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1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중소기업 납품단가 제값받기를 위한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18개 중소기업 단체 관계자들. ⓒ연합뉴스

2022년 상반기, 최대 경제 이슈는 인플레이션이다. 팬데믹 기간에 파괴된 글로벌 공급망이 쉽사리 회복되지 않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천연자원과 곡물 등의 가격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물가상승은 경제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쳤지만 그 여파는 불균등하게 배분됐다. 특히 중소기업들은 물가상승의 여파를 자신들이 떠안고 있다고 아우성쳤다. 뇌관은 납품단가였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물가상승에도 불구하고 납품단가를 올려주지 않아 손실을 입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금속공업협동조합 이의현 이사장은 “우리 조합 소속 기업들의 생산원가에서 원자재 가격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80%다. 그런데 지난해와 올해 원자재 가격이 각각 10%, 15%씩 올랐다. 마진율이 평균 3% 수준이기 때문에 중소기업들이 제대로 된 이윤을 내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중소기업들이 납품단가 인상을 강력히 요구하지 못하는 것은 대기업과의 관계가 생존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은 주로 대기업과 위·수탁 계약을 맺어 중간재를 납품하거나 하도급 계약을 맺는 사업 형태를 가진다. 대기업과의 재계약은 이들에겐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재계약이 되지 않을까 두려운 중소기업들은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납품단가에 반영해달라고 쉽사리 요구하지 못한다. 2021년 중소기업중앙회(중앙회)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 기업의 96.9%가 대표 생산 제품에 소요되는 전체 공급원가가 상승했다고 답했지만, 45.8%는 공급원가 상승을 납품대금에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계약을 연장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물가 인상분을 감내하는 것이다.

중소기업계에서 납품단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큰 폭의 물가상승이 있을 때마다 중소기업들은 납품단가가 조정되지 않아 고통받고 있다고 항의했다. 처음으로 납품단가 문제가 부각된 것은 2008년이었다.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자, 납품단가를 조정하지 못한 중소기업들은 개선 방안으로 납품단가 물가연동제(물가연동제)를 촉구했다. 원자재 가격이 급격히 상승할 경우, 납품단가가 이에 발맞춰 올라갈 수 있도록 제도화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물가연동제는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대기업들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서는 “물가연동제도 가격규제의 한 유형”이라며 산업의 경쟁력과 성장이 저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는 ‘계약의 자유’로 대표되는 사적자치의 원칙을 침해할 수 있다며 물가연동제에 반대했다. 결국 물가연동제는 법제화로 이어지지 못했고, ‘납품대금 조정협의제(조정협의제)’를 도입하는 것으로 축소됐다. 원자재 등의 가격이 크게 오른 경우 원청 기업에 납품단가 조정을 요청할 수 있게 한 것이다.

2009년 처음 실행된 이래 조정협의제는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계약 해지의 두려움을 겪는 중소기업들은 납품단가 조정협의마저도 신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와 국회는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거래 중단 등 보복조치 시 공공분야 입찰 참여를 제한하는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도입하고, 중소기업협동조합이 납품대금 조정협의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초 시행 이후 6차례에 걸쳐 법을 개정했음에도 조정협의제는 외면받았다.

중소기업의 혁신 의지 꺾는 제도?

가장 최근의 개정은 2021년부터 중앙회에 조정협의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개별 기업 차원에서 조정협의를 신청하기 어렵다는 의견에 대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2022년 5월 현재까지 중앙회를 통한 조정협의 신청은 단 한 건도 없었다. 2021년 중앙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67.5%는 중앙회를 통해 조정협의를 할 의향이 없다고 답했다. 중소기업들은 그 이유로 원만한 거래관계 유지(65.7%), 납품단가 인상 보장이 없음(51.5%), 신원 노출에 따른 거래 단절 우려(27.0%) 등을 꼽았다.

