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 그레벤니크 작가가 〈전쟁일기〉에 실린 그림ⓒ이야기장수 제공

2022년 3월2일, 나는 ‘이야기장수’라는 별난 이름의 출판사를 시작했다. 사람들을 울리거나 웃기는 책을 만들겠다는 장수의 포부에 그간 인연을 맺었던 분들이 원고와 제안들을 보내오곤 했다. 3월18일, 그날도 출간 검토를 부탁한다는 메일 한 통이 왔다. 그런데 ‘일단 한번 쓰윽’ 봐달라는 식의 의례적인 말도 없이, 메일을 확인하고 나서 바로 통화하고 싶다는 전언이 있었다. 발신자는 이전부터 오래 알아오고 신뢰하는 사이였으나 단 한 번도 내게 그런 ‘다급함’을 드러낸 적이 없는 사람, ‘이건 매우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구나’ 싶었다.

그때 나는 부산에 있었다. 잠시 길거리에 멈춰 서서 메일을 읽어내려 갔다. 원고의 작가는 한국인이 아니었다. ‘우크라이나 작가의 원고. 전쟁 첫날부터 지금까지 노트 한 권에 전쟁 상황을 그리고 쓰고 있다. 남편과는 국경에서 헤어졌고, 지금은 두 아이와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폴란드에서 피난 중이다. 이것은 전쟁일기다.’ 어깨에 메고 있던 무거운 배낭을 길가에 턱 내려놓았다. 그 순간부터 나의 시계는 미친 듯이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올가 그레벤니크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베스트셀러 그림책을 출간한 그림작가다. 그의 그림을 사랑하는 SNS 팔로어 5만여 명과 그림으로 소통해왔고, ‘천 개의 계획과 꿈’을 가지고 있던 촉망받는 작가였다.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작가는 화려한 색감과 판타지로 가득했던 동화를 더 이상 그릴 수 없었다. 폭격이 시작되면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연필 한 자루와 노트만 든 채 지하실로 뛰었다. 그리고 전쟁의 날들을 노트에 기록했다. 세계 곳곳의 팔로어들이 올가 그레벤니크 작가와 가족들의 안부와 상황을 물었다. 작가는 그림일기를 핸드폰으로 촬영해 올렸다. 드문드문 올라오는 그 급박한 전쟁 통신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오랜 팔로어들 중에는 한국인도 있었다. 그가 이 원고의 존재를 내게 전했다.

〈전쟁일기〉를 인쇄소에 넘긴 날은 4월5일 아침이었다. 통상 완고를 받은 뒤에도 두 달 정도의 편집 기간이 필요한데, 이 작가의 존재를 안 날로부터 약 보름 만에 책 제작을 넘겼으니,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계약, 완성된 원고 입수, 번역, 디자인, 편집, 작가의 말 집필, 저자 교정이 모두 보름 안에 마무리된 것이다. 빠른 시간 내에 이 모든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나와 올가 그레벤니크 작가 사이에 정소은 번역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 번역가는 나와 올가 작가 사이의 시차(時差)를 무화시켰다. 내가 전달하면 곧장 그 자리에서 번역해 올가 작가에게 전달했고, 올가 작가의 답이 실시간으로 날아왔다. 정소은 번역가는 탁월한 번역가일 뿐만 아니라, 통역사, 그리고 작가와 출판사의 어렵고 민감한 부분까지 취합하고 조율하고 전달하는 에이전트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정 번역가가 있었기에 나는 올가 그레벤니크 작가와 아주 가까이에 있는 국내 작가와 일하듯 소통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와 주고받은 메신저 창을 열어보니, 한참을 올려도 대화가 끝없이 이어진다.

올가 그레벤니크 작가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이야기장수 제공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받아 작업

내가 올가 작가와 처음 연락이 닿았을 때 그는 폴란드에서 피난 생활 중이었으나 이내 다시 불가리아로 옮겨가야 했다. 통상적인 출판 과정이었다면 작가가 원화를 스캔하여 디지털 파일을 출판사에 전달했겠지만, 이번엔 워낙 긴급했기에 작가가 핸드폰으로 찍은 노트 사진을 낱장으로 전달받아 작업했다. 핸드폰 사진에서 연필그림 선을 따서 실제 노트와 가장 유사하게 농도를 맞춰 한 땀 한 땀 작업한 북디자이너의 수고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책이 출간되고 올가 그레벤니크 작가와 정소은 번역가, 그리고 내가 화상으로 만났다.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는 어머니와 남편의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눈이 붉어졌다.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에도 우크라이나에서 데려온 반려견 미키가 왕왕거리면서 뛰어다니고, 딸 베라는 아장아장 걸어와 모니터 화면을 향해 손을 흔들다 엄마 등에 업히듯 매달렸다. 나는 강아지 한 마리 데리고 동네 이사 갈 때도 지쳤는데, 국경을 두 차례나 넘으며 강아지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견뎌냈을까. 올가 작가는 잠시 강아지를 진정시키고 오겠다며 화면 너머로 사라지기도 했고, 품속으로 파고드는 딸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기도 했다. 엄마구나, 돌볼 것도 많고 지켜야 할 것도 많은 엄마였구나. 저 숨 가쁘고 애타는 나날 속에서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책 작업을 해낸 것이었구나. ‘전쟁 그만!’이라고 세상을 향해 외치기 위해서. 나는 두 손을 모으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너무 큰 공포와 작별을 겪은 얼굴엔 무거운 피로와 슬픔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그는 나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정소은 번역가는 이 책의 번역료 전액을 우크라이나에 기부한다. “전쟁이 일어난 이 무서운 상황들 속에서 작은 한 사람의 어떠한 재능이나 노력으로라도 서로를 도와주어야 한다”라고 그는 역자 후기에 썼다. 이야기장수도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의 자원봉사단 ‘케어박스(Care box)’에 수익금 일부를 기부했고 앞으로도 계속 기부하고 싶다. 올가 작가의 우크라이나 집은 폭격으로 불탔고 마을은 폭격으로 황폐해졌다. 전쟁이 끝나고 헤어진 가족과 다시 만나도 일상을 복구하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황선우 작가는 이렇게 썼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다.” 사람이기에 사람들이 몰살당하는 것을 슬퍼한다. 사람이기에 사람을 도울 수 있다, 작은 책 한 권으로도.

기자명 이연실 (이야기장수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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