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4일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정근식 위원장(왼쪽)이 서울 중구 사무실에서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김흥구

강산이 세 번 넘게 바뀌도록 은폐된 억울한 죽음들이 있다. 공식 확인된 사망자만 657명이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 발생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 일대에서 부랑자를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불법 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키는 과정에서 무시무시한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내무부는 1975년 12월 훈령 제410호인 ‘부랑인의 신고·단속·수용·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 지침’을 급조했다. 이 훈령에 따라 경찰과 부산시 등 행정기관이 총동원됐다. 1986년 전체 수용자 3975명 가운데 경찰을 통해 입소한 인원이 3117명, 구청을 통해 입소한 인원은 253명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형제복지원에 시설 운영비를 매년 10억~20억원씩 지원했다. 박정희 정권에 이어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권력을 등에 업은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의 폭력과 탐욕은 점입가경이었다. 하루 10시간 이상 강제노역과 학대, 성폭행이 다반사였다. 저항하면 맞아 죽었다. 일부 시신은 내부 담벼락 밑에 암매장했다. 일부 시신은 한 구당 300만~500만원에 대학병원으로 팔렸다. 그런데도 전두환 정권은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을 청와대로 불러 1981년에는 국민포장, 1984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군사정권을 등에 업은 가공할 인권유린 참사가 언제까지나 베일에 가려질 수는 없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우연한 계기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86년 12월 부산지검 울산지청 김용원 검사가 등산 중 우연히 눈뜨고는 못 볼 인권유린 현장을 목격했다. 경남 울주군 소재 한 작업장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된 형제복지원생들의 참혹한 모습이었다. 당시 이를 수상히 여긴 김 검사는 인지 사건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그는 부산 형제복지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거쳐 박인근 원장까지 수사를 확대했다. ‘일개 지청 검사’의 칼날이 박인근 원장으로 향하자 전두환 정권의 지역 공안기관 등 비호세력이 발칵 뒤집혔다. 형제복지원 압수수색 사흘 뒤인 1987년 1월19일 부산시장, 부산지검장, 부산시교육감, 안기부 부산분실장, 보안사 501보안부대장, 부산시 경찰국장, 민정당 부산시사무국장, 부산 북구청장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형제복지원에 대한 언론 보도 통제, 박인근 원장 불구속 추진 협의, 형제복지원에 대한 경찰병력 투입 등을 주제로 무려 13차례나 지역대책협의회를 개최했다.

김용원 검사는 특수감금죄, 건축법 및 외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형제복지원장 박인근을 기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핵심 범죄 혐의에서 박인근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1989년 7월 대법원은 정부 훈령에 따른 부랑자 수용이었다는 이유로 박인근의 특수감금죄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다. 대신 건축법 위반, 업무상 횡령 혐의만 인정해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다. 솜방망이 처벌 끝에 박인근이 풀려나자 그동안 폐쇄되었던 형제복지원은 이름을 바꾼 채 부활했다. 박인근은 1990년대 들어 형제복지원 법인명을 욥의마을 등으로 수시로 바꾸며 각종 수익사업을 계속 이어갔다. 2001년에는 부랑인 공익사업을 한다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정부로부터 헐값에 불하받았던 국유림을 한 건설사에 팔아 200억원 넘는 시세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박인근과 그의 일가친척이 보유한 국내외 재산은 수천억원 규모로 알려졌다. 형제복지원장 박인근은 2016년 지병이 악화되어 한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재산은 자녀에게 상속됐다.

참상 알려진 지 35년 만의 진실 규명

반면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정부와 사회의 냉대 속에 오랜 세월 각종 인권유린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숨죽여 살아야 했다. 그나마 2012년 들어 일부 생존 피해자들이 ‘1인 시위’와 ‘증언 대회’ 등을 통해 목소리를 내면서 국가권력의 비호 아래 감춰진 인권유린 참상이 얼마간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정부와 국회의 움직임은 더뎠다. 생존 피해자들은 2015년부터 5년 동안 국회 앞에서 천막 노숙농성, 의사당 고공 단식농성 등 지난한 싸움을 벌이며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과 해결을 촉구했다. 2020년 5월, ‘계란으로 바위치기’식 싸움 끝에 피해 생존자들은 마침내 진실의 문을 열었다. 국회의사당 고공 농성으로 여론이 형제복지원 사건에 쏠리자 부담을 느낀 여야 정치권이 극적으로 과거사법 개정안에 합의함으로써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태동한 것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2기 진실화해위의 1호 사건이 되었다. 진실화해위는 8월23일, 1년3개월 동안의 조사 끝에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의 진실 규명 결정을 의결했다. 참상이 알려진 지 35년 만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규명된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은 총 5가지 항목으로 요약된다.

우선 형제복지원에 강제수용한 근거가 됐던 내무부 훈령 제410호와 경찰 및 부산시의 부랑인 단속 규정은 위헌적이고 위법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훈령은 부랑인을 불우이웃보다는 범법자나 불순분자 등으로 간주해 이들을 사회에서 색출 격리하기 위해 부랑인 시설에 수용하고 감시하도록 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를 명백히 헌법 및 국제인권규범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수용 과정에서 경찰이 적용한 ‘비행예측법’은 청소년의 법률 저촉 행위가 아니라 가계 수준, 학력, 교우관계 등을 기준으로 우범 가능성을 판단해 격리 처분의 근거로 삼았다. 또 부산시는 내부무 훈령 제410호가 제정되기도 전에 형제복지원과 위탁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인신을 구속 감금하는 성격의 사업을 민간에 위탁하는 불법을 저질렀다.

