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나 벨리헬 씨.ⓒ김진경 제공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전쟁을 피해 우크라이나를 떠난 사람은 지금까지 약 510만명(유엔난민기구 4월22일 기준), 그중 약 4만명이 스위스에 들어왔다. 이 중 절반은 정부가 지원하는 난민 수용시설에서, 나머지 절반은 일반 가정에서 지내고 있다. 지난 4월22일 저녁에 만난 우크라이나 난민 여성 엘리나 벨리헬 씨(35)는 전쟁 발발 당일인 2월24일 아침에 우크라이나 이르핀을 떠나 2월28일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했다. 엘리나는 나흘간의 우크라이나 탈출 과정, 그리고 이후 스위스에서의 난민 생활에 대해 상세히 들려주면서 “한국인들에게도 우리의 사정이 잘 알려지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근처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했더니 그는 “보르시치를 대접하고 싶으니 집으로 오라”고 했다. 엘리나는 현재 취리히에서 남쪽으로 약 30분 떨어진 마을 바르에 있는 한 가정집에서 지내고 있다. 보르시치는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러시아, 폴란드 등 동유럽권 국가에서 즐겨 먹는 전통 수프다. 순무(비트)가 들어가 강렬한 붉은색을 띠는 건 공통적이지만 구체적인 조리법은 나라마다, 또 집집마다 다르다. 이날 엘리나가 만든 보르시치는 순무·당근·양파·파슬리 등이 들어간 것으로, 친구의 어머니에게 배운 레시피라고 했다. 오래 끓인 뿌리 야채에서 우러난 단맛과 신선한 파슬리에서 나는 새콤한 맛이 잘 어우러지는 수프였다. 먹으면서 준비한 질문을 하려 했더니, 엘리나는 “일단 먹고 시작합시다”라고 했다. 나는 녹음기를 켜려던 손을 멈췄다. 음식 얘기를 하면서 보르시치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먹은 그릇을 치운 뒤 엘리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원래 오데사 출신이지만, 최근 몇 년간은 수도 키이우 인근 도시인 이르핀에서 의상 디자이너 일을 하며 살고 있었다. 2월23일, 그러니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하루 전날, 친구 A가 엘리나의 집으로 왔다. A는 우크라이나 서부 우즈호로드에 사는데 2월24일 아침 7시에 키이우의 유명 의사에게 무릎 수술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우즈호로드와 키이우 간 거리가 멀다 보니 수술 전날 키이우 가까이 사는 엘리나의 집에서 하루 머물기로 한 것이다.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 일찍 잠들었던 이들은, 2월24일 새벽 4시에 폭탄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그전에도 소문은 무성했죠. 전쟁이 실제로 일어날 것인지, 러시아 군이 언제쯤 쳐들어올지… 우리는 걱정을 하면서도 늘 하던 대로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날 새벽에 전쟁이 시작된 거예요.” 폭탄 소리에 일어난 A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약 시간인 오전 7시에 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A와 엘리나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고 짐을 챙겼다. 오전 9시, 엘리나는 함께 의상 디자인 일을 하던 친구 둘과 함께 A의 차에 올랐다.

우크라이나 전통 수프인 보르시치를 직접 요리해주었다. 필요한 식재료는 동네 러시아 식품점에서 구한다고 했다.ⓒ김진경 제공

문제는 기름이었다. 목적지는 A가 사는 우크라이나 서부 우즈호로드로, 평소라면 차로 10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다행히 엘리나와 한 건물에 사는 남자가 비상 상황에 대비해 기름을 비축해뒀다. 그에게 기름을 구입해 차에 실은 뒤 도로로 나갔다. 이르핀 시내는 아수라장이었다. “길은 차로 빽빽한데 주유소는 다 문을 닫았어요. 차가 없거나 기름이 없는 사람들은 짐 가방을 들고 걷고 있었어요. 어린아이들 손을 잡고 무작정 서쪽으로 걷고 있었다고요. 너무 무서웠어요. 다들 패닉 상태였어요. 차 사고도 많이 났습니다.” 곳곳의 검문소에서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서류와 가방을 확인했다. 엘리나와 친구들은 평소의 두 배인 20시간 만에 우즈호로드에 도착했다.

엘리나는 우즈호로드에 도착하자마자 고향 오데사에 사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데사에 있는 엘리나의 할머니, 삼촌, 이모는 당장은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할머니 집에서 10㎞ 떨어진 군부대에 폭탄이 떨어지긴 했지만 현재 러시아 군이 주변에 있는 것은 아니라서 좀 더 기다려보겠다는 뜻이다. 엘리나가 오데사에서 알고 지내던 이들 중 아이들이 있는 세 가족이 우즈호로드로 왔다. 이들은 가진 기름을 모두 모아 차 한 대에 함께 타고 1000㎞가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오데사의 주유소에서는 1인당 기름 판매량을 20L로 제한했어요. 문을 닫은 주유소도 많았고, 문 연 곳을 찾아다니려면 또 기름을 써야 하니까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나는 사람이 많았죠.” 차 한 대를 함께 타고 온 이들 세 가족은 성인 남자 4명, 여자 4명 그리고 8개월 된 아기를 포함해 아이들이 3명이었다.