그러나 주무 부처인 중소벤처기업부(중기부)의 상황 파악은 이런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2020년 4월1일 중기부가 발표한 ‘납품대금조정협의제도 활용실태 조사’에 따르면 제도 활용이 가능한 중소기업 96개사 중 65.6%가 조정을 신청했으며, 그중 85.7%가 납품대금 인상 합의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조정협의제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결과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김은하 중소기업연구소 연구위원. ⓒ시사IN 신선영

문제는 조사 표본 선정 방식이다. 중앙회는 직접 중소기업 표본을 확보한 반면, 중기부는 위탁기업(대기업)을 통해 수탁기업(중소기업) 명단을 제출받았다. 대기업에서 자신과 위·수탁 계약을 맺은 전체 중소기업의 목록을 제공했는지, 아니면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의 명단만 제공했는지 중기부는 알 수 없다. 중기부 관계자는 “모든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위·수탁 계약을 맺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위탁기업을 통해 수탁기업 명단을 확보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지난 20대 대선 기간에, 대선 후보들이 물가연동제 도입을 약속하거나 취지에 공감한다는 뜻을 밝히면서 물가연동제 논의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무 부처인 중기부는 여전히 물가연동제 도입에 대해 소극적 입장을 견지했다. 중기부는 “취지에는 공감하나, 법적 의무화는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물가연동제 의무 시행 시 원가절감에 대한 중소기업의 혁신 의지가 저해될 우려가 있다”라고 말했다. 공정위와 전경련 등은 여전히 “정부가 시장가격 결정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이라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물가연동제는 정말 시장의 자유를 침해하고 중소기업의 혁신 의지를 꺾는 제도일까? 중소기업연구소 김은하 연구위원은 시장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물가연동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계약의 기본 원칙은 ‘의사의 합치를 통한 권리·의무 창설’이다. 즉, 양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계약이 맺어져야 한다. 그러나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불균형한 힘의 관계는 이러한 자유로운 의사의 합치를 방해한다. 대기업의 시장지배력으로 인해 ‘물가상승 시 납품단가를 올려 받아야 한다’라는 중소기업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못하는 것이다. 김 연구위원은 “대·중소기업이 공정한 계약을 통해 물가 리스크를 나눠 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유방임이 아니라 공적 영역의 적절한 개입이다”라고 말했다.

더욱이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물가연동제 법안은 대·중소기업 간 구체적인 계약 내용을 일률적으로 정하지 않기 때문에 ‘지나친 개입’이라고 보기 어렵다. 예컨대 현재 국회에 제출된 상생협력법 개정안은 위·수탁 계약 시 작성하는 약정서 조항 중 하나로 ‘원자재 가격 상승 시 납품단가를 어떻게 조정할지’를 당사자 간 협의에 따라 명시하라고 규정한다. 현행 법안은 약정서를 발급할 때 대금 지급 방법과 지급기일 등의 항목을 포함하라고 규정하는데, 여기에 한 가지 조항을 추가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논의 중인 물가연동제 법안이 구체적인 계약 내용에까지 간섭한다고 볼 수는 없다.

“자율 상태로 맡겨서는 해결 안 된다”

김경만 더불어민주당 의원. ⓒ시사IN 윤무영

또한 김은하 연구위원은 혁신을 위해서라도 중소기업이 적정한 마진을 남길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 연구위원은 “혁신도 땅 파서 하는 게 아니다. 유무형의 자산이 투입되어야 하는 일이다. 기업 내부 자원이 고갈돼버린다면 오히려 혁신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사라진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하도급법과 상생협력법 개정안을 발의해 물가연동제 도입을 주장한 김경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물가연동제가 개별 중소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김 의원은 “우리는 일본의 수출규제를 겪으면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산업의 육성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낀 바 있다. 결국 대기업과 협력하는 중소기업들이 공존해야 공급망이 일시적으로 흔들려도 산업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산업 전반의 경쟁력과 회복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대·중소기업 간 동반성장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적정한 납품단가의 보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가연동제가 이번엔 국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까.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윤석열 정부 110대 국정과제’에서 물가연동제 대신 ‘납품단가 조정협의 실효성 강화, 자율적 납품단가 조정 관행 확산’ 등이 제시되면서 법제화는 표류하는 듯했다. 5월4일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납품단가 연동제는 양당 대선후보 모두의 공약”이라며 국민의힘에 물가연동제 도입을 촉구했다.

5월11일 열린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청문회에서 이영 장관이 물가연동제를 지지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영 장관은 “자율 상태로 맡겨서는 시장에서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이다. 법제화를 해서 최소한의 보호를 하는 것은 중기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5월17일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정책 토론회를 개최해 빠른 법제화를 약속했으며, 5월18일에는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올 하반기에 물가연동제를 시범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기자명 주하은 기자 다른기사 보기 ki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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