아침 교회 가기 전에 미리 준비한 고기를 오븐에 넣어두고, 예배를 보고 돌아와서 고기 익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식전주로 셰리를 마시는 그 풍경 전체가 선데이 로스트라는 설명이었다. 어쩐지 매우 영국적으로 들리는 근사한 묘사이기는 하다. 물론 당시 속으로는 ‘결국 오븐에 고깃덩어리를 넣어 구워 먹는다는 얘기 아닌가’라고도 생각했지만. 

로스트란 큰 고깃덩어리를 오븐에 넣고 상당 시간 굽는 방식으로 조리한 것을 말한다. 흔히 먹는 스테이크는 로스트에 비해 얇게 썬 고기를 조리한다. 로스트는 익은 덩어리 고기를 썰어서 따뜻하게 데워둔 커다란 개인 접시에 몇 점 담고 감자나 브로콜리, 파스닙, 당근 같은 익힌 야채를 함께 담아 먹는다. 여기에 큼지막한 요크셔푸딩까지 더하고 그레이비를 끼얹으면 영국식 로스트 디너(‘디너’라고 하면 단지 저녁 식사만이 아니라 정식 식사를 말하기도 한다)가 된다. 

지역, 계절, 경제 상황, 유행이나 선호 등에 따라 다양한 고기를 사용할 수 있다. 쇠고기라면 호스래디시 소스와 매운 겨자, 돼지고기의 경우 사과 소스, 양고기에는 민트 소스를, 닭고기나 칠면조 등이라면 우유에 빵가루를 넣어 만드는 브레드 소스를 곁들인다. 가장 인기 있는 전통의 메뉴는 무어니 무어니 해도 쇠고기에 갖가지를 곁들인 로스트비프(roast beef with all the trimmings)이다.

로스트비프는 영국인들의 솔 푸드이자 심지어 정체성이다. 오죽하면 영국의 영원한 숙적인 프랑스에서 영국인들을 부르는 별명이 로스트비프(Les Rosbifs)일 정도다. 그렇다고 영국인들이 이에 상처를 받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다. 18세기 작가 헨리 필딩은 영국 소설의 창시자 격이라 평가되는데, 그의 1731년 희곡 〈그러브 스트리트 오페라(The Grub-Street Opera)〉에는 로스트비프를 먹던 시절의 영국인들은 군인도 궁정 신하도 훌륭했으나 프랑스로부터 댄스와 라구(고기와 야채를 넣은 일종의 스튜)를 전수받은 후 유약해졌다는 내용의, 로스트비프를 찬양하고 프랑스를 비꼬는 노래가 등장한다. 참고로 영국인들이 프랑스인들을 부르는 별명은 개구리다. 

1932년부터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이광수의 소설 〈흙〉에는 등장인물 중 하나인 ‘조선주의자’ 한민교 선생이 “영국 사람은 피 흐르는 비프스테이크 먹는 기운으로 산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이는 한 선생이 영국인들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아무래도 영국인들은 스테이크보다는 로스트 쪽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절이라면 더 그랬을 것이다. 이를 방증한달지, 영국과 미국을 같이 경험해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영국의 스테이크가 미국 것만 못하다고 말한다. 

로스트용 쇠고기로는 갈비를 중심으로 등심이 붙은 부위의 덩어리를 가장 맛있는 것으로 치지만 기름기가 적고 뼈가 없어 요리 후 자르기 쉬운 채끝살이나 우둔살도 많이 사용한다. 대가족이 보통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던 시절에는 예배 보는 동안 고기를 오븐에 넣어두어도 타지 않아야 했다. 즉, 낮은 온도에서 고기를 구웠다. 요즘에는 상대적으로 고온에서 비교적 단시간에 고기를 구워낸다. 겉은 노릇하고 안은 핑크가 되도록 굽는다.