헤어지는 가족들은 그저 서로 이름을 불렀다

2월27일 아침, 엘리나와 세 가족은 헝가리 접경지역인 초프 기차역으로 갔다. 초프에서 헝가리 자호니로 가는 기차가 오후 1시에 오기로 예정돼 있었지만, 연착 끝에 실제 기차가 도착한 건 오후 6시였다. 엘리나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당시를 회상했다. “그 기차는 창문이 아주 컸어요. 남자 4명은 플랫폼에 서 있었고, (나를 포함해) 여자 5명과 아이 3명은 기차에 타고 있었죠. 큰 창문을 가운데 두고, 기차가 떠날 때까지 계속 서로를 쳐다보고 이름을 불렀어요. 무슨 특별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계속 불러요. 이 남자들은 기차에 탄 아이들의 아버지들, 여자들의 남편들이었어요. 기차가 떠나면 언제 다시 서로를 만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죠. 모두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을 순간이었어요.” 현재 18~60세 남자들은 우크라이나를 떠날 수 없다.

엘리나 일행은 헝가리 자호니에서 아는 사람의 미니밴을 타고 폴란드 크라쿠프로 이동했다. 총 389㎞, 차로 5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다. 크라쿠프로 간 것은 일행 중 일부가 그곳에 친척이 있어서였다. 친척네로 간 사람들을 빼고 남은 건 엘리나와 B, 그리고 B의 열두 살짜리 아들, 이렇게 셋이었다. B에게는 스위스에 사는 언니가 있었다. 언니네로 가는 B 모자와 함께, 엘리나도 스위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친구와 함께 이르핀 집을 떠날 때는 아무 계획이 없었어요. 위험한 곳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동하면서 얼떨결에 여기저기로 가게 된 거예요.”

4월23일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구호단체 ‘에센푸어 알레(모두를 위한 음식)’의 배급소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있다.ⓒREUTERS

2월28일 밤, 집을 떠난 지 4일 만에 엘리나는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 도착했다. 처음 며칠은 B의 가족과 함께 지냈지만 집이 좁아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스위스 정부는 난민이 일반 가정으로 갈 때 1인당 일정 규모의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나는 ‘취리히는 우크라이나를 돕는다(Zurich helps Ukraine)’라는 텔레그램 채팅방에 가입했다. 우크라이나 난민들과 취리히 주민들이 모인 채팅방이다. 이곳에서 엘리나는 자신을 받아줄 사람이 있는지 물었고, 나탈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나탈리아는 벨라루스 출신으로 영국인 남편, 아이와 살고 있다. 엘리나와는 러시아어로 대화한다.

스위스 정부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우크라이나 난민을 더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 철저한 관리란, 난민을 무작정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로 전쟁을 피해 우크라이나에서 온 난민이 맞는지 엄격히 심사한 뒤 전산망에 등록한다는 뜻이다. 심사를 통과한 난민들은 ‘S 비자’를 받는다. 1년 기한의 이 비자가 있으면 스위스에서 직업을 구해 일하는 게 가능하다. 등록된 난민들은 일반 가정에서 지낼 경우 한 달에 약 500스위스프랑(약 65만원), 정부 시설에서 지낼 경우 약 200스위스프랑(약 26만원)을 지원받는다. 정부 시설은 간단한 음식이 무료로 제공되기 때문에 현금 지원액이 더 적다. 또 언어학습 비용으로 난민 1인당 3000스위스프랑(약 390만원)이 지원된다. 난민들이 직업을 구하고 스위스 사회에 잘 적응하려면 언어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진짜 감정’을 잊지 않았으면”

스위스는 세계에서 물가가 매우 높은 나라 중 하나다. 도시마다 다르지만 1인당 최저생계비는 대략 1000~1500스위스프랑(약 130만~200만원)이다. 현재 난민 지원금은 이에 한참 모자란다. 도시 곳곳에 난민들에게 기부된 물품(음식·위생용품·옷·약품 등)을 분배하는 센터가 있는데, 일주일에 한 번 물품을 분배하는 날에는 이 센터 앞에 새벽부터 긴 줄이 늘어선다. 지원금만으로는 기본적인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부품에 의존해야 하는 불안한 상황이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언어를 배우고 직업을 구해야 하는데, 언어학습 비용도 지원 결정만 내렸지 집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EU)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교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 자격증도 유럽에서 통하지 않는다. 이력서를 내고 인터뷰를 하러 가려 해도 당장 교통비부터 걱정이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여성 난민들은 일자리를 구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다행히 엘리나는 일자리를 찾았다. 8월19일부터 취리히의 한 극장에서 의상 제작하는 일을 보조하기로 했다. 비교적 빨리 직업을 구한 건 의상 제작이 독일어를 하지 못해도 가능한, 전문 기술이 필요한 일이어서다. 모든 난민이 엘리나처럼 운이 좋은 것은 아니다.

지도에 표시한 엘리나 씨의 피난길 여정. 총 2000㎞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Google maps 갈무리

고통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하 호칭 생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엘리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젤렌스키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영웅입니다. 코미디언 대통령이라고 폄하받을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코미디언들의 단체를 만들어 이끌면서 분석력과 리더십을 보여줬고, 군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군대와 전쟁에 대해서도 잘 알아요. 젤렌스키는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국민을 자기 가족처럼 여기고 민생을 최우선으로 삼았어요. 교사들 최저임금이 높아졌고, 디지털 무브먼트로 국민 생활을 편하게 만들었어요.”

마지막으로 이 인터뷰 기사를 볼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엘리나는 “한국이 IT 강국이라는 점을 잘 압니다. 그런데 새로운 기술 말고도, 사람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요”라고 했다. “돕는 마음, 사랑, 연대 같은 ‘진짜 감정’이죠. 우리를 이어주는 진짜 감정이 없으면 커플이건, 가족이건, 나라건 쉽게 끊어져요. 한국인들이 진짜 감정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전 세계에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우크라이나도 전쟁 후 금방 재건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