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작가의 책 〈역사의 역사〉 표지에 사용된 이미지.
유시민 작가의 책 〈역사의 역사〉.

내추럴 와인 같은 디자인을 가진 책들이 있다. 내추럴 와인은 이름 그대로 자연을 존중해서 만든다. 기존 컨벤셔널 와인과 달리 화학약품을 쓰지 않는다. 와인을 사람이 아니라 포도에 맞춘다.

내추럴 와인 같은 책들도 사람보다는 책의 메시지 쪽에 디자인이 반응한다. 그래서 때로는 독자들에게 익숙한 관습과 맞지 않을 수 있다. 독자들은 본문 디자인에 보수적인 편이다. 독서는 많은 시간과 노고를 들이는 일이기에, 독자들은 그 긴 시간 동안의 안전함과 편안함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가끔은 내추럴 와인 같은 디자인의 책들이 주는 특별한 여흥도 권하고 싶다. 살짝 불안정하고 다루기 까다롭지만, 거부하기 어려운 개성과 매력이 그 안에 있다.

책을 향유한다는 것은 텍스트를 읽는 것만이 아니다. 책의 구조와 물성, 감각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책은 ‘종합예술’이다. 이런 복합적이고 다채로운 감흥을 자극하는 책으로, 동신사를 운영하는 김동신 디자이너의 북디자인 3종을 소개하고 싶다.

〈역사의 역사〉에서는 훤칠한 본문 디자인과 김경태 사진작가에게 사진을 의뢰한 아트 디렉션이 눈길을 끈다. 유시민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한 역사책들이 둥글게 펼쳐져 연출되었다. 사진 속 책들의 표지가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는 모습은 독서의 능동성을, 둥글게 펼쳐진 모습은 역사의 시간성을 연상하게 한다. 이 책의 제목이 ‘역사의 역사’로 제시되었듯 디자이너는 이 책을 ‘역사책의 역사책’이라고 디자인으로 응답하는 듯하다.

〈노무현 전집〉은 통상적인 인물 초상을 쓰는 대신, 노무현이라는 인물의 의지와 희망을 그래픽과 타이포그래피의 층위에서 드러낸다. 〈노무현 전집〉은 여섯 권으로 이루어졌다. 김동신은 각 권에 광역지방자치단체들의 글자체와 심벌마크의 색상들을 적용했다. 1권은 제주고딕체, 2권은 푸른전남체 등을 사용하는 식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여섯 권에서 지역들이 각자의 색채감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전집으로 모이면 통합된 대한민국을 이룬다. 기존 관성에 따르기보다는, 북디자이너로서 책의 취지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응답을 이렇게 말없이 내어놓는다.

타이포그래피로 표지를 디자인한 〈노무현 전집〉.

이번에는 상업 출판을 넘어, 더 모험적인 ‘시음’을 해보자. 그에 앞서, ‘독립 출판’과 ‘저자로서의 디자이너’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가야 할 것 같다.

‘독립 출판’은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일까? 상업적 제약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상업 출판은 단단한 격을 갖추었고, 독립 출판은 기존 관습에 예리한 질문을 던지며 책이라는 매체에 활력을 더한다. 이 둘은 좋은 기운을 주고받으며 공진화해간다.

‘저자로서의 디자이너’라는 개념은 디자이너가 텍스트의 저자를 겸한다는 뜻은 아니다. 책이라는 공간 안에서 텍스트 아닌 디자인으로 저자성을 가진다는 뜻이다. 텍스트로는 아무 말 하지 않지만, 디자인으로 말없이 메시지를 제시한다.

북디자인 정의 새로 써내려가는 디자이너

김동신 디자이너가 기획한 〈인덱스카드 인덱스〉.

이런 성격을 가진 책으로 디자이너 김동신이 기획한 〈인덱스카드 인덱스〉 시리즈를 꼽고 싶다. 김동신은 인덱스카드를 쓰는 습관이 있다. 카드를 작성한 순서에 따라 번호를 매긴다. A6 정도 크기인 이 카드들의 분량은 2000장을 훌쩍 넘겨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인덱스카드가 늘어나면 정보의 구조를 조직해야 하고, 인덱스카드에 대한 인덱스, 즉 색인이 필요해진다. 김동신의 〈인덱스카드 인덱스〉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 책들에서는 본문이 때로 인덱스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이럴 때에 단어들과 숫자들은 문장으로 매끄럽게 흘러가지 않고 달그락거린다. 단어들은 문장이 아니라 무늬를 만든다. 이 무늬들은 수수께끼이지만 질서를 갖고 있어서 마치 수학 공식 같다. 한눈에 풀리지는 않아도 디자인 구조가 논리적으로 설계되어 있기에, 독자는 그 논리의 근거와 형식을 찾아내며 책을 해독할 수 있다. 이런 수수께끼들은 독자에게 저항하면서도 독자들을 기다린다.

인덱스카드는 자료 속 타인의 생각이 섞여 들기도 하면서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작업으로 귀결된다. 인덱스는 그 비선형적인 과정을 구조화한다. 이 시리즈 〈인덱스카드 인덱스〉는 한 개인이 세상의 생각들과 관계를 맺는 양상을 책의 구조적인 형식으로서 드러낸다. 김동신은 이런 작업을 하면서 북디자인의 정의를 새로 써내려가는 디자이너다.

책은 여러 경로로 독자에게 스며든다. 이치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 스며든다. 나는 〈인덱스카드 인덱스〉를 유심히 뒤적이는 경험을 한 후, 이제 다른 책들을 볼 때도 인덱스에 더 신경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책과 독서가 사람을 바꾸어놓는 일은 텍스트를 넘어 여러 층위에서 일어난다.

기자명 유지원 (타이포그래퍼·글문화연구소 소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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