오븐에서 고기를 꺼낸 후 식지 않게 덮어서 30분 정도 둔다. 이 레스팅 과정을 통해 조리 도중 고기에서 빠져나온 수분의 일부가 다시 흡수되어 좀 더 촉촉해진다. 고기를 레스팅하는 동안 그레이비를 만든다. 그레이비는 고기가 구워질 때 나온 육즙과 기름에 밀가루를 풀고, 거기에 육수나 와인 등을 넣고 끓여서 만드는 것이지만 이제는 시판 소스도 많다. 

고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감자다. 감자를 반 정도 익도록 삶은 다음 오븐팬에 넣어 뜨겁게 만든 기름에 넣고 굽는데, 기름이 뜨거울수록 안쪽은 포슬포슬하고 바깥이 누룽지처럼 바삭하니 고소해져서 맛있다. 따라서 발연점이 높은 기름을 선호한다. 전통적으로는 발연점이 250℃에 달하는 소기름을 많이 썼다. 뼈가 붙은 등심(bone-in sirloin) 같은 부위를 쓰면 조리 중 기름이 발생하므로 기름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지만 요즘은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식물성 기름을 쓰기도 하고, 오리나 거위 기름을 써서 특유의 풍미를 더하기도 한다. 물론 요리하는 사람마다 감자를 굽는 자기만의 비법이 있기 마련이다.

빠지면 은근 섭섭한 요크셔푸딩

개인 접시에 담긴 선데이 로스트.ⓒ최은주 제공

감자나 야채 이외에 요크셔푸딩을 곁들이기도 한다. 요크셔푸딩은 이름과 달리 단맛의 푸딩이 아니다. 밀가루로 만든 풀빵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밀가루에 물, 우유와 달걀을 넣어 미숫가루 정도로 묽은 반죽을 만든다. 미리 머핀 틀에 기름을 발라 오븐에서 뜨겁게 데운 후 반죽을 빠르게 부어 오븐에 넣으면 반죽이 부풀어 오르면서 익는다. 요크셔푸딩은 단백질에 곁들이는 탄수화물, 즉 고기에 곁들이는 공깃밥 같은 음식이다. 고기가 귀해 적은 양의 고기로 여러 사람이 먹던 시절에 배를 불리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지만, 빠지면 은근 섭섭하다. 다만, 따뜻하면 몰라도 식은 요크셔푸딩은 아무리 영국 음식에 익숙해진 입이라도 맛이 없다. 

만일 고기를 스테이크로 조리한다면 혼자나 둘이서 먹을 만한 분량으로도 요리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로스트를 하는 경우 뼈를 빼고 적어도 1~1.5㎏는 되는 고깃덩어리를 사용해야 맛있게 구울 수 있다. 즉, 로스트란 여러 사람이 모여서 먹도록 고안된 음식이다. 그러니 2020년 기준으로 가구당 평균 인구가 2.4인이고, 일요일에 교회 가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겨우 1.2%에 불과한 영국에서 선데이 로스트를 집에서 직접 만드는 일은 이제는 드물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일요일이라면 근처 펍이나 식당에 가서 일요일에만 등장하는 메뉴 선데이 로스트를 먹을 것이다. 오랜만에 대가족이 모여도 이탈리아 음식이나 인도 음식을 먹는 쪽을 선호할 수도 있다. 심지어 한국 음식도 꽤 유행이니 가위로 고기를 잘라준다는(외국인들이 매우 놀라는 대목이다) 한국식 BBQ를 시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특별한 날이라면 역시 로스트인데, 영국인에게 1년 중 가장 성대한 식사인 크리스마스의 정찬 또한 이 로스트 디너의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다. 

선데이 로스트를 만들어 먹고 나면 마치 한국의 잔치 음식이 그렇듯 남는 양이 꽤 된다. 일요일에 성대하게 먹고 남은 음식은 여러 가지로 변형되어 일주일의 식사를 책임질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남은 로스트의 활용법에 대해 적어보도록 하겠다. 

기자명 김세정(변호사) · 최은주(이학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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