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왼쪽 깜빡이는 켰다. 지난 6월22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처음 언급한 이후, ‘중도실용’은 이명박 대통령(MB)의 입버릇이 되다시피 했다. 그보다 1주일 전인 6월15일의 라디오 정례연설에서 MB가 언급했던 ‘근원적 처방’이 중도실용이라는 말로 구체화되는 그림이다. 이른바 ‘친서민 행보’도 선언했다. 6월25일에는 분식집을 찾아 어묵을 먹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집권 후 1년 동안 우향우로도 모자라 역주행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던 이명박 정부가 ‘이번에야말로’ 방향 전환에 들어간 걸까, 그게 아니면 ‘이번에도 역시나’ 생색내기일까.

‘좌클릭’의 조짐은 있다. MB가 중도실용 의제를 꺼내 든 데는 정두언 의원을 구심점으로 하는 소장 그룹의 의견이 적잖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7월1일자 중앙일보는 “청와대에 전달된 몇 건의 보고서가 이 대통령과 청와대에 충격을 줬고 결과적으로 이런 변화를 이끌어냈다”라고 보도하며, 구체적으로 두 건의 보고서를 지목했다. 하나는 ‘부자 정권 기조’를 바꿀 것을 요구한 당 전략기획본부의 보고서이고, 다른 하나는 MB의 이념좌표가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보다도 보수적이라고 나온 청와대 홍보기획관실의 보고서다. 가장 진보를 0, 가장 보수를 10으로 본 이 보고서에서 이 대통령은 이념지표 7로 조사돼, 6으로 나온 이회창 총재보다 오른쪽에 위치했고, 이에 MB가 큰 충격을 받았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지난해 12월의 ‘가락시장 목도리 이벤트’는 ‘정치 쇼’라는 혹평과 함께 반짝 효과에 그쳤다.

“소장 그룹 말발이 확실히 먹힌다”

이를 두고 한나라당의 한 수도권 의원은 “당 전략기획본부 보고서는 사실상 정태근 의원이 주도했고, 홍보기획관실 보고서야 박형준 홍보기획관 작품 아닌가. 두 사람 모두 정두언 의원과 궤를 같이하는 소장 측근 그룹이다. 이들이 원로 그룹에 완전히 ‘제껴졌던’ 집권 첫해와 달리, 요즘은 말발이 확실히 먹힌다”라고 말했다. 정두언 의원,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 박형준 홍보기획관에다 중도 성향의 소장파 의원들이 더해진 대선 후보 시절의 참모 그룹이 다시 힘을 받는다는 얘기다. 촛불집회에 크게 덴 MB가 이른바 ‘집토끼 챙기기’로 보수층을 다잡았지만, 그 와중에 MB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핵심 지지 기반인 연령·지역·계층·이념적 중간층(40대·수도권·중산층·중도 세력)이 정작 거부 세력으로 돌아섰던 것이 지난 1년의 흐름이었다면, ‘중간층 공략’에 성공해 MB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소장 그룹이 다시금 반전을 꾀하고 나선 셈이다.

첫 화두로 꺼내 든 것이 교육이다. 지난 4월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들고 나섰던 ‘사교육과의 전쟁’ 깃발을 6월 들어 정두언 의원이 이어받으면서, 교육개혁이 이명박 정부의 중도실용 정책 의지를 보여주는 시험대로 떠올랐다(28~29쪽 기사). MB 역시 연일 사교육 대책 관련 발언을 쏟아내며 보조를 맞췄다. 과중한 사교육비는 중산층과 서민을 특히 괴롭히는 문제이니만큼, 일단 좌표 설정 하나는 제대로 된 그림이다. 이른바 ‘곽승준-정두언 교육개혁안’이 여론의 관심을 끌자, 교육과학기술부와 야당이 뒤질세라 사교육 대책과 법안을 내며 주도권 쟁탈전에 나선 것만 봐도 그렇다.

“대통령과 나의 문제의식이 일치하는 것일 뿐, 청와대와의 교감 아래 움직이는 일은 아니다.” ‘주동자’ 정두언 의원의 말이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아니지만, 소장 측근 그룹과 대통령의 뜻이 일치한다는 얘기다. ‘집권 1기’를 주도해온 보수 성향의 영남 원로 그룹과 학자·관료 그룹에 대한 소장파의 ‘항전 의지’는 곳곳에서 읽힌다. 연이은 선거 패배와 지지율 정체 현상을 그대로 뒀다가는 정치생명 자체가 위태로운 이들 소장 그룹은, 이명박 정부와 운명을 같이할 원로 그룹에 비해 여론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좀체 반전 기미를 보이지 않는 여론을 두고, MB 자신이 근본적 문제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 전직 청와대 비서관은 MB가 6월15일 라디오 연설에서 말한 ‘근원적 처방’이라는 표현에 주목했다. ‘MB식 어법’으로 보면 이례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뭐가 다를까? 다시금 친서민 행보를 선언하며 분식집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

그는 “원래 교육개혁은 공공부문 개혁과 더불어 대통령의 주요 화두였다. 대통령도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종의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중이었고, ‘근원적 처방’이라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그런 흐름에서 소장파 주도로 교육개혁안이 나오니까 이를 받아들인 것 같다. 구체적으로 힘을 실어주거나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청와대의 기류와 맞아떨어지는 소장 그룹의 화두를 수용하는 그림으로 보는 게 맞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당과 청의 기류가 만나는 타이밍이라는 얘기다.

소장 그룹이 MB의 ‘좌클릭’을 종용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촛불집회 이후 MB가 보수층에 기대면서 이들의 주장은 번번이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됐다. 박형준 홍보기획관은 지난해에도 ‘가락시장 목도리 이벤트’를 기획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당시의 친서민 행보는 정책으로 연결되지 않으면서 오히려 웃음거리만 됐다. ‘분식집 어묵’으로 시작된 이번 행보 역시 같은 꼴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목도리와 어묵이 아니라 돈과 사람이다. 대통령이 가지는 힘이란 돈을 어디에 쓰고 어떤 사람을 앉히는가를 결정하는 힘이다. 여권은 우선 행정력을 동원해 돌파가 가능해 보이는 교육 문제부터 접근하기 시작했지만, 인사와 예산에서 근본 쇄신이 없이는 친서민 행보 역시 한계에 부딪힐 것은 자명하다. 당장 막대한 규모의 부자 감세로 구멍 난 재정을 간접세 인상으로 메워보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정부에서 ‘근본 방향전환’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지난 6월30일까지 각 부처가 기획재정부에 제출한 2010년 예산안이 공개될 즈음이면, 대통령의 친서민 행보가 실제 정책기조 전환인지 내용 없는 말잔치인지 드러날 전망이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