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전두환 대통령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고 있는 박인근 원장(가운데).ⓒ형제복지원 운영 화보집

오랜 세월 정부 차원에서 형제복지원장 박인근의 범죄를 비호하고 진실을 은폐한 배경에는 뿌리 깊은 공안 유착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형제복지원 원생들을 처음부터 잠재적인 공안 위해 사범으로 간주했다. 박인근 원장은 1975년 하반기부터 형제복지원 수용 인원이 갑자기 늘어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주장했다. “1975년 광복절에 조총련 공작원 문세광에 의해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이 대남 공작의 일환으로 조총련을 간첩으로 훈련시켜 양아치와 부랑아로 가장해 활동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당국이 반공 방첩 차원에서 부랑아를 집중 단속해 형제복지원으로 보냈다.”

실제로 군사정권 시절 공안기관들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 시국 사범을 형제복지원에 강제수용하고 감시했을 뿐 아니라 형제복지원 시설 내에 간첩조작 수사 공작을 위한 공작원 위장 침투도 서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공안당국에서 형제복지원에 과거 국가보안법, 국방경비법, 반공법 등의 위반 사범 15명을 무연고자로 수용해 관리했다고 밝혔다. 주로 보안사(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존안 자료 중 요시찰 및 보안처분 관련자, 그리고 부산지검 공안과에서 관리한 보안처분 대상자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주소를 부산 북구 주례동 산18번지 형제복지원으로 둔 채 감시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그 사례로 경남공고 재학 중 학생운동에 관련돼 국보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이 아무개씨와 하숙방에서 북한 방송을 청취했다는 이유로 반공법 처벌을 받은 권 아무개씨 등 4명의 신원을 공개했다.

보안사가 형제복지원을 ‘간첩조작 수사 공작’ 무대로 적극 활용했다는 점도 드러났다. 보안사에서는 1986년 5월7일 국가안전기획부장 앞으로 ‘수사 공작 통보 문건’을 보냈다. 납북 귀환 어부 김 아무개씨가 형제복지원에 들어가 있으므로 그를 상대로 간첩 수사 공작을 벌이겠다고 보고하고 공작명을 요청한 것이다. 이 요청은 이튿날 승인돼 안기부는 ‘갈채 공작’이라는 음어를 부여했다. 보안사 501보안부대 공작원은 1986년 5월12일 부산시 부산진구 범전동 주점에서 고의로 음주 소란 행패를 벌인 뒤 주민 신고를 유도해 범전파출소를 경유해 형제복지원에 침투했다. 그는 5월26일까지 형제복지원 내 운전교육대에 배치돼 공작을 수행했다. 보안사 501보안부대는 또 박인근 원장과 서약서를 쓰고 형제복지원 수용자 중에서 망원(스파이)을 선발해 납북 귀환 어부 김 아무개씨에 대한 정보보고를 하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납북 귀환 어부 김씨의 가족이 나타나 신병을 인계받고, 이후 김씨가 원양어선 선원으로 나가면서 보안사의 ‘갈채 공작’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런 유착 속에 공안기관은 형제복지원의 인권유린을 외면했던 것이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