군사정부의 초법적인 부랑인 단속 정책을 일선에서 집행하는 공권력이 부조리와 비리로 점철됐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진실화해위는 1985~1986년 부산 경찰 절반 이상이 무차별적인 부랑아와 부랑인 단속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구류 또는 과태료 처분으로 끝내야 할 경범죄 위반자들조차 대거 형제복지원에 인계했다. 경찰은 단속 인계 건수에 따라 일상적으로 형제복지원으로부터 일정 금액의 뒷돈을 받았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형제복지원은 권위주의 정권에서 공안기관의 공작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군 보안사와 검찰 등 공안기관은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을 신원 특이자로 구분해 형제복지원에 강제수용한 뒤 감시했다. 또 형제복지원에 보안사 요원을 침투시켜 간첩조작 수사 공작도 벌였다(‘공안 유착 속에 인권유린은 외면’ 기사 참조).

노예이자 축재의 원천이던 원생들

형제복지원 운영 과정은 구조적인 폭력과 인권유린 그 자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외부와 철저히 차단한 채 군대식 운영과 통제를 했다. 중대장 한 명이 원내 규율과 인원 관리, 교육 선도를 관장하고 각 소대 및 병동별로 관리하는 소대장을 선발해 3000여 명의 수용자들을 총 48개 소대로 나눠 운영했다. 원생들은 아침 일찍 기상해 정신교육 후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종교마저 강요당하는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내부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구타와 가혹행위, 성폭력 등이 만연했다. 대다수 원생들은 가족에게 편지조차 쓸 기회를 얻지 못했다. 형제복지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을 감행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대부분 붙잡혀 고문을 받고 본인 명의의 노동 적립금도 압수당했다.

형제복지원의 단속 차량. 피해자들은 이 차에 실려 복지원으로 향했다.ⓒ형제복지원 피해자 실태조사 연구용역 자료

‘형제복지원 왕국’을 꾸린 박인근 원장에게 원생들은 노예이자 축재의 원천이었다. 박인근은 수용자들을 타 사회복지시설 공사에 파견해 노동을 시키고 그 임금을 착복하기도 했다. 또 매일 자활사업 명목으로 강제노동을 시킨 뒤 그중 수익사업 수입을 자립 적금으로 지급한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직업훈련비 명목으로 착복했다. 아동 수용자에 대한 학대와 인권유린은 더욱 심각했다. 아동을 단속해 강제수용한 뒤 보호자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거나 가족 면회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강제 격리했다. 이들은 헌법과 교육법에 따른 초등 의무교육 혜택도 받지 못하고 노역에 종사해야 했다.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의 인권 상황을 지옥에 비견했다. 가혹한 인권유린 과정에서 사망에 이르거나 현재까지 생사 또는 행방이 확인되지 않은 피해자가 다수라고 밝혔다. 1986년 한 해 형제복지원의 사망률은 65세 이하 일반 국민 사망률에 비해 13.5배나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동안 공식적으로 알려진 형제복지원 수용 도중 사망자 수는 552명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진실화해위가 조사한 결과 사망자는 100여 명 더 많은 657명으로 드러났다. 형제복지원은 가혹한 인권유린 과정에서 사망한 원생들의 수와 사인을 축소 조작한 것이다.

박인근은 수용자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정신과 약물 투여를 통한 화학적 구속도 서슴지 않았다. 3000여 명이 수용된 형제복지원에서 의무실을 운영했는데 산부인과 전문인 촉탁의 김○○ 한 사람이 모든 질병을 진료하고 처방했다. 형제복지원의 야만적인 인권유린은 비전문가에 의한 정신과적 약물 투여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특히 1982년 박인근의 처가 원장으로 부임한 형제정신요양원은 가족 재산 증식 목적으로 설립 운영한 시설이었다. 정신요양원 촉탁의사 인건비는 전액 국고 지원이었는데 박인근 가족은 이 중 절반을 받아 챙겼다. 이어 박인근은 형제복지원에서 가혹행위에 반항하는 이들을 강압적으로 정신병동으로 추방해 촉탁의 김○○의 묵인 아래 간부 원생으로 하여금 임의로 약물을 투여해 다스리게 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이런 가혹행위가 당국의 묵인 방조 아래 지속됐다는 점이다. 형제복지원 관리 주무관청인 부산시와 북구에서는 내부에서 발생한 가혹행위를 애써 눈감아줬다. 종종 공무원들이 형제복지원을 방문해도 박인근 원장의 안내에 따라 대충 둘러보고 갈 뿐 수용자들을 대면하지 않았다. 부산시는 1987년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형식적인 형제복지원 운영실태 조사자료를 내고 “원생 상호 간의 폭행은 있을 수 없고 경우에 따라 구타가 간혹 발생했다”라고 축소 발표했다. 부산시는 박인근 원장을 비호했다. 박인근 구속 이튿날인 1987년 1월18일 부산시는 “(전두환) 정부로부터 국민포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바 있는 박인근 원장이 도피할 염려가 없으니 불구속 입건해 원무를 계속 수행토록 해달라”고 당시 보건사회부에 건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진실화해위는 조사 결과 발표를 통해 그동안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문제에 대한 진정을 국가가 묵살했고, 사실을 인지하고도 조치하지 않았으며,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을 축소·왜곡해 실체적 사실관계에 따른 합당한 법적 처단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가는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합당한 배·보상 조치 및 트라우마 치유 지원방안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또 사회복지시설에서 유사한 인권침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감독하고, 관련 제도 및 정부 지원체계를 점검하여 시정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했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